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환대에 의해 사회 안에 들어가며 사람이 된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자리/장소를 갖는다는 것이다. 환대는 자리를 주는 행위이다.”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 2015, 26쪽
객석에 앉을 수 있는 관객의 나이
공연에 오를 각본을 심사하는 제도가 폐지된 것은 1989년이다. 공연윤리위원회는 1997년 해체되었다. 사전 검열은 표현의 자유를 해치는 일이고 삭제되지 않은 대본은 중요했다. 그런데 공연마다 명시된 관람 등급은 사전 심사의 폐지와는 별개로 존재한다. 7세 이상 관람가, 12세 이상 관람가, 18세 이상 관람가 등 각각의 공연에 알맞은 형태로 예매 사이트나 홍보물에 기록된 것을 익숙하게 봐왔을 것이다. 이는 대부분 공연을 만드는 사람들이 정한다.
영화가 여태 상영 등급을 받아야 하는 것과는 비교되는 지점이다. 웹툰이나 게임의 등급 심의가 완화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영화가 ‘자율’을 쟁취하지 못했다거나 선수를 뺏겼다는 한탄이 나오기도 한다. 그에 비해 공연예술가들은 외부의 검열을 거치지 않고 작품을 선보일 수 있으며 스스로 작품이 가진 영향력을 판단하는 자율성을 갖고 있다.
등급을 정하는 주체와 더불어 흥미로운 것은 관람 등급이 작동하는 방식의 차이이다. 예를 들어 영화관의 12세 이상 관람가는 관람 ‘권장’ 연령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보호자가 함께하는 경우 12세 미만 어린이도 관람할 수 있다는 보조 조항이 있다. 전체 관람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어린이와 성인이 함께 관람하는 것이 마땅하냐는 논쟁이 있었던 해프닝을 이 보조 조항과 함께 보면, 영화에서의 관람 등급이 작품에 대한 것이지 극장 공간에 들어올 수 있고 없고의 기준은 아님을 알 수 있다.
한편 극장에서의 12세 이상 관람가는 12세 미만 관람 불가라는 ‘금지’로서 작동한다. 이것은 극장에 들어올 수 없는 나이를 명시하고 어린이의 극장 출입을 제한한다. 공연예술가들은 무대에 설 수 있는 이야기에 대한 통제를 거부했다. 관련 제도는 폐지되었다. 하지만 객석에 앉을 수 있는 관객의 나이는 ‘검열’의 대상으로 남겨진 셈이다. 검열이 너무 극단적인 단어라고 느껴지지만, 과연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당신은 객석에 앉을 수 있는 관객인가?
누구를 관객으로 초대할 것인가
내가 관람 연령을 처음 주의 깊게 보게 된 것은 코로나 팬데믹이 잠식할 미래에 대해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던 2019년 가을이었다. 극장 바깥의 거리나 숲, 여관이나 기차역 같은 장소에서 작품을 선보이던 나는 우연한 계기로 극장 무대에 선보일 공연을 준비해야 했다. 당시 첫째 아이는 만 2세였고 뱃속에 둘째를 임신 중이었다. 아이는 어린이집 하원 후 나를 따라 극장 연습실이나 회의실에 동석했다. 여러 조건이 맞다면 무대에 서는 것도 가능했다.
다만 객석에 앉아 내가 준비한 공연을 볼 수는 없었다. 당연시되었던 조건인 관람 연령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를 금지한다는 것은 아이와 한 몸으로 여겨지고 동시에 임신 중인 엄마로서의 나를 금지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왜 아이는 안 될까? 아이들이 가졌을 것으로 여겨지는 특징을 가진 어른은 괜찮은가? 괜찮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결국 자신을 잘 통제할 수 없거나 웃음, 탄식, 소리 없는 눈물과 같이 약속된 반응으로 감상하지 못하는 관객에 대한 금지였기 때문이다.
그해 11월 공연에서 나는 아이와 함께 극장 무대에 올랐다. 우리는 “7세 이상 관람가는 아이를 위한 배려인가요, 방해받지 않기 위한 배제인가요?”라고 물은 후, “흥이 나면 손뼉을 치고 펄쩍펄쩍 뛰는, 발달장애를 가진 청년 김세환은 7세 이상이므로 극장에 갈 수 있나요?”라고도 물었다. 극장 예절을 아는 어른들의 객석은 고요했다.
극장의 종말을 예감하는 초대장 없는 사람들
〈극장종말론:입문편〉(2021)은 이후 극장 규범에 관한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서간문, 인터뷰, 에세이 등을 연재한 프로젝트이다. ‘극장종말론 선언’을 썼고, 이에 공감하는 관객들을 만나 극장을 찾는 한 사람으로서 생각하고 겪은 일들을 듣고 기록했다. 이때 만난 울림은 결혼 후 아이를 키우기 전까지 극장을 자주 찾고 공연을 사랑하는 관객이었다. 관람할 공연을 예매하는 것으로 월간 계획을 시작할 정도였다. 그는 자신이 극장 규범을 잘 이해하고 지킬 수 있는 관객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극장을 찾을 때 느껴지는 고양감으로 연결되었던 기억을 이야기했는데, 이는 그가 두 아이의 양육자가 되었을 때 돌봄이 해결되지 않는 한 한동안은 관객이 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조건이 된다. 또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둘째 아이가 관객이 될 수 없으리라고 단정하는 근거가 된다. 이때 약속된 규범을 지키는 교양 있는 관객이란 ‘예술가가 만든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존재’라고 인정되는 조건으로 기능한다. 이것은 그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존재인 어린이는 그저 곁에 앉은 관객을 방해할 뿐이라고, 무대 위의 서사를 따라가고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단정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연령 제한’이라는 합의점에 이르게 하는 더 익숙한 근거는 침해와 방해에 대한 염려이다. 공연이 전개해나가는 세계가 교양 없고 산만하고 준비되지 않은 관객들에 의해 침해되거나 손상될 수 있고, 결국 함께 있는 다른 관객까지 방해받게 되어 어쩔 수 없다고들 한다. 극장에서 공연을 관람하는 전통적인 예절을 따를 뿐이라는 것. 한데 전통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몰입해야 할 것이고 과연 얼마나 방해받는가. 여기서 방해란 정확히 무슨 뜻일까. 이것은 그저 예술 작품과 예술가 중심의 인식 범위 안에만 머무는 관점이고 해석이다. 무엇보다 이런 설명은 ‘정상’ 관객을 범주화하고 강화한다. 극장의 규범이 싫다면 블랙박스 시어터나 그 밖의 장소에서 공연하고 관람하면 된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로 타당하지 않다. 극장 바깥으로 나가는 것 또한 자발적인 선택이 아니라 불가피한 결정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교양 없고 산만하고 준비되지 않은 ‘비정상’ 관객에게는 원하는 공연을 원하는 극장에서 볼 권리가 없는가. 이는 휠체어 이용 장애인에게 출근 시간을 피해서 지하철을 타면 되는 거 아니냐고 말하는 정치인의 언술과 어떻게 다른가. 혹은 화상이나 부상의 위험을 들어 어린이를 금지하는 노키즈존과는 얼마나 닮았나. 극장은 금지나 통제가 아니라 보완을, 다른 접근을 시도해야 했던 것이 아닐까. 공연예술은 연약하고 다양한 인간 군상을 무대에 올리며 혼란하고 취약한 삶과 시스템을 드러내지만, 실제로도 나약하고 유난한 인간은 관객으로 초대하지 않는다.
관객이 될 수 없는 부류라는 것이 실재할까?
이해할 수 있고 없고의 문제를 예술 제공자가 결정하는 것은 예술의 수용 방식이나 범위에 한계를 만들 뿐이다. 랑시에르는 예술가가 관객이 느끼기 바라는 것을 작품에 담고 관객이 그것을 깨닫기를 기대하는 것이 바보를 만드는 교육자들의 논리와 같다고 보는데, 관객은 그런 스승을 따르는 학생들이 아니다. 예술가들의 기대와 달리 관객들은 창작 의도대로만 감상하지도 해석하지도 수용하지도 않는다. 예술가가 주는 것을 잘 받아 그리려 노력하는 관객이 있다고 해서 그 밖의 방식으로 인식하는 관객을 틀렸다고 볼 수는 없다. 이는 오히려 자연스럽고 당연한 결과이다. 관객은 각자의 방식으로 보고 깨닫는다. 자신이 경험하고 알고 있는 것들을 근거로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탐색하고 그 상황에서 각자의 방식과 속도로 관람한다. 예술가와 예술가가 만들어낸 세계를 존중하는 만큼 관객 개별의 감상 방식과 속도를 존중한다면 어땠을까? 객석은 지금과 같은 형태로 남겨지지 않았을 것이다.
객석에는 역사가 없다
극장의 역사는 무대를 중심으로 서술되었고 공연예술의 역사는 연출자나 극작가와 같은 예술가를 중심으로 기록되어왔다. 그 역사 속에 관객이나 객석은 빠짐없이 언급되지만 ‘언급’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 한다. 예술가 개개인이 추구하는 바를 구현해내기 위한 무대 시스템이 기술의 발달을 반영하며 발전하는 동안 객석은 유지 이상으로 변화하지 못 한 것이다. 객석에는 역사가 없다.
객석을 중심으로 연극사를 살펴보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뜻이 아니다. 디오니소스 극장의 계단식 야외 객석과 등받이와 팔걸이가 있는 맨 앞 귀족의 좌석, 세자리아노의 책 『건축』에 실린 로마 극장의 도판에서 확인할 수 있는 실내 원형 극장의 계단식 객석, 프랑스 르네상스 시대 테니스 코트를 개조한 실내 극장의 갤러리와 박스석에 대한 기록, 또는 1900년대 초까지 많이 사용된 일직선의 긴 의자 좌석인 파라디, 박스석을 연달아 붙인 무대 양옆의 갤러리, 무대 앞 중앙 홀에 의자를 두지 않은 스탠딩석인 파테르/피트, 무대 위 이상화된 세계를 만들기 위해 객석을 어둡게 한 바그너 극장, 1930년대 이후 리모델링이나 재건축으로 깔리기 시작한 카펫과 개별 좌석제의 시행 등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흐름 속에 다양한 관객을 고려한 변화가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권리 행사가 가능한 시민만이 관객이었던 시대에 어린이와 노인, 노예를 제외하던 기준이 지금과 다르지 않아 보이는 것은 전통을 지킨 결과일까. 입장료만 낼 수 있다면 계급을 초월한 익명의 다수를 관객으로 맞이한다는 근대의 극장은 돈과 저녁 시간이 있는 사람만이 교양이 있는 관객이 될 수 있게 했다. 이제 극장은 관람석의 바닥면적의 합계가 300제곱미터 이상일 경우 전체 객석 수의 1퍼센트 이상에 장애인석을 설치해야 한다. 다양한 몸을 관객으로 환대하는 자리가 되었을까? 여기서 장애인은 휠체어 사용자로만 상정된다. 그 자리마저도 구석이나 맨 뒷줄이고 객석으로 들어가는 길에 경사로가 없는 계단만 놓인 경우도 있다. 극장 건물로 들어가는 과정만이 문제가 아니다. 모두가 이용하는 편리한 온라인 예약 시스템에 휠체어석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평일 업무 시간 내에 전화로만 예약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휠체어석에 대한 이해가 없는 담당자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설명하는 일을 반복하기도 한다. 어떤 극장도 휠체어 금지라고 써 붙인 극장은 없다. 그러나 장애인을 환영하는 극장도 없다고 느껴지는 이유다. 그밖에도 저녁 8시라는 공연 시간의 틀을 통과하지 못하는 야간 노동자, 7세 이상 관람가라는 연령 제한을 통과하지 못하는 어린이와 보호자, 가만히 있어야 하는 관람 예절에 압도되는 ADHD 환자 등 극장이 만들어 놓은 틀을 통과하지 못한 몸을 위한 객석은 없었다. 20석 규모의 소극장이든 1,000석 이상의 대극장이든, 거기 틀림없이 존재한다는 객석이 누군가에게는 애초에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러한 점검 끝에 극장이라는 단어가 곧 객석을 의미한다는 것을 떠올리면 모든 것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극장(theatre)의 어원인 테아트론(theatron)은 ‘보다(thea)’와 ‘장소(tron)’가 더해진 것으로, ‘보는 자리’, 즉 ‘객석’을 의미한다. 극장이라고 말하는 일은 객석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음에도, 객석에 대해 어째서 그렇게 무심할 수 있었을까?
캡션: Photo by Florian Gaertner - Getty Images
극장이라는 복잡한 세계에서 정답 찾기
나는 평소에 노키즈존 호텔이나 카페의 인권침해에 관해 망설임 없이 말해왔던 것처럼 극장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고 싶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 간단하게 전개되지 않았다. 특히 객석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그 자체가 한계를 품는다. 객석은 단지 공연이 행해지는 건축물 안의 고정된 공간이기만이 한 것이 아니라, 공연 작품 자체와 관객, 예술가와 관계 맺는 자리이자 시간성을 가진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함께 다루지 않는 이상 이 논의는 완성되지 않을 것이다. 정말 그렇다. 하지만 다양한 공연예술의 양식이나 관람 문화를 둘러싼 견고한 규범, 혹은 공연 시간까지 함께 살펴보려는 시도 사이에서 길을 잃기는 너무 쉽다. 그 맞는 말들은 어쩐지 객석의 문제를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그 혼란 사이에서도 내게 한 가지 확신은 있었다. 우선 객석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관객 되기의 조건으로서 물리적인 장소인 객석의 상태와 운영 방식을 바꿔보려는 시도만은 당장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관객으로 극장에 간다는 것은 공연을 관람할 자리를 갖는 일이고 그건 객석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관객성에 대한 편협한 인식과 다양한 관람 서사의 부족은 극장에 갈 수 있는 사람만 극장에 간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허용된 범주 안에서 허용된 부류의 사람들에게만 그 경험이 주어졌다. 게다가 극장에 관해 말하는 이는 그들 중에서도 아주 일부이니 객석은 그들이 아는 수준에서만 다뤄졌을 것이다.(그래서 다뤄지지 않았다.) 그런 맥락에서 새로운 자리를 상상하는 일은 곧 관객 개발이기도 하다. 관객 개발을 둘러싼 논의가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이에 관한 연구와 포럼도 다수임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같은 문제 제기와 비슷한 해결책이 반복되는 것은 제한된 풀에서 관객을 개발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객석이 생겨날 때 새로운 관객과 경험, 논의가 이어질 것이다. 관객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객석이 개발되어야 한다.
완벽한 객석이라는 게 가능할까
...그런데 어떤 객석이 개발될 수 있을까? 소란한 관객을 막아주는 칸막이 좌석? 관객의 특성에 맞는 트랜스포머형? 부스 형태의 무소음 가족석? 그런데 이런 식으로 개발된 객석이 극장에 새로운 역사를 쓰게 하고 객석에 발전적인 미래를 이끌 수 있을까?
대학로에 위치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는 어린이와 동반자가 앉을 수 있는 부스 형태의 보금자리석이 있다. 그걸 처음 발견했을 때는 무척이나 반가웠고 배제된 어떤 관객들을 위한 대안이 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그것이 이 논의의 결론이 될 수는 없었다. 안타깝게도 객석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물리적인 객석 개발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앞서 인용된 인터뷰에서 울림은 아이를 맡길 돌봄이 해결되면 관객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나 또한 분리된 공간에서 아이를 데리고, 혹은 아이를 맡기고 여유롭게 관람할 방법을 찾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당연시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이런 기대는 여전히 정상성의 범주 안에서 관람 문화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큰 한계를 지닌다. 다양한 특성을 가진 관객을 위한 객석을 지금의 극장 규범에 기반해 개발한다면 그것은 문제를 더 악화시킬 뿐이다.
그러니까 개발되어야 하는 것은 특수한 객석이 아니라 복잡하고 첨예한 맥락이 다뤄질 수 있는 안전한 논의의 장이어야 한다. 다양한 신체와 나이, 관점, 태도를 가진 관객들이 머물 시공간으로 객석을 인식하고 무대를 고요한 진공 상태로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가 가능한 관계로 바라볼 수 있는 자리 말이다. 그것은 극장을 둘러싼 복잡한 관계 속에서 미끄러지고 다시 기어오르고 끌어당기기를 반복한 끝에 겨우, 어렵사리 가능할 것이다.
객석을 따로 떼어 살펴보자는 나의 제안은, 그러므로 실패다. 극장과 공연예술을 둘러싼 많은 것들을 재검토해 보는 전면적인 접근이 아니라면 이야기는 계속 틀린 구석을 낳을 것이다. 아니, 처음부터 모두 뜯어본다고 한들 완벽한 극장은 불가능할 것이다. 완벽하게 보이기 위해 감춰야 할 것이 생기지 않을 리 없다. 필요한 것은 모두에게 무해하지만 닿을 수 없는 유니콘과 같은 극장이 아니라, 오히려 미끄러지고 충돌하고 거절하고 화해하는 과정이 가능한 시끄러운 극장이다. 매끈하고 고요하고 교양 있음으로써 차별적인 극장의 현상 유지를 멈추기 위해서는 그런 소란이 필요하다. 다만 매번 말하는 사람들이 다시 말함으로써 시끄러워지는 것이 아니라, 이런 말을 해도 될까 염려하던 객석에서 시작되는 소란, 극장에서 본 적 없는 관객들이 만들어내는 소란함이 필요하다. 객석은 그간 너무 어두웠고 고요했다. 그 정적이 어떤 관객들을 배제하는 데에 쓰였다.
*웹진 [춤in] 에 [비평] 코너에 게재되었던 원고에 소제목을 붙여 재정리한 글입니다. (2022년 5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