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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케이크를 훔치다

by 안치용

오랜만에 찾아온 제자가 슬그머니 예쁜 종이상자를 내민다. 이런저런 번잡한 의식과 대화로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안에 무엇이 들었냐고 물었다. 케이크란다. 막 저녁을 먹으러 갈 참이어서 차 안에 두었다가 집에 가져가도 괜찮겠냐고 물었더니 불안한 기색이다. 그래서 예쁜 종이상자를 들고 식당으로 갔다. 안에 어떤 케이크가 들었는지 살펴보지 않고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 정도 배를 채운 뒤 디저트 삼아 나눠 먹으려고 상자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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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크가 녹아 있었다. 특히 초콜릿 케이크는 완전히 흐물흐물해져 모양 상으로는 케이크 물질이지 케이크라고 말하기 힘들어 보였다. 내가 “완전히 떡이 됐네.”라고 말하자 한 녀석이 재치 있게 “원래 떡 사 왔어요.”라고 받아넘긴다. 좌중에 한바탕 웃음꽃이 핀다.


모양으로는 먹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먹고 난 다음의 것 같은, 혹은 입에 넣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입에서 나온 것 같은 떡 같은 물질을 일회용 포크로 어렵사리 떠서 입에 넣었다. 달다. 정말 달다. 단 것을 자제하는 요즘의 식습관으론 감당하기 힘든 단맛이다. 그렇지만 사온 성의를 생각해서 먹을 만큼 먹고 또 나눠 먹는다. 아마도 귀가해서는 그 케이크를 처리하기 위해 BBC 다큐멘터리 한 편을 틀어놓고 실내자전거를 열심히 타겠지.


케이크를 사 온 녀석이 핸드폰에서 원래 모양을 찾아서 보여준다. “이렇게 예쁜 애들이었어요.” “내 20대 사진 같네. 방금 먹은 케이크는 지금의 나 같고.” 예의 바른 또 한 번의 웃음꽃. 그러나 모양으로는 20대의 나나 지금의 나나 크게 다르지 않다. 외람된 말씀이나, 머리숱이 더 있고 주름살이 덜 있다고 꼭 더 보기 좋은 건 아니지 싶다. 혹은 내면을 기준으로 두 시기의 내가 두 성상의 케이크와 비견될까. 마찬가지로 꼭 그렇지는 아닌 듯하고, 정확하게는, 모르겠다. “원래 떡이었어요.”에 대한 아저씨 버전 호응?


돌아오는 차 안에서 심드렁하게 라디오를 들으며 운전하다가 문득 “떡이 된 케이크”가 내가 망쳐버린 인연들과는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예뻤던 것들을 무심히 방치하여 엉망으로 만들어버린, 적지 않은 인연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차라리 끝끝내 종이상자를 열지 않는 게 최선이었을 것이란 생각도 든다. 고양이는 반은 살고 반은 죽은 채 반도체적 존재로 인식될 수 있겠지만, 인연은 제로섬이다. 그런 고양이는 현실에 없지만 그런 케이크는 도처에 널렸다. 날씨는 덥고, 욕심 때문에 자전거 페달이 팍팍하여 나이 듦이 구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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