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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boran Jun 22. 2022

[실내의 백가지] ep.15 해피콜

수다 예약 시스템




-2시에 통화 예약 가능할까요?

-네 가능합니다.



건조하고, 군더더기 없어서 너무나도 공적인 느낌을 풍기는 이 대화는 사실 친구와 자주 주고받는 메시지 내용 중 하나다. 나는 결혼과 동시에 매일 같이 보던 동네 친구들과 원거리 우정을 나눠야 했는데,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통화 예약 시스템이 생긴 것이다. 처음엔 그저 장난스러운 예약 과정이었다면, 나중에는 예약 시간이 분 단위로 세세해졌다. 원래는 서로의 일상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어서 굳이 시간을 맞추지 않아도 통화가 가능했다. 사실 한 동네에서 볼 때는 5분 이상 전화를 할 필요도 없었다. 거의 매일 만나 조동아리(?) 모임을 가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잠깐의 통화라면 문제 될 게 없지만, 넉넉한 수다를 위해서라면 깔끔한 스케줄링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


평일 저녁, 소화할 겸 떠들 겸 집 근처에서 만날 수 있는 동네 친구가 없는 것은 꽤 섭섭한 일이다. 동갑내기 남편이 그 역할을 자처할 때도 많고 물론 그 역시 즐거운 일이지만, (미안하게도) 엄연히 동성 친구와의 시간과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나는 이곳에 이사 와서 전화 발신과 수신에 쓰는 시간이 정말이지 대폭 늘었다. 통화 무제한 요금제의 진가를 드디어 발휘하는 중이다. 본가에서 지낼 때는 회사와의 통화내역이 절대적이었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너무나도 자유로워 오히려 불안한 프리랜서에게 이러한 통화 예약 시스템은 아주 적당한 긴장감을 가져다준다. 빡세지 않은 마감 시간을 정해두는 느낌과 비슷하다. 평소처럼 회사가 정해주는 마감이 아니라, 친구와 내가 정한 마감을 위해 나는 다소 즐겁게 일한다. 오늘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지만, 책상 앞에 머물러야 하는 제한 시간이 없는 프리랜서에게 이 통화 예약이 은근히 아드레날린을 솟게 하는 셈이다. 종종 모니터 우측 하단의 시간을 살핀다. 통화 예약 시간이 2시간 안으로 다가왔다. '피곤하다.. 잠깐 소파에 퍼져서 루미큐브나 한 판 할까?'하고 생각했던 내가 '아니다. 2시간 안에 이것만 끝내자'라는 마음으로 다시 자세를 고쳐 앉는다. 그렇게 열정적인 두 시간이 흐르고, 나는 예약된 시간에 맞추어 이어폰을 낀다. 얼음이 달그랑거리는 아이스 커피를 내리고, 어느 때보다 상쾌한 마음으로 산책에 나선다. 그리고 혼자여도 혼자 같지 않은 산책길이 이어진다. 이는 요즘 내 일상의 필수 루틴이자 적정량의 엔도르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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