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eeboran Aug 09. 2021

[실내의 백가지] ep2. 수경재배

100 things i've never done

반복된 일상에 뻣뻣해진 몸과 마음을 이완하고자, 해보지 않았던 백 가지를 행동해보며 남기는 일상 기행문. 어쩌면 실내가 아니어도 좋다. 비루해도 좋고, 지루해도 좋다. 새로운 것, 혹은 잊고 있었던 그 어떤 것이든 환영하는 경험주의 일기장.




<2/100> 수경재배



얼마 전 SNS에서 신기한 글을 본 적이 있다. 식물 갤러리의 회원이라는 글쓴이는 장바구니에 흔히 담기는 식자재들을 거의 모두 재배하고 있었다. 자랑스러움과 뿌듯함이 진한 녹색으로 마구 뿜어져 나오던 그의 사진들 속에는 갖가지 작은 생명이 싹을 틔우는 중이었다. 레몬을 먹고 남은 씨앗으로 레몬밤을 길러내고, 수박씨로는 인형 장난감 같은 미니 수박을 열리게 하는 사람. 뭘 사 먹기만 하면 쓰레기가 아닌 씨앗과 열매를 남기는 사람. 머지않아 썩은 내가 날 수 있었던 자투리로 푸릇푸릇한 생명체를 길러내는 사람. 나는 그가 적잖이 충격적이면서도 부러웠다. 내가 저 사람처럼만 할 수만 있다면 외출 욕구가 200퍼센트는 줄어들 수 있겠다 싶어 흥미롭기도 했다.


그를 거치지 않았다면 음식물 쓰레기통에 이미 처박히고도 남았을 씨앗들. 마트 속 완제품에서 음식물 쓰레기로 변질되는 과정 속에서, 몇몇 행운의 씨앗들은 그를 만나 새 삶을 찾게 된다는 것이 동화 같고 우아해 보인다. 하지만 나는 선인장도 말려 죽여버리는 식물 킬러 중 한 사람으로서 '기르는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라면 자생력이 최대한 강하고, 예민하지 않으며, 어떤 환경에서든 쑥쑥 자라나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머지않아 찾았다. 그것은 바로 파다. 나랑 친한 친구 중에는 유일하게 아파트가 아닌 마당 있는 집에 사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의 별명은 당보다. 내 이름과 그의 이름을 붙여 우리를 종종 '당보란'이라 부르곤 한다. (내심 남들도 그렇게 불러주기를 원하지만 아무도 그렇게 불러줄 일이 없다.) 당보란은 마트를 종종 함께 가는 편인데, 어느 날 당보가 마트를 다녀온 뒤 구매한 파를 포장지만 벗겨낸 채 툭 잘라 마당에 심는 것을 보았다. 나는 '굳이..?' 하는 마음으로 그 장면을 지나쳤지만, 정성 없이 싱겁게 심긴 파뿌리는 약 일주일 만에 원래의 모습대로 생생하게 자라는 중이었다. 이 또한 채소에 감흥도 지식도 없는 편인 나에게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당보네 집과는 달리 우리 집에는 마당이 없다. 화분이랑 배양토를 살까? 생각했지만 식물 킬러인 나에게 그런 구색이 과연 의미가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심지어 나는 파를 좋아하지도 않는다. 얼얼한 특유의 향과 맛이 질색이다. 그러던 중 발견한 것이 바로 '파 수경재배'다. 건강한 흙, 단단한 화분 등 성가신 준비물이 일절 필요 없는 방법이었다. 유튜브를 뒤져보니 심지어 흙보다 물에서 자란 파가 더 달달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준비물은 너무 간단해서 매력이 충분했다. 파뿌리 하나와 아무 물그릇 하나만 있으면 된다. 하지만 내가 유독 싫어하는 채소가 하필 제일 기르기 쉬운 채소라는 사실은 조금 섭섭했다.


머지않아 밭에서 직접 길러냈다는 경주 본가의 파를 삼천포의 다운이가 선물해줬다. 뿌리가 생생히 살아있고 흙까지 묻어있으면 더욱 금상첨화의 컨디션이라던데, 마침 그 상태 그대로 선물을 받았다. 나는 이 선물을 '수경재배의 운명(?)'이라 부르며 과하게 기뻐했다. 동거인 정환이는 나의 '쉬운 흥분'을 자주 목격하므로 딱히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무렴 어떤가. 나는 인생 첫 수경재배를 준비 중이었다. 


파뿌리를 손가락 한 마디만큼 잘라낸 뒤 뿌리가 잠길 만큼의 물을 그릇 안에다 부어주면 끝이다. 그릇 대신 페트병도 좋다. 재료가 간단한 대신 이 물은 매일 갈아 주는 것이 좋다. 갈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파가 자라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특유의 냄새가 집 안에 한가득 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물그릇에 담기지 못한 한 뿌리를 흙에다 심어주었다. 하지만 그렇다 할 배양토도 딱히 없어서 키우고 있던 천냥금 화분 한 편에다가 꾸역꾸역 심어주었다. 이래도 자랄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괜히 걱정했다 싶을 정도로 이들은 잘 자라기 시작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눈에 띄게 성장하는 파는 나의 얄팍한 뿌듯함을 충분히 자극했다. 심심하면 지켜보게 되고, 툭하면 찍어 둘 정도로 나의 기쁜 일과 중 하나가 되었다. 고단새 나의 갤러리는 고양이 사진과 파 사진이 서로의 지분을 잡아먹으려 경쟁하고 있었다. 꽤 귀여운 일이다.



나의 아주 작은 행동으로 이만큼의 성장을 보이는 일은 결코 흔하지 않다. 흔했다면 애초에 파 한 단에 이토록 열광할 일도 없었을 거다. 대부분의 것들은 짧은 시간 안에 엄청난 노력을 들이거나 긴 시간 동안 꾸준히, 그리고 일정하게 노력해야만 정진할 수 있다. 내 일이 그렇고 운동이 그렇다. (짜증 난다.) 물론 사랑과 우정은 더더욱 그렇다. 


물에서 자란 파는 그 모든 공식에서 벗어난 러프함과 훌륭한 성장률로 나의 하루에 적지 않은 재미가 되어주었다. 한때는 식물 킬러였던 내가 이제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알아보게 된다. (어깨를 으쓱하며) 다음엔 뭘 키울까?

 


여전히 나는 파를 못 먹는다. 하지만 자랄 만큼 자란 파는 나의 수확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실내에서 키운 파는 무척 얇았다. 얇으면 어떻고 굵으면 어떤가. 뿌듯한 마음으로 시식을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수확한 파를 하필 못 먹는 나의 편식성이 한심하고 슬펐다. 아쉬운 대로 동거인 정환이가 만들고 있던 샐러드 그릇에 파를 숭덩 썰어 주었다. 생뚱맞은 크기와 조합에 정환이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금세 피식 웃으며 맛있게 먹어주었다. 그러고 보니 정환이는 파 수경재배만큼이나 (나에게) 쉬운 인물이다. 그래서 파만큼이나 매력적인 인물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실내의 백가지] ep11. 실천을 삽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