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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boran Jan 27. 2022

[실내의 백가지] ep11. 실천을 삽니다

100 things i've never done

반복된 일상에 뻣뻣해진 몸과 마음을 이완하고자, 해보지 않았던 백 가지를 행동해보며 남기는 일상 기행문. 어쩌면 실내가 아니어도 좋다. 비루해도 좋고, 지루해도 좋다. 새로운 것, 혹은 잊고 있었던 그 어떤 것이든 환영하는 경험주의 일기장.



나도 그 이유를 정말 알고 싶지만, 나는 대체로 남들의 조언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정말 잘 흘리는 편이다. 이 이유로 친한 친구들에게 혼이 난 적도 많다. 몇 년 전쯤, 친구 유주가 나에게 가수 오왠의 노래 '오늘'을 추천해줬다. 나는 감흥 없는 대답으로 '오~ 들어볼게~'하고 말했지만 절대 듣지 않았다. 그로부터 몇 주 지난날, 나는 길거리 어딘가에서 오왠의 '오늘'을 우연히 듣게 되었고, 나는 이 노래가 너무 좋더라며 역으로 유주에게 추천을 했다가 욕을 알차게 먹어야만 했다. 밴드 잔나비가 유명해지기 전에, 나의 또 다른 친구 단비는 나에게 이 밴드를 소개해주며 얘네 노래는 웬만하면 다 좋으니 들어보라며 추천했다. 그때도 나는 역시나 꼭 들어보겠다고 대답했지만 당연히 듣지 않았고, 시간이 지나 잔나비가 대중의 관심을 받아 유명해졌을 때 나는 단비에게 '잔나비라는 밴드가 요즘 뜨던데, 노래가 하나같이 정말 좋더라'라며 거꾸로 추천을 했다가 또 욕을 오지게 들어야만 했다. 이런 사례가 여러 개 있는 걸 보니, 어이없지만 이 또한 나의 웃긴 습관 중 하나인 것 같다.


한동안 안 그러나 했더니 최근에 또 욕을 먹었다. 지난해의 나는 계획만 무성한 데 반해 상대적으로 실행력이 떨어지는 점에 관하여 고민이 많았다. 그런 나에게 도움이 될 거라며 친구가 나에게 어플 하나를 추천해줬는데, 아주 다양한 챌린지와 함께 소액을 결제해서 실행력을 높이는 앱이라 소개해줬다. 나는 어김없이 '오~ 좋은데? 깔아봐야겠다.'라고 대답했지만 역시나 깔지 않았다. 며칠 뒤, SNS 광고로 그 어플을 다시 만났지만, 친구의 조언을 귓등으로 들었던 나에게 그 챌린지 앱은 너무나도 초면이었다. 나는 그 어플을 다운로드했고, 사용했고, 만족을 넘어 감동까지 하며 결국 이 앱을 추천해줬던 친구에게 또 역으로 추천해버렸다. 친구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너는 참 남 말을 지독히도 안 듣는다'며 꾸짖었다.


무튼 이러한 웃픈 경로로 알게 된 어플 <챌린저스>는 내 나태한 일상을 아주 천천히, 자연스럽게, 그러나 확실히 바꾸고 있다. 코로나에 등 떠밀려 무기력해진 사람, 혹은 코로나와 상관없이 늘 나태했던 사람 모두에게 한 번쯤은 추천하고 싶은 앱, 챌린저스다. 내돈내산이라 말하고 싶지만, 내돈내산이라 칭하기에도 민망하다. 실행력만 높다면 원금은 회수되고 소액의 상금까지 제공되는 어플이기 때문이다.


원리는 간단하다. 자신이 평소 실천하고 싶었던 챌린지를 고른다. 그 챌린지에 걸고 싶은 돈을 1만 원에서 20만 원 내에서 자유롭게 배팅한다. 그리고 그 챌린지를 수행한다. 예를 들어 평일 내내 설거지를 하고 싶은데 그게 쉽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주 5회 설거지 챌린지'에 도전하면 된다. 2주나 4주 등의 정해진 기간 내에서 배팅했던 '주 5회 설거지' 이행을 사진으로 인증하고 나면 본인이 배팅했던 금액과 더불어 소액의 상금을 돌려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다. 만약 기간 내 85%만 이행했다면, 상금은 제외하고 본인이 배팅했던 원금만 돌려받는다. 혹은 85% 이하로 성공했다면, 약간의 벌금을 제외한 원금을 돌려받게 된다. 이 어플은 본인이 선택한 챌린지의 '실천력'에 집중한 앱이기에, 상금이나 벌금은 평균 몇 십원에서 몇 백 원 정도로 굉장히 소소하다. 하지만 이 소소한 금액이 일상 속 실천력에 놀랍도록 분명한 도움이 된다.






11/100, 실천을 삽니다 <Challengers>


챌린저스가 제시하는 수많은 챌린지들은 역량, 건강, 자산, 정서, 생활, 취미 등 우리 생활을 윤택하게 해주는 모든 장르를 아우른다. 카테고리만 보면 거의 내 인생 전체를 바꿔줄 것만 같은 웅장함도 느껴지지만, 막상 개별의 세부 챌린지들을 보면 정말 귀엽고 소소하다. 설거지 하기, 영어단어 하루 5개 외우기, 외국어 기사 한 문단 필사하기, 일주일에 5만 원 저금하기 등등.





이 앱을 이용한 첫 달에는 서른 가지가 족히 넘는 챌린지에 도전한 것 같다. 아주 조금만 신경 쓰면 하루 스무 개 남짓도 무리 없이 가능할 만큼, 모든 챌린지는 소소하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으면 한 달이 지나도, 두 달이 지나도 단 한 번도 하지 않을 만한 미션들이 많았다. 특히 '영어-외국어 팝송 가사 쓰기'나 '감사일기 쓰기', '시사 경제 뉴스 요약'과 같은 미션들이 나에게 그랬다. 평생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행동을 이 어플이 하게 만들어 준다. 특히 감사일기의 경우에는 나에게 기대 이상의 의미를 가져다줬다고 생각한다.







그림에 취미를 붙이고 싶지만, 그림의 출발점조차 잘 모르는 나 같은 사람들이라면 '명화 따라 그리기'를 추천하고 싶다. 모작의 묘미는 쉽게 그릴 수 있다 점, 그리고 혼자서 그렸다면 만나지 못했을 완성도를 어느 정도 쉽게 만들어 준다는 점에 있다. 손에 묻지 않는 크레파스를 사서 노트에 그림을 그리는 일은 꽤 흥미롭다. 상업 원고를 쓰는 사람에게는 크레파스를 사러 가는 과정마저도 '그림 그리기' 자체만큼이나 낯설고 즐거웠다.





집들이 선물로 받은 우쿨렐레와 나도 모르는 새 먼지가 폭폭 쌓이던 칼림바도 매주 최소 2번 이상은 연주하는 일상을 보내게 되었다. 사실 연주할 수 있는 손과 악기는 이미 집에 마련이 되어있는데, 돈 만 원짜리 걸어둔 챌린지 하나가 실행력을 만들어 준다는 사실이 우스우면서도 신기하다.





불쾌해 보이는 보고의 표정


'사랑하는 사람과 손 잡기' 챌린지는 재밌었다. 이 챌린지가 있어야만 손을 잡는 것도 아니면서 나는 굳이 이 챌린지에 도전했다. 지금은 좀 벗어났지만 당시에는 챌린저스 중독 초기와 다름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웃긴 건, 심지어 해당 챌린지 도중 하필 싸운 적이 있었다는 점이다. 당황한 나는 인증 내역을 상세히 읽기 시작했다. (오랜만의 싸움에 당황하는 것보다 챌린저스 인증부터 걱정했다는 사실이 레전드다) 챌린저스 때문에 먼저 악수를 하며 화해를 청하긴 싫었지만, 정환이 때문에 악수 챌린지에 실패하는 것은 더더욱 싫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다행히도 챌린지 인증 내용 중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반려동물 역시 괜찮다는 내용이 있었고, 그렇게 나는 정환이와 오지게 싸운 날에도 꾸역꾸역 고양이 보고의 손을 잡으며 인증을 마쳤던 기억이 있다. 보고는 내 악수를 상당히 싫어했다.








와 좋다- 하고 읽기만 했던 소설책의 다섯 문장의 문체를 바꿔보기도 하고, 분명 처음엔 스티커도 붙이고 이름까지 지어주며 아껴줬던 식물들에게 뒤늦은 애정을 쏟아 주기도 했다. 다행히 식물들은 아직 시들기 (일보 직) 전이었다. 문체를 바꾸는 챌린지는 글쓰기 연습뿐만 아니라 내용에 대한 몰입에도 도움이 되었고, 내지에 인쇄된 작가의 표현이 얼마나 조각 같은 문장 문장들이었는지를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는 기회도 되었다. 






잔나비의 살랑이는 목소리와 오왠의 굵직 담백한 목소리, 그리고 챌린저스의 실행력을 알게 되니 나는 바뀌어야만 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친구들의 추천을 조금씩 믿으려(?) 노력한다. 영화를 추천하면 그 영화를 보려고 노력하고, 드라마를 추천하면 그 드라마를 꼭 기억하려고 한다. 한때는 그런 추천들이 귀찮은 숙제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런 추천들이 (여전히 숙제 같기는 하지만) 누군가 가슴을 필터링하고 간 베스트를 쏙쏙 골라 보고, 골라 들을 수 있는 행운이라 생각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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