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h Mar 21. 2021

빛은 등 뒤에

극장종말론자 입문 과정




빛은 등 뒤에

-극장종말론자 입문과정


너는 극장을 사랑했다. 태어나서 처음 극장에 갔던 날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뮤지컬이란 장르를 처음 알게 된 날도 기억한다. 암전 속에서 빛 먼지가 날리는 무대를 보던 것을 기억한다. 표를 구하려고 애쓰던 날들, 처음으로 진짜 브로드웨이를 찾았던 날들, 뮤지컬 넘버가 가득한 아이팟을 잊지 않고 챙기던 날들 말이다. 그 마음은 영영 잊혀지지 않을 법한 것이어서 몇 년이 지나도 너는 계속 극장에 있었다. 


극장에서 일하는 동안 많은 곳에 들렀다. 가장 좋아하는 곳은 회전 무대가 있는 극장의 지하였다. 레일이나 얇은 쇠기둥 따위로 만들어진 장치들이 보이는 복도를 지나 무대 상수에서 하수로 뛰어갔다. 종종 무대가 움직이는 동안에 그 길에서 허리를 조금 숙이면 조명기들이 보였다. 눈이 부셨다. 빈 공간을 창고로 만들어 문을 달아 놓은 곳도 좋아했다. 아직 배우들이 출근하지 않았고 스태프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바쁠 때, 숨어서 달게 낮잠을 잤다. 


그래도 최고는 객석이었다. 늘 남의 자리에 앉는 것 같은 게 싫은데 좋았다.


그날에는 객석에 앉아 어렵게 초대권을 구한 공연을 보고 있었다. 퇴근 후에 공연을 보는 건 업무의 연장이지만 그래도 가능하면 공연을 보는 것을 택했다. 비싼 푯값을 치르지 않고 유명한 공연을 볼 수 있다는 건 거의 유일한 복지였다. 게다가 도심에 있는 그 극장은 무대예술이 만들어내는 특유의 환상을 만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벌써 공연 바닥에서 십 년 가까이 일했음에도, 여전히 그런 환상을 좋아했다.


어둠 속에서 무대를 향해 나란히 그리고 빼곡히 줄 선 의자 중 하나에 네가 앉아 있었다. 껌껌하고 고요한 사이로도 관객들의 가만한 환호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중세 프랑스를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은 여자가 주인공이었다. 뮤지컬 공연의 주요 타깃은 20~30대 여성이고, 기본적인 티켓 판매 수익을 올리기 위해 주연은 꼭 티켓파워가 있는 남자여야 한다는 게 지루하게 반복되는 게 이 바닥이다. 여자 주인공? 이게 되겠어? 이런 의심을 받자 티브이에도 나오는 유명 여자 배우를 주연으로 세웠을 것이다. 유료 객석 점유율은 얼마나 되려나? 너는 늘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것을 궁금해했다. 그래도 이 대본은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하기에 흥미로운 지점이 많지 않아? 물론 상업뮤지컬을 그런 식으로 읽어내는 경우는 드물다. 너는 답을 알면서도 괜히 질문했다. 


극장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티켓부스를 찾았다. 초대권을 받을 때 만난 프로덕션 직원은 비싼 표값을 넉넉히 내고 근처에서 비싼 밥과 커피를 마시고 들어온 지역 주민이 평일 객석을 많이 채운다고 했다. 그는 티켓 매니저에게 초대권 봉투를 받아 네게 건넸다. 관계자용 모니터링 초대권이었기에 좌석에 대한 기대는 없었다. 보통 3층이나 1층 맨 뒤 예비석 같은 자리가 제공되었다. 로비에 서서 전에 같이 작업했던 무대 크루에게 '나 왔다'고 문자를 보내다가 하우스 오픈을 알리는 안내에 티켓을 꺼냈다. VIP석? 대표님은 함께 안오셨냐고 묻던 직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대표님이 오는 줄 알고 준비한 것일까? 아니면 갑자기 취소된 표일 텐데 정중앙 자리를 비울 수 없어 티켓매니저가 거기에 나를 집어넣은 것일까? 모를 일이다. 너는 그냥 감사히 그 자리에 앉았다.


만석이었다. 앙상블들의 군무도 주인공의 솔로도 지나치다 싶게 아름다웠다. 각이 잘 잡힌 선들과 제스쳐가 하나같이 매끈하다. 겉도는 대도구 없는 세트나 고증을 해서 만들었을 의상의 톤도 근사했다. 물론 가발만은 어떻게 해도 자꾸 거슬렸다. 동시에 고심해서 가발을 제작했을 분장팀의 얼굴이 떠올라 미안했다. 동양인의 얼굴 위에 얹힌 노랗고 둥근 머리, 이마에 세팅된 마이크와 진하고 또렷한 메이크업, 불어와 영어가 뒤섞인 한국어 가사 같은 것들이 충돌할라치면 음악이 들렸다. 오케스트라 피트 가운데 지휘자의 머리가 봉긋 보였다. 여러 악기가 각자의 결을 매끄럽게 내세우며 풍성해지는 소리는 라이브로 연주될 때 더욱 선명한데, 대극장 배우들 특유의 성량은 또 어떤가. 스케일이 다르지. 대형 기획사에 의해 꾸려진 대형 뮤지컬이 대체로 그렇듯 숨 막히게 황홀했다. 좀 지나치다 싶어도 그게 이런 공연의 미덕으로 자리한 거 알잖아. 발아래 놓은 가방이 발에 채였다. 지나치다거나 숨 막힌다는 생각이 그렇게 오갔다. 그래서였을까. 너는 정말 숨을 쉴 수 없었다.


1막 공연 내내 너의 몸은 뻣뻣해지고 어딘가 계속 불편해지고 있었다. 인터미션 동안 밖으로 나가 담배를 피우는 무대 크루와 만났다. 찬 바람을 쐬며 객석에서는 알 수 없었던 사소한 실수들에 대해 들었다. 배우 중 하나가 무대 상수가 아니라 하수로 잘못 퇴장을 했다거나 조명 하나가 조금 늦게 켜졌다거나 하는 식이다. 


ㅡ 아 그런 거 객석에서는 하나도 티 안나. 근데 객석 왜 이렇게 불편해? 역시 나는 SM데스크(무대감독 자리) 옆에서 쭈그리고 봐야하나. 아까 잠깐 숨을 못쉴 것 같더라고.


불편 토로를 불평으로 들었는지 그 무대 크루는 VIP석에 돈 안 내고 앉았으니 어지간히 불편하겠냐며, 옆자리 관객 기분 나쁘니까 감사히 보라고 웃으며 대꾸했다. 그렇지? 너는 다시 객석으로 들어섰다. 막이 오르자마자 흡- 호흡이 가빠졌다.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었다. 앰뷸런스를 부르게 될까? 그런 생각도 했다. 


여덟 개의 의자가 나란히 연결된 객석에서 너는 복도로부터 네 번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가장 비싸고 귀한 자리. 고개를 돌려보니 양 옆에 앉은 관객들은 빛나는 무대에 눈을 고정한 채 집중하고 있었다. 빛은 오로지 무대에만 있었다. 손목이 뒤틀리는 기분에 주먹에 힘을 주었다. 뒤편에 나가는 문이 어디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고개를 돌렸다. 뒷 줄에 앉은 다른 관객과 눈이 마주쳤고 너는 서둘러 무대 쪽으로 다시 눈을 고정했다. 이 곳에서 두 눈은 무대 말고 향할 곳이 없었다. 그는 부스럭거리며 집중을 방해하는 관객을 향한 욕과 품평이 올라온 커뮤니티의 글이 떠올랐다. '관크'라고 하던가. 그 용어를 생각하자 식은 땀이 흘렀다. 숨쉬기는 여전히 힘들었고 이후에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긴장한 상태로 커튼콜 음악이 시작되는 걸 들었다. 


옆 사람은 그 티브이에도 나오는 유명 배우를 위해 박수를 아끼며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너는 그의 눈초리를 받으며 겨우 일어섰다. 코트와 가방을 쥐고 옆 자리에 앉은 사람의 무릎과 그 옆자리에 앉은 사람의 무릎과 다른 무릎들을 거쳐 어두운 복도로 나왔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 와중에도 조용히 중얼거리며 조아렸다.


빛을 등지고 객석 뒤쪽을 향해 걸었다. 아직도 빛은 무대에만 있을 뿐, 객석은 어두웠다. 커튼콜은 유행하는 대로 길게 이어질 예정이었다. 객석 안내원이 나타나 작은 손전등으로 너의 발을 친절하게 비춰주었다. 짧게 숨을 뱉었다. 코트와 가방을 껴안고 나가려고 하자 그 친절한 손전등을 든 객석 안내원이 너를 가로막았다. 객석 조명이 켜지고 커튼콜이 끝나야 문을 열 수 있다나. 친절한 목소리 때문인지 대꾸할 의지도 생기지 않았다. 출입문 옆에 기대어 무대를 보자니 구역질이 났다. 옆에 음향 콘솔에 앉은 음향 감독도, 관객도, 객석 안내원도 모두 규칙을 잘 지키며 운동장에 선 군인들처럼 앞만 보고 있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