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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boran Sep 06. 2021

[실내의 백가지] ep.4 거르고 끓이는 아침

100 things i've never done

반복된 일상에 뻣뻣해진 몸과 마음을 이완하고자, 해보지 않았던 백 가지를 행동해보며 남기는 일상 기행문. 어쩌면 실내가 아니어도 좋다. 비루해도 좋고, 지루해도 좋다. 새로운 것, 혹은 잊고 있었던 그 어떤 것이든 환영하는 경험주의 일기장.




2020년 10월, 가전제품 매장에서의 일이다. 11월 이사를 앞두고 대형 가전들을 몇 가지 고르러 방문한 그곳에서 예비 동거인 정환이가 갑자기 나에게 비스포크 냉장고가 갖고 싶다고 했다. 정확히는 말만 안했을 뿐 그 냉장고 곁을 열 바퀴 넘게 빙빙 돌았다. 나는 가전을 보러 가기 전 그에게 분명히 말해둔 점이 하나 있었는데, 다른 건 관심 없지만 냉장고만큼은 가격이 싸든 비싸든 정수기가 탑재된 제품을 고르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환이가 빙빙 돌던 그 브랜드의 어느 냉장고 모델에도 정수기는 보이지 않았다.


코시국이 들이닥치기 전, 나는 퇴사를 맞아 프랑스 한달살이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프랑스에서의 한 달 중 약 2주가량을 지냈던 친구 집에서 사용했던 정수기 일체형 냉장고는 보기에도 깔끔했고 사용하기에도 정말 편했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 내 집의 모든 물건들을 사야 할 시기가 온다면 꼭 냉장고만큼은 정수기가 탑재된 제품으로 선택하겠노라 다짐했다. 여행 당시에도 결혼은 꽤 가시적인 계획이었던 터라, 정수기 냉장고의 단점 역시 미리 알아보았다. 나는 특히 얼음도 만들어주는 정수기를 원했는데, 참고로 나는 얼음 공주 출신이다. 엘사처럼 차갑고 도도한 얼음 공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의미는 다르다. 집안의 모든 얼음을 책임지는, 그야말로 얼음을 무진장 좋아하는 진짜 '얼음' 공주를 의미한다. 사뭇 직관적인 별명이라 가족들은 종종 "얼음 공주~ 얼음 떨어졌네~"와 같이 얼음이 필요할 때만 나를 공주라 불러준다.


얼음 정수기는 일반 기기에 비해 관리가 까다롭다고 알려져 있지만, 최근에 나온 냉장고들은 정기관리까지 일반 정수기와 다를 바가 없음을 확인했다. 또한, 냉장고에 정수기가 탑재되면 냉동실의 자리가 약간 좁아진다는 단점 역시 있었는데, 일반 정수기 그 자체가 주방에서 차지하는 공간을 생각해본다면 그 역시 나에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이렇게 나름의 고심을 한 뒤 결정을 한 정수기 냉장고였다. 그러나 내 결심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정환이는 십 분이 넘도록 정수기가 없는 비스포크를 빙빙 돌고 있다. 그 모습을 귀엽다는 듯이 쳐다보던 엄마 아빠가 나에게 넌지시 말했다.

"그냥 저걸로 해주삐라~"






동거인이 빙빙 돌던 모델은 내 눈에도 디자인만큼은 참 깔끔했다. 그러나 얼핏 잡아도 천만 원을 웃도는 혼수 라인 중 유일하게 내가 원했던 옵션이 '정수기 달린 냉장고'였는데, 이 하나를 그를 위해 포기하자니 뭔가 아쉬웠다. 하지만 장화 신은 고양이의 눈으로 정환이는 나를 보고 있고, 그런 그를 귀엽다 못해 안쓰럽게 보던 예비 장인과 장모는 심통난 나를 위해 하나의 약속을 제안했다.


"환아~ 니가 원하는 냉장고로 하되, 와이프 물은 평생 니가 떠다주라이?"

정환이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네네! 매일 보리차 끓일게요! 4리터씩요!"

그들의 대화에 정수기를 따로 구매하는 옵션은 없었나 보다. 그나저나 정환이는 비스포크가 얼마나 갖고 싶었으면 리터 양까지 말할까. 가전에 딱히 관심이 없는 여자와 상상 이상으로 관심이 많은 남자의 결혼 생활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4리터씩이나 매일 보리차를 끓이겠다는 포부 가득한 대답에 나는 두 손 두발을 다 들고 그가 원하는 모델을 구매했다. 그와 동시에 우리의 '거르고 끓이는 삶' 또한 시작되었다.





보리차를 향한 대장정은 보리를 사는 과정부터 재미있었다. 일과 육아와 가사를 슈퍼맨처럼 해내는 친구 하나가 말해주기를 대부분의 마트에는 중국산 보리밖에 없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생전 처음으로 유기농 국산 식재료 가게에 들러 우리가 마실 물과 먹을 과자를 샀다. 매일 마시는 물과 뽀각거리는 과자인데 유기농으로 구매하니 뭔가 우리 입을 아끼는 것 같아 기분이 설렜다.






보리를 사고, 보리를 끓이고, 보리를 거른다. 이 세 가지 행동이 끝나면 냉장고에 넣어둘 고소한 보리차가 완성된다. 하지만 거르고 끓이는 삶에서 '거르는' 행위는 어쩐지 자꾸만 내 몫이 되었다. 매일 내가 마실 물을 책임지겠다고 한 정환이지만, 그는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보리가루에 전혀 개의치 않은 편이었다. 하지만 나는 반대로 물속에 아주 조금의 보리 껍질이 보여도 괜히 목이 컥컥 막히는 듯한 불편함을 느꼈다. 웬만한 거름망으로는 만족이 되지를 않아 큰 면포, 작은 면포, 고운 면포, 까슬한 면포, 일회용 면포까지 죄다 구매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어느덧 배보다 배꼽이 커져서 정환이가 불만 올려서 끓여낸 보리차를 삼십 분이 넘도록 걸러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가끔 짜증이 났다.


하지만 먼지 같은 취미처럼 보리차를 끓인다는 사람도 있다. 나 역시 그 시간을 짜증내면서도 즐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거르고 또 거르다 보면 맑은 보리차가 만들어진다. 기장에서 골랐던 귀여운 물병에 보리차를 고이 담아 냉장고에 보관한다. 몇 시간 뒤 시원해진 보리차를 꺼내 마신다. 한 평생 정수기에서 감흥 없이 내려다 먹던 물 한 잔과 천지 차이의 기쁨이 온다. 급속도로 가능했던 일상의 한 조각을 꺼내서 천천히 풀어다 쓰는 느낌이다. 시간을 낭비한다기보다는 일분일초를 곱게 빚어내는 느낌이다. 물론 오늘 할 업무가 남김없이 다 끝나고, 귀찮은 잔챙이 일이 없을 때나 느낄법한 기쁨이다. 그러므로 나가기가 꺼려지는 집콕 모드일 때는 이만한 즐거움이 없다.




같은 이유로 마감이 코앞일 때나 매일이 야근일 때는 이런 먼지 같은 취미를 누릴 자신이 없다.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는 먼지 같은 취미가 아니라 그냥 먼지 같은 노동이 되어버린다. 그럴 땐 수돗물만 넣으면 알아서 걸러주는 독일발 정수 제품을 사용했다. 이 친환경 셀프 정수기는 한국에서도 인기다. 정수기를 따로 설치하고 싶지 않은데, 생수를 사 먹기도 싫은 사람이라면 모두에게 추천하고 싶은 아이템이다. 수돗물을 천연 코코넛 껍질 필터로 한 겹 벗겨냈을 뿐인데, 심지어 물 맛도 좋다.


그리하여, 정수기를 포기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 집에는 마음이 바쁠 때 마시는 물과 여유로울 때 마시는 물이 나뉘었다. 물론 웅진 코웨이에 전화 한 통 하면 끝날 일이다. 그런데 어쩐지 그러기가 싫다. 거르고 끓이는 아침에 어느새 중독되었는지도 모른다. 집 안에 보리의 구수한 냄새가 진동을 한다. 꼭 사람 사는 냄새가 이런 냄새일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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