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things i've never done
반복된 일상에 뻣뻣해진 몸과 마음을 이완하고자, 해보지 않았던 백 가지를 행동해보며 남기는 일상 기행문. 어쩌면 실내가 아니어도 좋다. 비루해도 좋고, 지루해도 좋다. 새로운 것, 혹은 잊고 있었던 그 어떤 것이든 환영하는 경험주의 일기장.
사람 둘, 고양이 한 마리가 사는 집에서 분리수거를 '매일' 해야 할 필요는 거의 0에 수렴한다. 플라스틱이나 종이가 매일 같이 수북이 쌓이지 않기 때문이다. 불필요한 소비를 줄인 것도 작지 않은 몫을 차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주 작은 박스 하나만 가지고도 매일 오후 분리수거를 하러 내려간다.
운이 좋게도 내가 살고 있는 라인 입구 바로 앞에 분리수거함이 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작은 벤치가 두 개 놓여 있다. 나는 굳이-굳이 가지고 내려온 박스를 약 5초 만에 분리수거한 뒤, 벤치에 앉아 5분 남짓 마스크 사이로 바깥공기를 마신다. 이 지역 확진자의 수가 급증하는 요즘, 내가 굳이 부지런을 부려 만들어낸 잠깐의 외출이다. 일을 하다가 여간 집중이 안 된다 싶으면 박스 떼기 하나라도 굳이 찾아내서 들고 내려간다. 아무 이유 없이 나가는 것은 왠지 찝찝한 마음에 괜한 부지런을 떠는 것이다.
벤치에 앉아 독일의 cctv라 불리는 여느 노인들처럼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다 들어간다. 대부분은 친구와 전화를 하다가 들어가거나 노래 한 두 곡이 끝나면 들어가는 편인데, 한 번은 사람 구경에 재미가 들렸는지 이어폰 배터리가 다 닳을 때까지 멍하니 앉아있었던 적도 있다. 나는 그날을 '물멍', '불멍'보다 중독적이라는 '인멍'이라 부르겠다. 그렇게 인간들을 구경하며 멍 때리는 기분이란 참으로 묘하다. 멍하니 보고 있다 보면 때로는 현타가 오기도 하고, 별안간 에너지가 솟기도 한다. 이 루틴만 살펴보아도 분리수거라는 명목에 가려진 진짜 주인공은 벤치다. 나는 그런 내 스스로가 귀엽기도 해서 동거인 정환이에게 자랑스럽게 이 습관에 관하여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그는 오늘도 어이가 없는지 별다른 칭찬이 없었다. 그래도 나는 인멍과 분리수거를 병행한 내가 스스로 뿌듯하므로 자랑스레 기록해본다.
분리수거함 뒤 벤치는 두 개인데, 나는 그중에서도 꼭 하나의 벤치에만 앉는다. 분리수거함을 기준으로 좀 더 먼 거리에 있는 벤치이기도 하고, 그런 단순한 이유로 비교적 다른 사람들이 앉는 일이 적은 벤치이기도 하다. 송화가루가 심하게 날렸던 어느 봄날, 나는 물티슈 한 통을 들고 내려가서 두 개의 벤치 중 내가 주로 앉는 벤치만 야무지게 닦아 놓은 적이 있는데 그걸 보고 동거인은 '니 소파냐'라고 물은 적도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 벤치는 딱딱하지만 따듯한 나의 야외 전용 소파다.
시간을 거슬러 지난해 겨울로 가보자. 2020년 12월의 어느 날이었다. 매일 같이 나가 5분이라도 앉아있던 그 벤치는 일주일 전 내린 비 때문에 아직도 꽁꽁 얼어있던 중이었다. 비가 갠 다음 날, 나는 꽁꽁 언 벤치를 보며 내일 와서 앉아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뒤로도 기온이 내려가지 않아 벤치는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얼어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어련히 녹으리라 생각했지만, 기온이 내려가지 않으면 벤치 위의 얼음은 영원히 얼어 있을 것이다.
정환이와 싸우고 나면 나는 그 벤치를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았다. 잠깐이라도 그와 거리를 둔 채 따로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21년 신축년 새해 첫날부터 다툰 우리는 세상 누구보다도 조용하게 티브이 속 카운트다운을 지켜봤고, 나는 그 침묵이 싫고 머쓱해서 패딩을 입고 나왔다. 벤치에 앉아있고 싶었다. 그런데, 2021년 1월 1일의 밤 열 두시의 기온도 여전히 차가웠는지, 하필 벤치 위 얼음은 그대로였다. 나는 결국 그날도 내 야외 소파에 앉지 못했다. 그저 벤치 주위를 2-3분 정도 빙글빙글 걷다가 코가 깨지도록 추운 탓에 쭈뼛거리며 집으로 들어왔던 기억이 난다.
나의 소소한 도피처이자 산책로였던 그 벤치가 여전히 얼어있는 것을 보며, 나는 자연스럽게 우리를 떠올렸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내일이 되면 이 감정도 사그라들겠지, 모레쯤 되면 어련히 이해하겠지.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단지 시간만 지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벤치 위에도 내 마음속에도 없는 모양이었다. 얼음이 녹을 수 있는 온기를 비춰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벤치 위도, 우리 사이도 영원히 얼어있을 수 있는 거겠구나 생각했다. 벤치에 엉덩이를 닿지 못하고 집으로 올라온 나는 불쑥 정환이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것은 그날 내가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용기이자 온기였다.
뻣뻣했던 정환이의 등이 단숨에 녹았다. 정환이는 금세 뒤돌아 나를 꼭 안았다. 우연인지 다음 날 벤치 위 얼음도 금세 녹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