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하는 마블 세계관...
마블의 ‘ㅁ’자도 몰랐던 내가 DC의 다크나이트 시리즈를 격파한 후 돌연 디즈니플러스에 가입하여 마블 시리즈를 정주행하기 시작한다. 그게 아마 1월 말 정도 됐던 것 같은데, 그 때의 나는 논얼로 상태여서 너무 심심했고 요즘 볼 드라마가 없어서 더 심심했고 마침 대체 마블이 뭐길래 궁금하던 참이었다. 근본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이언맨 1부터 세계관 순서대로 다봤다. 인크레더블 헐크랑 스파이더맨 시리즈 일부는 디즈니에 없길래 네이버 어쩌고랑 왓챠에서 찾아서 봤다. 금요일에 엔드게임을 보고 토요일에 파프롬홈 보고 어제 블랙위도우까지 봤으니까 이제 진짜 영화관에 나온 마블 시리즈는 다 봤다. 주변 사람들이 착해서 그런가 엔드게임에서 누가 죽는 지 나한테 스포한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나도 착한 사람이기 때문에 여기에 스포를 하는 만행을 저지르지는 않겠음. 나처럼 아직도 안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자나...) 고마움과 동시에 당황스럽고 그들이 죽었을 때의 황망함과 배신감(누구를 향한 건지 모름)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솔직히 어떤 마음으로 그 이십 몇편 되는 드라마도 아닌 영화 시리즈를 이렇게 끝까지 봤는 지 생각해보면 왠지 모를 의무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는데 엔드게임은 여운이 남는 게 신기했다.
엄청난 초능력을 가진 영웅이 선한 마음을 가지고 무턱대고 세상을 다 뒤엎으려고 하는 악당을 물리치는 내용의 판타지는 어릴 때부터 너무 많이 봐왔기 때문에 마블 코믹스의 시리즈가 주는 메시지 자체가 신선하거나 대단하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길고 긴 30편 가량의 드라마도 아닌 영화 시리즈를 다 봐낼 수 있었던 것은 인물들의 입체감?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같은 사건에 대해서도 각 시리즈에 나오는 히어로들이 너무나 다른 서사와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게 뚜렷하게 보이는 게 흥미롭게 느껴졌다. 각각의 히어로들도 결국에는 사람이고(토르는 근데 사람 아니고 신인뎁..) 각자 다른 생각을 가지고 움직이고, 실수를 하고, 싸우기도 하고 실패를 하기도 한다는 걸 여실히 보여줘서 좋았다. 너무 현실성 없는 배경과 사건이면서도 각각의 인물이 보여주는 생각이나 감정의 흐름 같은 게 오히려 아무것도 아닌 미물로 스스로를 정체화하는 일반인 관객들에게 힘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솔직히 나는 아시아인 여자고 남자들이 나오서 쌈질하는 컨텐츠에 평생 노출되어 있어서 남자 히어로는 좀 뻔하다. 모든 영웅이 다 백인 남자이던(아이언맨 헐크 토르 캡틴아메리카 퀼 앤트맨...) 시리즈 초반은 서사고 뭐고 비슷하게 생긴 애들 계속 나와서 수트 입고 싸우는 거 쪼오끔 지겹긴 했는데 블랙위도우 나오고 나서부터 그들에게도 서사가 있다는 것에 좀 더 집중해서 볼 수 있었다. 아빠가 딸을 보호하고, 남자친구가 애인을 보호하고 뭐 그런 식상한 서사가 마블에 나오는 대부분의 남자 히어로한테는 심어져 있던 반면에 완다 블랙위도우 캡틴마블은 다른 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강해진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좋았다. 근데 또 반면에 걔네들도 '남자' 히어로들 처럼 좀 약해빠진 남자친구 혹은 가족 혹은 애인을 열심히 보호하는 클리셰적인 연출을 해줬어도 오히려 흥미롭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아닐수도 있음) 아무튼 그래서 완다랑 캡틴마블이 너무 늦게 나온 거랑 블랙위도우가...(ㅠ) 너무너무 아쉬웠다.
엔드게임까지 나온 마당에 앞으로의 마블 시리즈가 어떻게 굴러갈지 모르겠긴 한데, 올해 닥터스트레인지도 나오고 토르에서 제인이 묠니르 휘두를거라고 한 거 보니까 시리즈가 더 열심히 많이 나오긴 할건가보다. 그럼 이왕 나오는김에 캡틴마블 시리즈도 더 만들고 완다 시리즈도 만들어주고, 블랙팬서 동생 슈리 시리즈도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걔네들이 지금까지 나온 애들 중에 젤 똑똑하고 젤 쎔....
잘생겼던 캡틴은 이제 백발노인이 됐고 이제 남은 최애는 머리 짤라서 더 존잘된 토르 뿐. 토르 4 재밌겠다. 아무튼 마블 시리즈 시간이 정말 많고 궁금한 사람들이라면 한번 정주행할만하다. 일하기 너무 싫어서 쓴 재밌었던 마블 시리즈에 대한 감상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