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
2055년의 어느날, 갑작스레 온 지구를 뒤덮은 '더스트'는 강한 독성으로 지구에 살고 있던 생명체를 공격한다. 십 여년간 이어진 더스트의 공세 속에 사람들을 더스트를 피할 돔을 지어 몸을 숨기고, 서로를 강탈하며 하루하루 위태로운 생존 전쟁를 치른다. 이후 더스트는 국제 공동 더스트 대응 협의체를 통한 증식형 분해제 광역 살포(디스어셈블러) 방식으로 2070년 완전 종식된다.
그로부터 70년이 흐른 어느 날, 생태학 연구센터에서 일하고 있는 연구원 아영에게 어떤 식물의 샘플이 도착한다. 경기 북부와 강원도 지역을 중심으로 급격하게 퍼져 나가고 있다는 식물 '모스바나'에 대한 조사를 떠맡게 된 아영은 처음엔 귀찮은 일로 취급하며 심드렁하게 반응하지만, 곧 이같은 기형적인 증식이 인류를 절망에 빠뜨렸던 '더스트 폴'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직감하고 호기심을 느낀다. 아영은 모스바나에 대한 비밀을 파헤치기 위하여 과거 '랑가노의 마녀들'이라 불렸던 나오미, 아마라 자매를 어렵게 찾아가고, 그곳에서 지구 끝에 존재했던 온실과, 온실을 지키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더스트
재난 생존극을 스펙타클하게 그려내겠다 생각한다면 다양한 옵션이 있다. 좀비 바이러스의 창궐, 화산 폭발, 소행성 충돌 등등… 이런 소재를 선택하면 이야기는 훨씬 쉽게 드라마틱해진다. 당장에 눈 앞으로 좀비떼가 달려드는 상황을 상상해보라. 그 자체로 등골이 오싹해지지 않나. 거기에 나의 사랑하는 가족이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된 비극이 겹치면 자연히 절절한 멜로가 추가된다. 그러니 드라마나 영화판에서 좀비가 꾸준히 각광받는 소재였던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화산 폭발이나 소행성 충돌은 또 어떤가. 이런 재난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시시각각 주인공에 가까이 다가오는 재앙의 그림자, 피하는 게 불가능한 대자연의 재해 앞에 무력한 인간들, 그러나 어떻게든 맞서 싸우려는 몇몇 주인공들의 의지, 거기에 클라이막스에서 눈물을 뽑아내는 고결한 희생정신까지… 이 모든게 합쳐지면 역시나 영화 한 편이 뚝딱이다.
그런데 이렇게 생동감 넘치는 소재들을 제쳐두고 이 소설이 선택한 건 ‘더스트’, 그러니까 먼지다. 물론 이 먼지는 공격적이고 치명적인 독성물질이지만, 한 순간 모든 것을 덮쳐버리는 파괴감도, 물리적 부피감이나 실체감도 어쩐지 부족하다. 실제로 소설 속 더스트는 한 순간 일어난 재난이 아니라 수 년에 걸쳐 지구를 황폐화시킨 것으로 나온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더스트를 선택했을까.
우선 매일 아침 미세먼지 예보를 확인하는 게 일상이 된 현실의 반영이 한 이유일 것이다. 현재 한국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더스트는 가장 현실감 있는 재난 소재라 할 수 있다. 더스트의 정체가 과학 발전의 부작용으로 발생한 나노입자라는 설정도 문명의 이기 속에 갈수록 규모를 키워가는 미세먼지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또 다른 이유는 아마도 이 소설의 초점이 재난 상황의 스펙타클이 아니라 미스터리에 있기 때문일 거다. <지구 끝의 온실>은 더스트 속에서 인간들이 어떻게 무너지고 갈등하고 극복하였는지의 과정보다, 애초에 더스트는 왜 발생했는지, 모스바나는 어떤 식물인지, 그 인물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에 더 관심이 많은 소설이다. 더스트가 이미 종료된 지 70년이 지난 시점에서 주인공 아영이 과거 역사의 진실을 파헤쳐가는 구조를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즉 더스트 상황의 생생한 현장감보다 더스트 시절을 기억하는 증언의 목소리가 <지구 끝의 온실>에선 훨씬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녀들
또다른 특별한 설정은 주인공의 특성에 있다. 재난극에 나타나는 대다수의 주인공은 첫째로 주로 남성이며, 둘째로 구원에 대한 사명감이 있는 인물이다. 특히 애끓는 부정으로 나의 가족을 살리기 위해 제 한 몸 희생하길 마다하지 않는 전형화된 영웅상이 자주 나타난다.
반면 <지구 끝의 온실>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쥔 두 주인공은 좀 다르다. 일단 온실의 주인 레이첼은 인간이 아니라 사이보그다. 신체를 기계로 대체하며 유지되고 있는 그녀의 몸은 유기체 비율이 20% 이하 수준이며 그나마 남은 부분도 기계화해가는 중이다. 종일 홀로 온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레이첼의 관심사는 식물 연구 그 자체다. 자신의 연구 결과가 인류를 멸망으로 이끌지, 구원으로 이끌지는 레이첼에게 하나도 중요치 않다. 연구의 목적이 돈이나 명예, 복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측면에서 레이첼은 여타의 빌런 캐릭터와 다르고, 구원과 인류문명 재건이라는 거창한 사명감이 아니라는 측면에서 히어로 캐릭터와도 확연히 차이가 있다.
온실의 수호자 지수도 마찬가지이다. 군인 출신 엔지니어인 지수는 레이첼에 비하여 지도력과 기동력을 갖춘 일반의 재난극 주인공들과 훨씬 비슷하긴 하다. 굳이 따지자면 행보 역시 유사하달 수 있겠다. 그러나 가장 핵심적인 것이 빠져 있는데, 레이첼과 마찬가지로 역시나 끌어 오르는 사명감이다. 지수의 관심사는 안정적이고 방어적인 자신의 울타리를 구축하는 것이고, 심지어 그 울타리조차도 오래갈 것이라는 믿음이 없다. 프림빌리지의 리더이면서 동시에 지수는 프림빌리지가 언젠가 와해될 것을 알고 있다. 지수는 적극적으로 변화를 일으키려 하기보다는 뒤에서 관망하기를 자처한다. 그녀는 중요한 순간에 인류에게 중요한 결정을 내리지만, 이는 스스로의 강인한 신념에 따른 선택이라기 보다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시점에서 최선의 선택을 내린 것에 가깝다.
레이첼과 지수를 비롯하여 프림빌리지의 주민들은 모두 영웅도 악당도 아니다. 그들은 지극히 평범한 ‘여성’들이고, 대부분 다른 사회에서 쫓겨나거나 도망쳐 와 지워진 존재들이다. 꿈도 소박해서, 복수를 획책하며 칼을 갈기 보다는 평화로운 하루하루의 연속을 희망한다. 나오미와 아마라 자매 역시 내성종인 자신들을 실험대상으로 사용하던 연구소에서 어렵게 탈출하여 헤매이다 프림빌리지에 발을 들이게 되고, 그저 더 이상 떠돌지 않고 평온하기만을 바라며 마을의 일원이 된다. 이토록 평범하고 소박한 이들이, 거대한 목적의식 따위가 아니라 그저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 그것이었기 때문에 더스트 시대를 저물게 할 씨앗을 뿌린다는 사실이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사실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라 이런 이들로 인하여 조금씩 해결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역사를 기억하라
이미 더스트가 종식된 지 수십년이 흐르고, 사람들은 더스트의 종식이 디스어셈블러 방식의 성공 덕분이라고 기억한다. 그러나 아영이 모스바나를 연구하고, 나오미를 찾아가고, 지수의 기록을 확인하면서, 역사 속에 기록되지 않은 또 하나의 중요한 축이 있었음이 밝혀진다.
재난을 물리치는 다양한 방법 중에 이 소설이 선택한 방식은 여전히 가장 스펙타클과 거리가 먼 쪽이다. 좀비바이러스 치료제를 두고 치열한 쟁탈전을 벌이거나, 소행성의 경로를 바꾸고자 온갖 첨단기술을 동원하다 거룩한 희생을 치르는 방식을 택하지 않는다. 프림빌리지 주민들은 그저 세계를 떠돌며 모스바나의 씨를 뿌린다. 대륙 곳곳으로 흩어지며 그들은 모스바나의 종자가 널리 번져나갈 수 있도록 도와줄 뿐이다. 이 움직임은 어떤 대단한 흔적도, 기록도 남기지 않아 아무도 그들의 존재와 그들의 방식을 기억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히 이 씨앗들이 다시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된다.
아영은 수십 년간 감춰져 있던 프림빌리지와 모스바나의 역사를 되살려 기록하는 존재다. 모두가 모르고 있었고, 또 알려고 하지 않았지만, ‘세상을 구한 여성들이 있었다’는 너무나 중요한 역사 말이다. 얘기되지 않는 역사는 사라지기에, 잊혀질 역사를 파헤치고 기록해 줄 누군가는 그래서 중요하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아영이 필요하다. 지금도 잊혀져 있는 누군가의 역사에 귀를 기울여 줄 그 사람이 바로 아영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지구 끝의 온실>이 결국 레이첼과 지수의 이야기이면서도, 이 이야기의 시작과 끝이 아영이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