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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탄생설화1]왜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고 했나

by 안치용

모태신앙이거나 기독교를 오래 믿은 사람에게 사도신경은모두에게 그렇지는 않겠지만신앙고백이라기보다는 의전에서 반복하여 쓰이는 무의미한 주문 비슷한 것으로 사용되는 듯하다. 예배에서 다른 기독교인과 함께 사도신경을 외는 나는 뒤늦게 신앙생활을 시작해서 그런지 생후 2개월 된 강아지가 신발이며 벽지며 온갖 것을 물어뜯듯 “전능하사”란 첫 문장부터 마음에 걸린다. 나의 하나님이 전능하지 않은 것 같아서다. 하나님의 전능에 대해서는 나중에 기회가 생기면 논하기로 하고,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에게 태어났다는 대목 또한 신경이 쓰이는 게 사실이다.


나는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계시하였다는 사실을 믿지만, 예수가 마리아라는 동정녀에게 태어났다는 주장에는 갸우뚱하게 된다. 앞에서 물은 질문의 범위를 확장하여, 만일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받아들이지만 동정녀 탄생은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기독교인인가, 아닌가. 한국 교회의 소위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말하든 내 생각은 확고한데, 동정녀 탄생을 믿는 사람이 기독교인이듯 믿지 않는 사람 또한 기독교인이다. 당연히 ‘십자가와 부활’을 신앙한다는 전제하에서이다.


내가 보기에 설화임이 너무 분명한, 그리고 사실 누구도 실제로는 진위를 따지지 않는 동정녀 탄생 설화를 굳이 꺼낸 이유는 믿음 없는 설화의 교조화가 진짜 예수를 만나는 데 장애가 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사실 신학에서 동정녀 탄생은 별로 중요한 주제가 아니며, 2천 년 가까운 토론 또는 언쟁을 통해 할 얘기를 이미 다 했다.


기독교 교리에 조금만 관심을 두고 있거나 웬만한 인문교양을 가진 사람이라면 「마태복음」 등의 예수 탄생 이야기의 부정확성을 알고 있으며 거기에 개입한 성서 오역(誤譯)의 역사를 안다. 그렇다고 성서가 허위라고 주장하려는 건 아니다. 확실한 것은 성서가 적어도 역사서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복음서는 당대의 시대정신과 담론의 맥락 아래에서 진지하게 저술된 예수에 관한 가장 믿을 만한 기록이다. 그렇다고 일부 광신적인 신자들이 주장하듯 성서의 모든 문장 모든 단어를 적힌 그대로 다 믿어야 하는 건 당연히 아니다. 아니, 그것은 불가능하다.


성서를 구성하는 유일한 단어나 문장이란 원천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완전한 진실을 담은 무결(無缺)한 하나의 성서란 존재하지 않으며, 부분적 진실을 담은 상대성의 수다한 텍스트 가운데서 인간들이 그중의 한 가지 가능성을 텍스트로 만들어내어 성서라고 보여줄 뿐이다. 정말 많은 단어와 문장 가운데서 성서에 정통한, 또는 그저 권한을 가진 ‘사람’들이 성서라는 형태로 문장과 단어를 골랐을 뿐이다.


신은, 인간이 단박에 파악해서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뒤 내용과 행태를 제시할 수 있는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신은 그를 찾고자 하는 사람 앞에 그에게 도달할 수 있는 길을 기꺼이 보여주지만, 내 생각에 그 길은 항상 미로이다. 성서라는 인간의 언어로 된 텍스트 또한 그 미로의 한 형태다. 그중 계시의 가장 유력한 가능성의 하나로 제시된 현존 성서에서조차 해석의 무한한 다층성이 발견되며 그 속에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도움 아래 자신에겐 적합한 경로를 찾아 나선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꼭 성서를 통해서만 나에게 말을 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생각에 세계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성서로 그는 세계를 통해서도 나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다.


십자가와 부활이 어떤 식으로든 4복음서에 다 거론되지만, 동정녀 탄생 이야기는 마태와 누가의 복음에서만 볼 수 있다. 어떤 이들은 동정녀 탄생이 기독교의 핵심적 사안이면 왜 4개 복음서 중에서 2개 복음서만 다뤘느냐며 성경이라는 정경(正經) 내의 비중을 근거로 간단히 회의론을 내민다. 그것이 논거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단정하기는 어렵고, 사실 찬반을 논하는 논거는 더 많고 더 깊이 들어간다.


개인적으로 나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 진위 논쟁에 가담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 나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담론적 장치로 이해하지만, 상징적이고 나아가 당대의 정치사회적인 의미를 넘어서 불변의 물리적 사실로 철석같이 받아들이는 기독교인이 있다고 하여도 그 태도를 비판할 마음 또한 전혀 없다. 신앙의 완결성은 현실의 합리성과 무관하게 구성되기 마련이다. 요체는 신앙의 완결성이 현실의 삶에서 작동하는 합리성을 배척하느냐 아니냐이다. 후자라면 문제가 없지만 전자라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내가 아는 어느 노인의 사례가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예일 텐데, 독실한 기독교인인 이 분은 백내장이 발발한 뒤에 기도로 나을 수 있다며 치료를 거부하여 끝내 실명하였다. 내가 이해하는 하나님이라면 기도의 응답에서 병원에 가라고 말씀했을 법한데, 그 분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과 다른 존재인가 보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 설화를 사실 중심으로 파악하면 예수의 어머니가 마리아라는 것은 불변의 사실이다. 쟁점은 과연 아버지가 누구냐이다. 즉 ‘동정녀 방정식’은 마리아란 항수와 아버지란 변수로 구성되는데, 변수를 확정하는 방법론이 예수 사건의 전반적 관점을 결정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예수 사건 전체를 지배하는 이 전반적 관점이 변수를 확정하는 방법론 또한 결정한다고 할 수도 있다. 동정녀 설화에서 나의 관심사는, 진위 자체가 아니라 바로 이것이다. 진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고 따질 이유조차 없다.



--<예수와 완성한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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