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가는 문장들과 홀리듯 담은 생각들
요조 작가의 책은 세 번째다. <아무튼, 떡볶이>에서 그의 다소 집착적이면서도 무던하고, 잔뜩 흥분한 것 같으면서도 서늘한 온도의 글에 반했다. 그래서 <여자들의 교환일기>도 읽었고, <오늘도 무사>는 세 번째 책.
<오늘도, 무사>를 여기저기 책방에서 마주친 적은 많았지만 어쩐지 연이 닿지 않았다. 책이 비닐로 싸여있었는데 왠지.. 그런 책은.. 정감이 떨어진달까 하는 아주 비합리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왜 책을 비닐로 감쌀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하면서도 그런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심지어 작가도 책을 비닐로 싸고 싶지 않았을텐데!) <오늘도, 무사>는 오랜만에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와장창 쓸어담으면서 만나게 된 책이다.
진지하게 일과 회사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번 휴가 동안 나는 새로운 도전을 하는 사람들 혹은 새롭게 뭔가를 시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싶었다. 그럼 뮤지션을 하다가 책방 주인이 된 요조는 어떨까? 하고 산 책.
심란한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앉은 자리에서 3시간 만에 다 읽었다. 음 역시 따뜻하군, 좋네- 내 인생에도 종수씨가 있으려나, 그런 생각을 문득문득 하면서 읽었다. 에세이란 건 글의 밀도가 높지 않아서 쉽게 읽히지만 그만큼 휘발도 쉬운 것 같아서, 좋았던 부분들을 다시 기억해본다. (인용구들은 모두 책 본문에서 따옴)
<나는 더 많은 문자가 필요하다>
나는 매사에 문자가 필요하다.
영화를 보고 나서도 문자가 필요하다.
감독의 인터뷰를 찾아보거나, 영화평론가의 리뷰를 검색해야 한다. 그 의견에 동의하거나 반대하면서 내가 본 영화에 대한 감상을 실체화하고 정돈할 수 있다.
글자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좀 닥치는 대로 읽는다. 메뉴판, 원산지, 인터넷에 올라온 각종 글들. 하지만 왜 우리는 활자에 집착하는가? 요조는 '더 많은 문자가 필요해서'라고 했다. 그림이건, 음악이건, 영화건 그것들을 정확하고 적확하게 설명해줄 말들이 필요한 것이다.
아- 그래서 나는 그렇게 음악에 대해서 중언부언 말을 덧대고 영화나 책에 대해 짧은 단어들로 감상을 표현했구나. 나는 어설픈 글일지라도 내 글을 읽고 사람들이 그 작품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볼 수 있었던 게 좋았다.
비평이든 리뷰든 모두 2차 창작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1차, 2차, 3차 창작물을 만들고 읽어줬으면 좋겠다. 그래서 더 좋은 1차, 2차, 3차 창작물이 나오도록. 그러니 내 글도.
<홀려서>
나는 잘 홀린다.
대체로 홀려서 여태 살아온 것 같다.
좋은 문장이다. 나와는 다른 문장이긴 하다. 나는 객관적으로 보아도 주관적으로 보아도 홀리는 편은 아니다. 보통 젊고 잘생긴 남자와 여자 - 대부분 아이돌 - 에 홀려버리긴 하지만 그 외에 인생에서는 보통 키를 잡으려고 노력하는 편이지, 파도를 타고 중심을 잡는 서퍼 느낌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키를 잡고 가다보면 가끔 내가 엉뚱한 배를 몰고 있는 기분이 든다. 어? 이 배가 아닌가? 갈아타야하나? 갈아타는 선택지에는 뭐가 있지? 갈아타고 나는 괜찮을까?
가끔은 그냥 홀려서 살고 싶다. 20대를 홀려서 보내버려도 괜찮을 것만 같다.
<성우>
한참을 두런두런하다가 성우는 일어나며 책을 한 권 건넸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 내가 빌려준 책이었다. 나는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뭘 빌려주거나 빌리는 일을 잘한다. 굳이 그렇게 한다. 다음에 또 만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구실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도도에게 <여자들의 교환일기>를 빌려주었던가 주었던가.. 여튼 걔는 그런 걸 빌려주지 않아도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리고 빌려준다고 한들 우리는 그걸 주고받는 걸 까먹은 채 만날 것이다. 아무튼 좋으니 나는 도도를 더 자주 보고 싶다.
<아이보리화>
종수는 내게 "왜 우느냐"고 했고 나는 "이렇게 예쁜 노래를 만들지 못하는 사실이 너무 슬퍼서 운다"고 했다. 종수는 내가 실력이 안 되어서 노래를 못 만드는 게 아니라고 했다. 이렇게 예쁜 노래가 저절로 나올 수 있게 자기가 더 많이 사랑해주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서 그렇다고, 자기가 더 잘하겠다고 했다.
솔직히.
이런 사람이 진짜 있다고요?
나중에 미래의 내가 이 글을 읽으면서, "그런 사람 진짜 있더라 흐흐"하고 웃었으면 좋겠다.
<쇼난에 가다>
요조는 항상 쇼난FM을 틀어놓았다고 했다. 그리고 이 에피소드에서 요조는 휴가 때 쇼난FM 방송국에 놀러갔던 일화를 들려준다. 외국 방송국.. 재밌겠다. 별개로 잠깐 들렀다던 가마쿠라는 이 지구에서 내가 어딘가에 콕 박혀서 살 수 있다고 한다면 선택할 하나의 동네다. (인천 나의 홈타운을 제외한다면)
이국의 FM라디오를 틀어놓는 다는 건 꽤 낭만적인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이 팬데믹에서! 외국의 라디오를 들은 경험은 거의 없는데, 대학교 때 자주 늦게까지 있었던 가게가 Radio Swiss Jazz를 틀어주었다. 나머지 말은 독일어라 알아듣지 못했지만 유일하게 알아들은 세 어절이 "뤠이디오 스위스 재-즈".
http://www.radioswissjazz.ch/en
아마 내가 한 라디오를 틀어놓으면 이 채널을 계속 틀어놓을 것 같다. 나는 스위스 바젤에서 재즈 학교 졸업연주회를 갔었고, 스위스를 좋아하니까 이건 나름의 필연이야!
<서울국제도서전>
- 수진아, 기억나니? 우리 해마다 국제도서전에 왔었잖아. 그때 네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언젠가 국제도서전 홍보대사가 되고 싶다고 했어. 근데 지금 봐라, 정말 됐다?
그러니까 꿈은 여기저기 이것저것 떠들어야 한다. 그럼 누군가 옆에서 기억해주고 이야기해주지 않을까?
나는 콘텐츠를, 플랫폼을 만들고 싶다. 그리고 내 이름으로 된 책을 하나 갖고 싶다!
분명히 글을 시작할 때만 해도 이렇게 쉽게 읽히는 에세이는 시시하다고 생각했는데. 짚다 보니 하나하나 구석구석 좋아졌다.
덕분에 오늘도 무사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