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없어요.
인숙이 평소처럼 어린이집에서 여솔을 데리고 막 집에 도착한 참이었다. 시끄러운 알루미늄 문을 밀자마자 여솔은 웬일로 제 아빠의 방부터 찾았다. 그리곤 아빠가 없다며 놀란 눈을 굴렸다. 할머니한테 전화를 해보라고 재촉했다. 울먹이는 여솔의 말들을 맞춰보면, 어제 할머니와 아빠가 크게 다툰 것 같았다.
여솔의 말은 그 끝이 뭉툭해지면서 끊어졌다. 울음이 가득히 차오른 곡소리는 장례식장에서 발인날 들리는 것과 닮아있었다. 어린이의 울음에 담긴 두려움과 어른의 비명에 어울리는 원한이 뒤섞였다고 할까. 듣기가 가혹했다. 여솔의 할머니, 강수정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여솔이 아빠가 방에 없다고 여솔이가 할머니를 찾습니다. 연락주세요.”
한번 더 전화를 하려다가, 문자만 하나 남겼다.
여솔네 집으로 출근한 지 한 달이 조금 넘은 날이었다.
*
인숙이 여솔네에서 할 일은 간단한 편이었다. 오후 4시 30분에 맞춰 여솔의 어린이집으로 간다. 어린이집 현관문 옆에 매달린 아크릴 박스 문을 연다. 그 안에 들어 있는 인터폰 수화기를 들고 말했다. 다감반 여솔이요. 몇 분쯤 뒤에 단정하게 머리를 빗고 가방을 멘 여솔이 앞치마를 한 젊은 선생님의 손을 잡고 현관으로 나온다. 담임 선생님이 전해주는 몇 가지 특이사항을 듣고 그날 만든 종이꽃이나 고리 목걸이, 스티커를 붙인 부채 따위를 조심히 받아 든다.
여솔은 인숙을 잘 따랐다. 누구든 잘 따를 법한 아이였다. 어린이집에서 여솔의 집까지는 걸어서 10분 정도면 충분히 도착하는 거리이다. 물론 여솔의 속도에 맞추다 보면 30분도 걸렸다. 어떤 날에는 여솔이 하자는 대로 놀이터에도 들르고 풀밭에서 네 잎 클로버도 찾고 벤치에 앉아 쉬기도 했다. 할머니 그거 아세요? 그리고 여솔은 어린이집에서 배운 것들을 흥에 겨워 떠들어댔다. 식중독을 예방하는 방법이나 여름 과일의 종류, 물놀이 안전수칙 따위를. 혹은 종이로 고리 만드는 법이나 오후 간식으로 무엇을 먹었는지에 대해서.
집에 오면 목욕부터 시켰다. 따뜻한 물로 머리카락과 몸을 충분히 적신 후 비누 거품을 낸 샤워 볼로 구석구석을 싹싹 닦았다. 귀 뒷면과 손가락 사이사이와 손목, 겨드랑이와 엉덩이와 발뒤꿈치에 비누칠을 하고 세숫대야를 뒤집어 수건을 덮은 후 여솔을 앉혔다. 흰 거품 옷을 입은 여솔의 검은 머리를 감길 차례다. 샴푸를 묻힌 후 양손으로 머리카락과 두피를 살살 비벼 거품을 냈다. 얼굴로 흘러내리지 않게 착착 닦아가며. 그러는 사이 몸의 비누 거품은 사그라든다. 고무통 가득 따뜻하게 채워진 물을 바가지로 퍼서 살살살 머리에 붓는다.
하늘 봐, 하늘.
인숙의 말에 여솔은 엉거주춤 고개를 위로 쳐들고, 식어가던 몸 위로 따뜻한 물줄기가 흘러내린다. 고개 숙이면 눈에 비누 들어가. 하늘 봐, 하늘. 아무리 말해도 여솔은 비누가 눈이나 코에 들어가도 신경 쓰지 않는 듯 깔깔댄다. 가끔 따끔한 눈에 물을 몇 번이나 적셔가며 씻어내더라도 장난치기를 멈추지 않았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데도 신이 나서 고개를 흔드는 통에 매번 인숙의 옷이 젖는다. 미끌대던 아이의 어깨에서 뽀드득 소리가 날 듯하다. 분홍색 장미가 여러 송이 그려진 플라스틱 통 속 물비누는 달큼한 냄새를 풍긴다.
몸이 개운해지면 눈앞에 마땅해 보였던 것들 사이에서 더러움을 본다. 내 몸만큼 더 정갈해지길 바라게 된다. 씻고 씻기는 일이 없이는 늘 나른하고 몽롱한 기분이 들었고, 인숙은 그 나른함과 몽롱함을 싫어했다. 욕실 문 앞에서 여솔의 몸을 따라 흐르는 물기를 닦아낼 때면, 여솔의 귀 뒤로 늘어진 머리카락과 작은 어깨너머로 좁은 거실이 보였다. 다이소에서 새로 산 오천 원 짜리 수납장이 세 개가 늘어나 있었다.
정리를 마쳤지만 정갈하지 않은, 더러울 것도 없고 깨끗한 것도 아닌, 정돈된 가난의 풍경.
냉장고에 있는 반찬을 꺼내 여솔의 작은 플라스틱 식판에 담았다. 뽀로로가 그려진 자리에 흰쌀밥을, 루피가 그려진 자리에 잘게 잘린 콩나물이 떠다니는 맑은 국을, 포비가 웃고 있는 자리에 소시지를, 에디가 망치를 들고 있는 칸에 물김치를, 해리가 있는 가장 작은 칸에 케첩을 놓았다. 여솔이 숟가락을 들면 인숙은 욕실을 정리한다. 모든 틈에 들어찬 물때를 언젠가 마음먹고 닦아내야지, 생각하며 대야를 뒤집어 놓고 젖은 수건으로 세면대와 수전의 물기를 닦아낸 후 빨래 바구니에 넣는다. 목욕하고 먹는 밥이 참으로 달지, 통통한 볼 가득 오물오물 씹는 여솔 앞에 앉은 인숙은 달달달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선풍기를 바라본다.
선풍기 너머에 보이는 방문은 여태 열리지 않았다.
벌써 여솔네에 온 지도 한 달이 넘었다.
그간 인숙은 좁은 거실과 주방 사이만을 자신의 자리로 두었다.
그 몇 발자국 되지 않는 공간을 오가며 여솔과 시간을 보냈다.
여솔이는 이제 다섯 살이다. 여솔에 대해서는 출근했던 첫날 수정에게 다 들은 것 같다. 그가 벌써 한글을 읽을 줄 알고 쓰기 연습도 시작했다는 것, 누구도 시키지 않은 것을 혼자서 했다는 것, 제 주변 정리도 잘하고 할미를 잘 돕는다는 것, 그래서 이 아이 여솔이를 보살피는데 힘들지는 않을 것이라고, 수정이 준비한 것처럼 쉼 없이 말했다. 못하는 게 없는 우리 우리 여솔이.
인숙은 여솔을 가만히 바라보는 때가 많았다. 여솔은 늘 스스로 무엇이든 하고 있었으니까. 인숙은 나무 마루를 흉내 낸 고무 장판 위에 손톱자국을 내어가며, 여솔이가 뭐든 혼자서 잘 한다던 수정의 말을 되뇌었다. 그리고 그때 그 말이 자신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는 걸 깨닫는다. 아. 인숙은 여솔을 바라봤다. 그렇다. 그 말은 아이에게 하는 말이었다.
얘야, 너는 스스로 한글 쓰기를 하고 청소도 하고 새로 온 선생님을 힘들게 해서는 안 된단다.
칭찬처럼 생긴 지시에는 칭찬이 없었다. 딸기맛 사탕이 그저 딸기향과 인공색소로 딸기를 흉내낸 것처럼.
인숙이 식판을 들고 일어나 설거지를 하는 동안, 여솔은 입고 있는 반팔 티셔츠 소매에 꽉 차는 통통한 팔을 이리저리 바삐 움직였다. 바삭하게 잘 마른 수건과 바지와 양말, 티셔츠 따위가 이룬 낮은 산속에 작은 손을 쑥 집어넣어 양말 한 짝을 꺼냈다. 작은 손으로 양말의 발가락 부분과 발목을 양손으로 잡고 팽팽하게 당겨 바닥에 눕힌 후 그 양말의 다른 짝을 그 마른 옷의 산 끝에서 집어 올렸다. 다시 발가락 부분과 발목을 양손으로 야무지게 당겨 나란히 눕히고 두 번 접어 아이의 무릎 쪽에 놓았다. 속도가 빠른 것은 아니었지만 쉼 없이 움직였다. 아이는 수건이나 티셔츠에 대해서도 크게 다르지 않은 움직임을 반복했다. 어깨에 닿지 않는 단발머리가 흘러내려 얼굴을 가릴 듯하면, 요리조리 흔들어 단속했다.
인숙은 설거지를 마치고 고개를 들었자 아이가 정리를 마친 빨래가 보였다. 그 옆에 방문도. 그 방문 손잡이가 시선을 붙잡았다. 여솔 아빠가 누워있을 그 방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안이 보이는 정도는 아닌, 2cm 정도나 될까, 거의 닫힌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였지만, 한 달 동안 열린 것을 본 적 없었기 때문에 당황했다. 두려움인지, 불편함인지 모를 기이하고 복잡한 마음이 선명해졌다. 그것을 내내 모른척하고 있었음도 깨달았다. 그는 방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할머니?
인숙은 손끝에 느껴지는 손길에 화들짝 놀랐다. 여솔이였다. 양말 하나를 쥐고 인숙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거 한 짝이 없어요. 인숙은 움직임이 없는 그 동그란 손잡이에서 시선을 돌려 여솔이 정리한 수건과 양말을 발견하고는 무릎으로 걸어 아이 옆으로 다가갔다. 이걸 다 정리한 거야? 정말 대단하다 여솔아. 이제 우리 뭐할까? 마치 혼잣말처럼 작게, 우리 이제 뭐할까, 뭐를 하면 좋을까를 반복하며 주변을 살폈다. 여솔이 짝을 잃은 양말 하나를 쥐고 있는 것은 눈치채지 못한 채로, 그저 자신의 목소리나 말투가 충분히 선생님다웠는지 점검했다.
창의력이요. 창의력 학습.
여솔은 오른손을 들어 가까이의 벽을 가리켰다. 왼손은 짝을 잃은 양말을 계속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 벽에는 꽃이나 리본, 왕관을 쓴 여자나 집을 그린 여솔의 그림이 여럿 붙어 있었다. 두서없이 붙은 그림들의 나열은 높은 흰색의 책장에 가로막히면서 끝났다. 책장은 가로세로 겹쳐진 책들로 빼곡했다. 자기 계발서와 성경, 동화, 스프링 노트나 파일 따위가 뒤섞인 채. 알록달록하고 올록볼록한 스티커들이 그 책장을 이룬 틀을 따라 드문드문 붙어 있고, 책이 서거나 누울 수 없는 애매한 자리는 장난감이나 정체불명의 상자, 안경, 화장품 샘플과 메모지, 볼펜, 비닐봉지, 쇼핑백 따위가 채우고 있었다. 아직 인숙의 눈은 여솔이 말한 것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창의력이라고..? 인숙은 여솔의 답을 반복하는 것으로 시간을 끌었다.
창의력 학스읍… 차앙의력 학스읍…
어리둥절한 인숙의 앞을 지나 여솔이 책장 가장 아래 칸에 꽂힌 얇은 책자를 하나 꺼냈다. 표지에 그것이 쓰여있었다. 창의력 학습(하).
그 학습지는 여솔의 아빠가 얼이라고 불릴 때 만든 것이었다. 얼이 대학에 붙었을 때 본가가 서울이라서 기숙사 심사에서 탈락했기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두부장수와의 재혼을 이혼으로 마친 강수정의 살림은 어딘가 더 쪼그라들어 보였다.
왜 선생이 되겠다는 거야, 어째서?
국어교육학과를 졸업했고 교원자격증이 있어요.
나는 모르겠다.
수정은 한숨을 쉬는 것으로, 또는 모르겠다는 말로, 반대를 표했다. 얼은 임용고시에서 번번이 떨어졌다. 선생 따위 하지 말라는 엄마의 말이 저주가 된 것이 아닐까? 얼은 그런 의심을 품으며 독서실로 갔다. 시험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다. 엄마가 아니라면 자신을 도울 사람은 자기 자신뿐이니까.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과외를 소개해주겠다는 선배나 아르바이트를 했던 학습지 회사에서 연락이 왔지만, 알던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시험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고 싶었다. 당분간은 그저 모르는 얼굴로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살다가, 시험에 합격한 후 새 인생을 살고 싶었다. 채용사이트에서 파트타임 코너를 오갔지만 마땅한 것은 편의점뿐이었다. 독서실에서 버스로 한 정거장 떨어진 곳에 있는 편의점에서 일을 시작했다. 자신이 최근에 읽은 소설 속 주인공들이 하나같이 편의점 야간시간 아르바이트를 했던 게 생각났다. 너무 클리셰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이게 현실이라서 그런 소설들이 쓰였나 보다고 생각했다. 사장은 계산대에서 공부를 해도 좋다고 했지만, 실은 내키지 않는 눈치였다. 책을 보더라도 손님이 들어오면 먼저 살피고 필요한 게 있는지 먼저 묻도록 재차 강조했다. 계산대에서 공부는 잘 되지 않았다. 네 번째로 낙방했다. 아르바이트로 시간을 죽였다.
어린 시절 얼에게는 비밀이 있었다. 그는 엄마 몰래 죽은 아버지가 남긴 메모를 꺼내봤다. 들키지 않을 곳으로 교과서를 선택해 그 사이에 숨겨뒀는데, 종이는 낡지 않고 갈수록 더 빳빳하고 단단해졌다. 이건 유서였을까 낙서였을까. 늘 마음속에 그 질문이 있었다. 태우고 태워도 결국 남고 남겨진 재처럼 쌓여 있다가 종종 뾰족한 먼지가 되어 눈을 따갑게 하거나 재채기를 하게 하는 의문. 무엇을 믿을 수 있을까? 그런 날에는 그 파란색 긴팔 잠옷을 뒤집어쓰고 강 속을 헤매는 꿈을 꾸었다.
꿈은 그냥 꿈일 뿐이지.
아침 식사로 지하철 역에서 산 김밥을 쑤셔 넣은 입을 오물오물. 꿈일 뿐이야. 그는 속으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얼은 오늘도 일등으로 출근하게 될 터다. 밖은 아직 어두웠다. 긴 겨울이 막 시작된 참이었다.
몇 달 전부터 얼은 서대문역 앞에 있는 오래된 5층짜리 건물 4층으로 간다. 엘리베이터가 없고 각 층 사이에 작은 화장실이 있었다. 계단에서는 옅은 오물 냄새가 났다. 철문 앞에는 알파교육개발(주) 라고 작은 간판이 붙어 있었다. 거기서 사장과 얼을 포함 해 세 명이 일했다. 얼이 출근하는 곳이다.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로 시작했던 학습지 문제 출제나 지문 편집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임용고시를 완전히 손에서 놓은 후였다.
오히려 일이 잘 풀렸다. 문제집을 만들다가 문득 생각나 제안하는 아이디어들이 잘 채택되었다. 편의점에 앉아서 일할 때 두꺼운 교재를 짧은 호흡으로 나눠서 풀던 때를 떠올렸다. 다른 사람들도 시간이 많이 없으니까… 학습지를 얇게 만들면… 얼이 자신감 없게 얼버무리며 말하면 사장이 맞장구를 쳐주었다. 다양한 종류의 학습지를 만들어 팔았다. 그중 몇 개가 잘 풀렸다. 사장은 얼에게 많은 걸 거침없이 맡겼다. 작은 사무실에 직원이 두 명 늘었다.
창의력 학습지가 그중 하나였다. 초등학교 고학년과 중학생 대상의 국어와 영어 학습지가 오랫동안 주력이었지만 영유아 및 어린이 대상으로 만든 창의력 학습지가 흐름을 탔다.
엄마들은 아이들이 교구 가지고 노는 것에는 만족을 못해요. 아무리 단순한 내용이라도, 연필 잡고 책을 펴는 걸 좋아하죠. 노래 나오는 장난감도 책 모양, 인형도 책 모양, 어린이 옷장도 책 모양이던데요.
월요일 아침 회의 때 얼이 했던 말이다. 자신의 엄마인 수정을 떠올리며 했던 기획이다. 아비 없는 자식 자체보다도 아비 없는 자식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진짜 책이 뭔지는 몰라도 책처럼 생긴 걸 아이들에게 주고 아이들이 앉아서 책을 읽는 것처럼 보이길 바라는 거지. 얼이 아는 수정은 그런 사람이었다. 수정만 그런 사람이었던 건 아니었나 보다. 그것은 영유아 국민 학습지가 되었다. 이제 웬만한 어린이집과 유치원에는 모두 창의력 학습지를 납품했다.
아이들은 책처럼 생긴 것 앞에 앉아 놀았다.
짝을 찾아 연결하라. 어울리지 않는 것을 찾아 동그라미 하라. 틀린 것에 스티커를 붙여라.
창의력 학습은 그런 명령으로 이뤄져 있었다. 여솔은 입을 앙 다물고 그것들을 참 잘했다. 기어코 짝을 찾아냈다. 어울리지 않는 것을 찾았다.
틀림이 없이 잘하는 아이. 자신에게 없는 짝을 찾아내거나 어떤 무리에 어울리기 위해, 틀린 것이 없어지길 바라는 것처럼. 인숙은 요 똑똑한 것이 기특하고도 짠했다. 좋은 집에 태어났으면, 하린이네 집이었으면, 이미 영어로 말하고 있을 아이인데,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여솔이가 풀던 문제에서 손도 눈도 떼지 않고 말했다.
할머니, 근데 화장실에서는 하늘 못 봐요.
그게 무슨 소린고, 생각한다. 화장실과 하늘. 로션을 발라 맨질해진 여솔의 볼 주변이 블러 처리를 한 것처럼 뽀얗게 보인다. 여솔이 고개를 휘이 돌려 인숙을 올려보더니 말을 이었다.
아니 아니 할머니. 목욕탕 안에는 하늘이 없다고요, 하늘이.
아직도 알아듣지 못하고, 무슨 하늘이야, 하는데 여솔은 할머니가 머리 감을 때 하늘 봐 하늘 봐하잖아요. 근데 하늘이 아니고 저 벽이라고요. 천장이요, 라고 덧붙였다.
인숙은 아, 머리 감을 때 내가 그랬지, 그제야 알아듣고 말을 한다. 그렇네, 이제 천장이라고 할게. 인숙은 시계를 봤다. 창의력 공부를 잘하면서 창의력이 없네, 생각하며.
그러다 보면 9시 반이 되고 수정이 돌아왔다. 그는 낮에 무슨 일을 하는지 흔적 없이 퇴근했다. 그러면 인숙도 퇴근이었다. 다음 날에는 또 시간에 맞춰 여솔의 어린이집으로 갔다. 여솔을 씻기고 옷을 정리하고 책을 읽거나 학습지를 하고 밥을 먹고 설거지를 했다.
그러나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여솔은 딸꾹질을 해가며 울었다. 날이 선 한이 뾰족하게 커지는 소리였다. 잠시 숨을 고르다가도 다시 꺼이꺼이 울어댔다. 밥도 먹지 않고 통곡을 했지만, 이내 인숙의 품에 안겨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도 자기 자신의 무언가를 이기지 못했는지 종종 발작을 하듯 부르르 떨었다.
괜찮아 괜찮아 아빠 올 거야
강수정에게서는 아직 연락이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