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h Feb 19. 2022

my tiny desk office

엄마인 채로 일하기 1



나에게는 작은 출근 의식이 있다. 검은색 새틴 머리띠, 블루투스 이어폰, 얇은 보라색 카디건, 안경닦이, 업무용 다이어리, 유튜브 뮤직, 핸드크림, (최근에 추가된) 페이퍼 인센스. 


둘째 아이 낮잠을 재우고, 첫째 아이가 아빠와 낮잠을 자러 들어가면 나는 손을 깨끗하게 씻고 핸드크림을 짜내어 손등을 위주로 착착 바른다. 책상 왼편에 걸려 있는 머리띠로 흘러내리는 머리를 싹 밀어 올리고 안경을 닦는다. 책상 앞에 앉아 손이 닿는 곳까지만 간단히 치우고 빠르게 펜을 정리하고 컴퓨터를 켠다. 북스탠드에 읽을 책을 펴고 긴 자와 연필을 꺼낸 후, 노동요를 켜고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방금까지 정신없거나 흐릿했던 세계의 페이지가 닫히고, 내 눈앞에 작고 선명한 일터가 열린다. 이 혼란한 책상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사무실이 된다. 


이 사무실은 동생과 함께 살던 원룸의 작은 책상에서 개업했다. 벌써 10년도 넘게 흘렀다. 그 시절 나는 회사 생활에 매우 지쳐있었고, 다른 인생을 꿈꿨다. 하지만 다른 인생이 정확히 뭔지 모르는 상태였다. 늘 같은 생각만 했다. 내가 뭘 하고 싶은 거지? 그게 늘 궁금했지만 정작 질문의 답을 찾으려고 애쓰지는 않았다. 그냥 월급은 적었고 나는 한심하고 퇴근하고 집에 오면 기분이 나빴다. 게다가 툭하면 퇴사하는 사람이었다. 번 돈을 다 쓸 때까지 불안과 함께 노닐다가 다시 되는대로 일을 시작했다. 다시 돈은 없고 불안한 날의 반복. 일을 하는데 일을 좋아하지도 않고 심지어 잘 못하는 내가 한심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습관처럼 회사 앞에서 커피를 샀다. 그건 일을 시작하는 의식 중에 하나였다. 회사에 가기 위해 졸음을 쫓는 의식. 그걸 자각하자 문득 커피 맛이 썼다. 


퇴근길에 지하철 역 앞의 카페를 지나는데 커피를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매일 저녁 사무실에서 나와 집에 가는 길에 따뜻한 카페라테를 마셨다. 나를 위한 사무실로 출근을 하자. 나는 카페인과 함께 반짝이는 눈을 밝히며 집으로 갔다. 문래동의 18층 원룸형 아파트의 작은 책상. 책상 앞에는 아주 작게 “my tiny desk office”라고 써붙였다. 나 이제 여기로 출근할 거야. 여기 내 사무실이야. 동생에게 말하고 싶었는데, 아직 동생도 퇴근하지 못한 밤이었다. 


그 자리에 앉아서 매일 무언가를 조금씩 했다. 그림책 만들기도 했고, 글을 쓰거나 책을 읽었고, 조각을 맞추고나 영화를 봤다. 그게 내가 아는 나를 위한 일들이었다. 안 하는 날들이 더 많았고, 책상에  잡동사니를 치우지 않은 채로 방치하는 날들이 더 늘었다. 결혼 후에는 그 책상에서 긴급하게 대학원을 졸업하고 다시 이런저런 일을 했다. 바쁘게 사느라 “my tiny desk office” 같은 간판은 걸지 못했다. 그냥 책상이지, 초소형 사무실 같은 다짐은 이미 잊어버렸다. 이후에 나름대로 개인 작업을 시작해 월세 50만 원씩 내는 번듯한 작업실도 가졌었다. 초소형 사무실이 이제 10평짜리 작업실이 되었으니, 아주 성공적이었지. 하지만 이제는 월세를 밀리지 않기 위해 조금 하기 싫은 일조차 오케이하며, 동시에 눈앞에 닥친 일들을 처리하면서 지냈다. 그럼에도 작업실의 평화와 안전을 사랑했으나, 두 아이와 코로나를 겪어내는 사이에 그 곳도 정리해야 했다. 


집에서 일하기는 여간 곤란한 게 아니었다. 신혼 때 거실을 카페처럼 꾸미고 넓은 테이블을 모두 차지했던 기억을 떠올려봤지만, 부엌이 훤히 드러난 지금의 집 구조에서는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시간제 거실 작업실'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온갖 방식으로 어디서든 나를 위한 것들을 할 수 있다고 애썼지만, 정말 애써야만 겨우 조금씩만 이뤄졌다. 방 세 개 가운데 하나를 서재로 바꾸자고 결정하면서, 다시 그 초소형 사무실이 기억났다. 그렇게 이 사무실은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나를 위해 재개업했다. 


책상이야 언제나 있던 건데, 옆에 내가 좋아하는 책을 두고 필요한 일을 하는 건 익숙한데, 그간 대충 급하게 하느라 잊었던 것들을 하나씩 정리한 게 그 출근 의식이었다. 마음에 드는 예쁜 헤어밴드를 사고, 좋아하는 색갈의 카디건을 사고 그것을 사용하며 온전한 나의 상태를 구성하는 일. 틈만 나면 자고 싶은데, 자꾸 뭔가 딴짓이 하고 싶은데, 출근 의식을 치르고 나면 조금 달라지는 걸 느낀다. 앞머리를 싹 올리고 반짝이는 안경을 쓰고 페이퍼 인센스 덕분에 내 책상 주변을 머무는 향기들 가운데 앉는다. 아이들 사이에서 안온하게 부대끼던 것과는 다른 상태로 행복하게. 





매거진의 이전글 빛은 등 뒤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