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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펭귄 May 20. 2024

"케리, 나 남의 집 담장을 부쉈어"

5월, 치과에서 일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2주간의 휴가를 한국으로 다녀왔다. 말이 휴가였지만 치과 간호사 자격증(Dental Assisting certificate 3)을 따기 위해 풀타임 학업과 풀타임 근로를 병행 중이었기에 한국에서도 쫓기는 마음으로 과제를 하며 지내야 했다. 그래도 익숙한 환경 속에서 24시간 한국어로 말할 수 있다는 편안함이 있었다. 휴가랍시고 딱히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고단했던 외국생활에 브레이크가 필요했던 나에게는 값진 시간이었다. 

한숨을 돌리며 휴가가 일주일 즘 지났을 즈음 갑자기 전 남편에게서 이메일이 왔다. 이사를 해야 할 것 같다고, 그러려면 2000 달러 정도가 필요한데 빌려줄 수 있겠냐는 거였다. 

마음이 일렁였다. 그는 왜 항상 이런 식일까.  적은 액수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빌려주기에 많은 액수는 아니다. 갑자기 맞닥뜨린 말이 황당하기도 했고 화가 났다. 아니 그 정도도 없어서 이별을 한 사람에게 그런 부탁을 할까. 오죽하면 나에게 말을 꺼냈을까. 그는 늘 이런 식으로 나의 평화를 깨어버렸다.  

그의 부탁은 그와 함께 했던 과거의 기억 속으로 끌어당겼다. 그를 측은하게 생각했지만 증오하기도 했다. 상반되는 이 두 감정을 달래느라 지쳐갔고, 그가 다시 한번 나를 밀어냈을 때, 당연히 두 말 않고 그를 떠나왔다. 그와의 관계가 진저리 났다. 그는 나의 수치와 돌이킬 수 없는 실수, 미래로 나가기 위해서는 그를 잊는 수밖에 없었다. 그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내 시간을 채우고 싶진 않았다.  

고심 끝에 그에게 돈을 빌려주기로 했다. 다만 반액 정도인 1200 달러로. 공부와 일이 바빠서 적어도 공부가 끝나는 시점 이혼 서류를 들여다보려고 했던 계획을 수정해 휴가가 끝나고 호주로 돌아가면 그와 묶여있던 모든 법적인 서류를 정리하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머리에 떠돌던 돌이킬 수 없이 깨져 버린 관계의 추상적인 모습이 이혼 서류라는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두려워 미루고 있던 일이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두려움이었다.


씁쓸한 마음을 안고 호주로 돌아온 후, 이혼 서류를 법원에 제출하기 위해 서류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분노는 진정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다). 그러고 나니 때를 기다렸다는 듯 일이 몰려왔다. 직장 동료가 관절이 나빠져서 병가를 내고, 병가를 낸 동료의 일이 나에게까지 돌아왔다. 쉬프트의 시간은 늘어났고, 학기의 막바지라  제출해야 하는 학교 과제의 수와 양은 방대해서 불가능에 가깝게 보였다.      

어느 날 아침 7시 30분,  직장 근처 역 앞의 주차장은 보통 텅텅 비어있는데, 여느 날과는 달리 주차를 하려고 몰려든 차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막연한 불길함을 느끼며 다른 주차할 곳을 찾아 근처 주택가 길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나와 비슷한 심정으로 역 근처를 이리저리 배회하는 차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생각처럼 자리가 쉽게 보이지 않아 초조해질 즈음 한 곳이 눈앞에 들어왔다. 지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중 주택가 옆 4시간을 공짜로 주차할 수 있는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저 자리마저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옆면 주차를 하려고 기어를 후진으로 바꾸고 각도를 맞추려고 브레이크를 밟았다. 적어도 내 생각에는. 

그러나 내가 밟은 것은 액셀이었고, 차는 앞으로 튀어나가 한 주택 앞으로 돌진했다. 짧은 찰나, 앞으로 나가는 걸 느끼는 순간 브레이크를 밟아서 차는 주택 앞마당 울타리를 시원하게 넘어 뜨리고는 멈춰 섰다. 그 집 앞뜰에는 차가 한 대 주차되어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포르셰였다. 내가 그 차를 박진 않았는지 다시 한번 더 확인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내가 파손시킨 건 울타리 밖에 없었다.

사실 지금 그 기억을 더듬어 봐도 내가 울타리를 박은 각도는 당시 내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불가사의 하긴 하다. 그냥 정신이 나갔다는 걸로 밖엔 설명이 안 되는 것 같다.  


그 집의 초인종을 누르고 사람이 나오길 기다렸다. 이른 아침, 집안에서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던 중년의 부부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내가 만든 광경을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직장에 전화를 했다.

" Hi Kerry, I think I can't go work this morning, I ran over someone else's house."

치과 리셉션 업무를 맡은 케리는 놀란 목소리로 " You what?!"이라고 대답했고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내 차는 헤드라이트가 나가서 도로로 나가는 게 불가능해 견인차로 옮겨져야 했다. 부서진 차 안에서 견인차를 기다리면서 운전 연수 마지막 날 운전 선생님은 수업을 이 말로 마무리를 지으신 게 생각이 났다. "운전의 목표, 목적은 안전 운전입니다. 안전 운전하세요." 


 머릿속 나를 어지럽히던 이혼 서류, 업무 스트레스, 과제의 압박감은 사고 후 처리 지불해야 하는 돈걱정으로 모두 휘발되었다.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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