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그전까지 비틀스 노래 하나 모르는 망충이였단 건 아니고. 이미 꼬꼬마 시절부터 'Hey, Jude', 'Let it be', 'Yesterday'같은 명곡은 익숙히 듣고 있었다. 다만 그걸로 비틀스를 알았다고 표현할 순 없을 것 같아서다. 비틀스는 그냥 세상에 존재했고, 심지어 온 세상 깊숙히 만연해 있었다. 그러니까 인지하지 못하면서도 비틀스의 음악이 흐르는 세상에 살고 있던 시절을 지나, 내가 정말로 비틀스라는 가수와 그 음악에 귀 기울이며 마음을 빼앗긴건 분명 그 나이가 되어서였고, 그날 그 영화를 보면서부터였다. <하드 데이즈 나이트>라는, 무척 가볍고 귀여운 주크박스 코미디 영화다.
난 이 영화가 사랑스러웠다. 영화 속 음악에도 자연스럽게 매료됐다. 흑백의 영상 속 살아 움직이는 어리고 풋풋한 비틀스 멤버들, 존, 폴, 조지, 링고는 첫째로 신기했고 둘째론 귀여웠다. 이 마음은 아마 그 시절 <평화의 시대>나 <세븐틴>을 굳이 찾아 보고 포스터를 모으며 어쩌면 비디오가 늘어져라 돌려보기까지 했을 H.O.T.나 젝스키스의 팬들과 다를 바 없을 것이고, 극장에 걸린 BTS 다큐에 감격하며 괜히 내 어깨에 으쓱 힘이 들어가는 요즘의 팬심과도 통해 있을 것이다. 이미 한참 전에 객관성을 잃었겠지만, 내가 그날 영화 속에서 처음 만난 '우리 오빠들'은 남들과는 달랐고, 너무도 특별했다.
그러니 내가 영화 <예스터데이>에 가타부타 코멘트를 덧붙이는 건 별 의미가 없을 것 같다. 나는 이 영화를 싫어할 수가 없는걸. 영화의 만듦새를 떠나서, 우리 오빠들 음악을 이렇게 온 마음을 다해 찬양해준다는 것만으로 나는 조금 벅찼고 많이 고마웠다. 리차드 커티스* 님, 그 마음이 곧 제 마음이에요.
* '예스터데이'의 각본가이자, 오랜 비틀스 팬. 비틀스 다큐멘터리에서 그 애정을 간증하기도 했다. 아마도 가장 유명한 작품은 감독까지 맡았던 <러브 액츄얼리>일텐데, <러브 액츄얼리>에도 역시 비틀스 노래가 나온다. All you need is love
얼마 전에 <우주를 담아줘>(박사랑)라는 소설을 읽었다. 30대 아이돌 팬인 세 여성 이야기다. 어릴 적 좋아하던 그룹의 첫 콘서트 때 만난 세 친구는 여전히 그 시절 통신 채팅명인 '디디', '얭', '제나'로 서로를 부르며 각자의 덕질 라이프를 이어간다. 이 호칭을 잃지 않는 것은 그것이 그들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기 때문일거다. 덕질로 이어진 우정인만큼 서로의 덕질을 응원하는 세 사람이지만, 세상의 시선은 곱지 않고 덕질라이프도 마냥 안녕하지 않다.(덕질을 방해하는 건 세상과 현실만이 아니라 나의 우상인 그들 자체일 때도 있다. 그리고 다들 알겠지만 높은 확률로 후자가 훨씬 더 괴롭다.)
최근에는 강렬한 덕질라이프에서 조금 멀어져 있지만, 되돌아보면 나에게도 언제나 좋아하는 대상이 있었다. 무언갈 좋아했던 감정은 나를 행복하게 하기도 했고 가끔 힘들게도 했지만 어찌되었든 나의 그 시절에 가장 뚜렷한 각인으로 새겨졌다. 가끔 마음 속에 새겨진 그때의 시간들에 바람이 불어오기도, 손끝이 닿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다시금 한번씩 생각한다. 좋아한 무언가가 있어서 그 시절의 나는 조금은 더 즐거웠어.
아마 현재 진행형이든 과거 완료형이든, 덕질을 경험해 본 사람들이라면 공감할 것 같아 소설의 몇몇 구절을 여기 옮겨 놓는다. 오늘도 평화롭고 안녕한 당신의 덕질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제나의 결혼 이야기는 시시했다. 단언컨대 제나의 아이돌 이야기보다도 재미가 없었다. 남의 연애 이야기는 왜 그렇게 뻔한지. 드라마나 영화만큼의 스펙터클하고 로맨틱한 스토리를 원한 건 아니었지만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별게없었다. 말하는 제나조차도 해봤자 지겹다며 고개를 저을 정도였다. 하지만 제나는 아이돌 말고는 거의 세상 만사에 대해 그런 태도를 취했으므로 당연한 반응일지도 몰랐다. 함께 공연을 보러 가서 제나의 반짝이는 눈을 볼 때면, 이게 사랑이지 다른 게 사랑일까 싶었다. 나는 나 자신보다 제나의 눈을 보면 우리가 하고 있는 게 사랑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보고 싶다, 제나의 말에 보고 싶다, 얭의 말이 겹쳐지고 보고 싶다, 나의 말도 섞여 들었다. 보고 싶다. '사랑한다'와 '좋아한다'보다 늘 우위에 있는 감정은 '보고 싶다'였다. 항상 보고 싶었다. 보러 가는 길에도, 보고 있을 때에도, 더 이상 보지 못하는 순간에도.
그때 알았다. 내 소중한 것이 누군가에게는 별것 아니라는 걸. 내 마음은 누군가의 무시를 참아내야 한다는 걸.
덮고 있던 이불을 각 잡아 개어놓은 것을 보고 삐져나오는 미소를 참을 수 없었다. 역시 귀엽다, 귀여움으로 우주도 정복할 거야, 쟤는.
"잘 있니?" 소리내어 울어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알았지만 쓸쓸하고 답답했다. 한번 쯤은 내 말이 소리로 되돌아 오고 내 눈빛이 온기로 되돌아오는 사랑을 하고 싶었다. 마음 말고 생각 말고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그런 것들이 나를 채웠으면 좋겠다고. 이렇게 혼자 남겨졌을 때 번호 몇 개로 이어질 수 있는 목소리가 있다면 견디는 것이 쉬울텐데. 그 생각의 끝은 늘 그렇듯 허탈한 웃음이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나는 음악을 켜고 멈췄던 청소를 이어갔다. 나의 오빠는 청소하는 나를 위해 열심히 노래를 불러 주었다.
우리는 그날 또 한 번의 덕통사고를 당했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치인 그들이 고등학생은 아니었다. 그러나 성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풋풋한 아이들은 살금살금 다가와 내 통장에 빨대를 꽂았다. 덕후계에서는 나이 지긋한 우리가 저 아이들은 뭘까 싶어서 기웃거리는데, 버선발로 달려 나온 아이들이 우리의 손목을 덥석 잡고는 놓아주지 않는 꼴이었다. 우리는 구태여 손목을 비틀어 빼지 않고 아이, 몰라, 하며 따라 들어갔다. 천국으로.
한 살 더 먹었지만 나는 연애 대신 달달한 팬질을 다시 시작했다. 거리감에 무력감에 울게 될 걸 알면서도 또다시 사랑에 빠졌다. 사실 그들은 천사보다는 악마에 가까웠다. 내 일상을 흔들고 현실을 뒤엎으며 생활을 조이는. 나는 영혼을 팔아서라도 그들을 보고 싶었고 더 가까이로 가고 싶었다. 그들은 별이고 꿈이었다. 꿈 없이 일상에만 갇혀 살아가는 내게 그들은 우주를 건네주었다. 나는 늘 꿈 언저리를 맴돌고 맴도는 행성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그들은 내 우주에 불을 켜주었다. 나는 그 흔들리는, 흐릿한 불빛에 의지한 채 걷는다. 사랑하는, 그들에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