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펭귄 Apr 10. 2024

무라빈과 문현동

요즘은 퇴근 후에 무라빈(Moorabbin)이라는 지역을 지나온다. 무라빈에는 코카콜라, 세차장, 정비소, 대규모 페인트, 조명 가게  같은 공장형 건물들이 박스처럼 줄지어 서있고 여기를 지나가야 주거지역이 보이기 시작한다.


작년 말, 내가 근무하고 있던 치과가 침수된 일이 있었다.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던 그날 아침, 치과의 바닥은 진흙과 물로 덮여 있어서 의사와 간호사들은 힘을 모아 청소를 하고 마무리를 했지만, 날이 갈수록 목조로 된 벽과 스커팅 보드는 조금씩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고 심지어 이상한 냄새도 하수구에서 올라왔다. 환기를 시키지 않으면 불쾌한 냄새를 숨기기 힘들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치과를 운영하던 의사들은 보험을 청구해 대대적인 수리와 레노베이션을 하기로 결정했고, 석 달 정도 다른 장소를 빌려 임시로 진료를 이어가기로 했다. 그렇게 새로 빌린 치과가 바로 무라빈에 있었다.    

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어느 날, 멋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회색 가득한 건물이 파란 하늘아래 유난히 대조되어 보이면서 이상하게 부산의 문현동이 떠올랐다. 지역 앞글자가  '무'로 시작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부산에서 내가 살던 지역은 수영이라는 곳인데, 광안리 바닷가를 끼고 있던 곳이었고, 거기서 구시가지인 남포동으로 갈 때는 문현동을 거쳐서 가야 했다. 버스의 노선이 그러했다. 나의 생활 반경은 그리 넓지 않아서 수영에서 남포동까지 나가는 일은 드물었다. 어쩌다 남포동으로 가는 날, 버스를 타고 가다 문현동으로 길이 이어지면서 눈앞에 펼쳐지는 조금은 생경한 동네의 풍경은, 내 익숙한 생활과 환경을 환기시켜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 짧은 찰나에 실용성에 매몰되어 여기저기 복잡하게 얽혀 있는 건물들의 평범함에 왠지 모를 서글픔도 간혹 느꼈던 것 같다.  부산을 떠난 지 15년 정도 되었으니 지금의 문현동은 어떨지 알 길이 전혀 없지만. 


상업지구인 무라빈을 지나오면서도 약간 비슷한 느낌이 든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해야 하는 일들에 매몰되어 지금의 내 모습에 닿게 되었다. 집주인의 개성이 언뜻언뜻 보이는 주택가가 아닌 이 무라빈에서 자신을 투영하고 있는 나는 아직 이곳의 삶이 편안하지 않은 것 같다.


멜번으로 온 지 이제 2년이 되었다. 

여기서 홀로 생활을 시작할 때 즘 방영이 됐던 '나의 해방일지'에 미정은 이런 말을 한다. '난 한 번도 안 해 봤던 걸 하고 나면 그전 하고는 다른 사람이 돼 있던데.' 당시 이 대사가 유독 가슴에 꽂혔다. 나도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이혼 후의 나는 정말로 과거와는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다.  


멜번에서 생활을 시작한 2022년 3월, 포근한 봄인 학국과는 반대로 이곳은 가을이었고 으스스한 비가 내리는 악명 높은 멜번의 겨울이 곧 찾아왔다. 찬란한 12월의 여름을 두 번 지내는 동안 나는 영어로 계속 말을 했고, 새로운 일을 배웠고, 운전을 시작했고, 길을 익히고, 동네를 익혀왔다. 그래도 벗어나고 싶은 무언가를 떠나 어느 정도 나는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 기쁘고 감격스러운 동시에 나의 마음속 현재와 과거는 끊임없이 공명하고 있다. 익숙한 것과 익숙하지 않은 것, 그리운 곳과 사람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 가지고 싶었던 것과 가질 수 없었던 것들.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작가의 이전글 Hang in there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