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things i've never done
반복된 일상에 뻣뻣해진 몸과 마음을 이완하고자, 해보지 않았던 백 가지를 행동해보며 남기는 일상 기행문. 어쩌면 실내가 아니어도 좋다. 비루해도 좋고, 지루해도 좋다. 새로운 것, 혹은 잊고 있었던 그 어떤 것이든 환영하는 경험주의 일기장.
어릴 적, 친구 집이나 친척 집에서 화장실 변기 근처에 놓여 있는 책을 볼 때면 나는 항상 같은 생각을 했다.
'책에 똥 냄새 배겠다...'
아무도 궁금하지 않겠지만 나의 엄마 아빠, 영자 씨와 의동 씨는 다른 배변 패턴을 가진다. 영자 씨는 체감상 화장실에 들어가기만 하면 반나절이 걸리고, 의동 씨는 '화장실을 갔었나?'싶을 정도로 순식간이다. 나는 그런 아빠를 닮았고, 내 동생 민석이는 엄마를 닮았다.
볼 일이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샤워든 그리 긴 시간이 소요되지 않는 내 입장에서는 화장실에 놓여 있는 책이 꽤 무용지물로 보였던 모양이다. 그랬던 내가 요즘은 화장실마다 책을 한 권씩 놔두기 시작했다.
무급 창작보다는 의뢰받은 유급 원고에만 집중한 지 일 년쯤 지났을 때, 나는 문득 한계를 느꼈다. '글 쓰면서 돈 버는 게 이렇게 쉬운 일이란 말인가!'라고 느꼈던 일 년 전의 상태와 사뭇 달라진 것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의뢰받은 글인 데다 아무리 주제가 명확하더라도, 내 머리가 점점 뻣뻣하게 굳어가니 손가락이 영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저 흥미로우면서도 동시에 만만했던 글쓰기가 약 일 년 만에 '돈 벌기 다소 퍽퍽한' 글쓰기 노동으로 변모되었다.
글로 돈을 버는 사람에게 손가락이 멈추는 일이라면 사태는 사태였다. 이 사태를 조금이라도 개선할만한 노력이 필요했다. 그러려면 나의 생활부터 돌아봐야만 했다. 지난 일 년간 나는 너무 읽지 않았고, 너무 쓰기만 했다. 하루에 조금이라도 남의 글을 읽어야만 굳었던 매니큐어에 아세톤 한 방울을 떨어뜨리듯 유연해질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나는 계획을 달성하는 것만큼이나 계획 세우기를 좋아한다. 그런 류에게 칸칸이 계획을 짜 놓고 칸칸이 달성 여부를 표기할 수 있는 '불렛 저널' (bullet journal)은 기똥찬 아이템이다. 나는 일주일의 목표치를 적어두는 불렛 저널에 '하루 최소 1 챕터 이상 독서'를 적어 넣었다. 그러나, 꼭 해내고자 하는 마음으로 100페이지가 아닌 1 챕터를 적었음에도 그 칸이 색칠되는 날은 딱히 많지 않았다. 마감에 시달리며 여전히 내 손과 머리는 바빴고, 그렇게 몇 주가 지나 불렛 저널을 살펴보니 일주일에 끽해야 하루 정도만 읽었음을 확인해야만 했다.
'시팔 1권도 아니고 1 챕터를 읽는 건데 뭐가 그리 힘든 거지?'
별안간 나에게 화가 났던 나는 '혹시 난독증이 아닐까..' 하는 헛된 희망도 품어보았지만 머쓱하게도 그럴 리는 없었다. 일주일에 남의 글을 고작 1 챕터 읽는 것도 힘들어하면서, 내가 매일 싸지르는 글은 누군가에게 번번이 읽히고 있다고 생각하니 문득 창피했다. 채워 넣은 연료도 없는 빈 깡통이 쓴 글을 누가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단 말인가.
고민 끝에 내가 바꿔 본 작은 일상은 바로 책을 책상 위나 소파 위가 아닌 화장실로 옮기는 일이었다. 책상 위에서는 자꾸 일을 해야 할 것 같고, 소파 위에서는 자꾸 넷플릭스를 보게 되니 아무 선택지가 없는 화장실이 가장 나아 보였기 때문이다. 참고로 나는 화장실에 휴대전화를 잘 들고 가지 않는다. 의동 씨를 닮은 나는 휴대전화를 굳이 들고 들어가 봤자 금세 나와야 하니까.. 그리고 혹시라도 빠뜨리면 하루 내내 심신이 곤란할 거라는 두려움 때문도 있겠다.
그렇게 처음으로 나의 변소를 채워준 책은 이슬아의 <심신단련>이다. 제목 그대로 그가 마음과 몸을 어떻게 단련하고 글을 써 내려가는지에 대한 소소한 일상들이 덤덤하고 생생하게 담겨있다. 글을 쓰며 돈을 번다는 처지가 동일한 나에게는 익숙한 장면들이 많아 공감의 재미도 느끼지만, 동시에 이렇게나 다르게 살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법한 생경한 장면들도 많아 낯선 재미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이틀 만에 변기 위에서 그 책을 다 읽었다. 소파 위에서는 분명 30페이지 넘기기도 너무 힘든 책이었는데, 이 재미있는 책장을 왜 이제껏 벽돌처럼 무거워하며 넘기지 못했는지 의아한 순간이었다. 단언컨대 변기 위의 시너지다. 아래로 배출한 만큼 머리로 습득하는 시간이다. 손에 들린 것이 없고 눈앞에 볼 것이 없으니 비로소 이 책이 나에게 온전히 읽히는 순간이다.
그렇게 변기 위에서 책 읽기를 실천해 본 지 약 한 달 남짓이 지난 오늘. 매일 최소 한 챕터라도 읽기로 했던 나의 불렛 저널은 매일매일 하늘색 색연필로 가득가득 색칠되어 가는 중이다. 한강의 소설이 생각보다 더 섬뜩하다는 것과 정유정의 문체가 완벽하다는 것 또한 새로이 느꼈다. 그리고, 어릴 적 의구심 역시 풀렸다. 변기 위에 놓인 책에는 똥 냄새가 배는 게 아니라 오히려 화장실 디퓨저의 향긋한 향이 밴다. 무향을 넘어 무용지물이었던 나의 책들이 조금씩 향긋하게 의미 있어지는 중이다. 책이 너무나도 읽기 싫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읽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변기 위 한 편을 책 한 권에 내어주길 추천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