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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키 Jul 24. 2022

잘해줄 땐 잘해줘요.

데이트 폭력 1편

무더운 여름 어느 날 오랜만에 B양을 만나 차 한 잔을 마셨다. 연애에 푹 빠져서 시간 내기가 어려웠다고 말하며 카페라테를 홀짝홀짝 마시는 B는 여전히 밝고 유쾌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좀 전부터 내 눈에 뭔가 계속 거슬렸다. 시야에 은은한 보랏빛의 무언가가 걸렸다. 내 눈이 삐었나? 아니다. 힘겹게, 조심스럽게, 최대한 내 눈동자의 이동을 들키지 않게 훔쳐보았다. 멍 자국이었다. B의 가녀린 왼쪽 팔에 내 주먹만 한 시퍼런 멍 자국이 주먹 모양으로 찍혀 있었다.


물어보고 싶었다. 어쩌다 생긴 멍 자국인지. 하지만 만약 B가 그것을 감추고 싶어 한다면? 아니다. 감추고 싶었다면 내가 보지 못하도록 노력했겠지. 물어보자. 아니야.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든다고 애써 잔잔한 상대의 마음을 긁는 일이 될 수도 있어. 주책 떨지 말고 그냥 가만히 있자.

그러나 멍을 발견한 후로는 도저히 대화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졸음운전하느라 집에 돌아온 길이 기억나지 않는 것처럼 멍이 생긴 이유에 대해 상상의 나래를 펼치느라 내가 뭐라고 떠들고 있는지 인지하지 못할 정도였다. 아니라면 참 좋겠지만 상상이 곧 현실이 되는 윌터 못지않게 내 상상은 줄곧 현실이 되곤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마음에도 다른 종류의 멍이 물들고 있었다.

 

결국 걱정스러운 마음을 참을 수 없어 농담 툭 던지듯 물어보았다.

“너 술 먹고 자빠졌니?  무슨 멍이 그렇게 크게 들었어?  ㅋㅋㅋ”

B는 흠칫 놀라며 대답을 망설였다. 아니 망설이는 척은 하면서도 내가 멍에 대해 물어보길 기다린 것 같기도 했다.

이내 돌아온 대답은 내 상상과 일치함에도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남친이 때렸어.”

아까는 눈을 의심했는데 이제는 귀를 의심했다. 당시 B양은 한 살 위 남자 친구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그녀의 일상이 그 남자로부터 많은 제약을 받고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사태의 심각성은 멍의 크기보다 훨씬 컸다. 내 눈앞의 멍은 첫 멍이 아닐뿐더러 놀랍게도 남친이라는 것이 B에게 폭력을 가하는 때는 화가 날 때가 아니라 그냥 심심할 때마다였던 것이었다. TV를 보다가도 갑자기 뒤통수를 때린 적이 있는데 B가 깜짝 놀라 왜 때리냐고 따지면 "심심해서"라거나 "왜 내 눈앞에 있어"라고 했단다. 딱히 서로 싸우다가 폭행으로 이어지는 게 아니었다. 심지어 오늘의 멍은 어느 날 B가 만든 찌개가 맛없다는 이유로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이 정도면 보기 드문 미친놈 아닌가? 


잘못되어도 너무 잘못됐는데 이다음이 더 잘못되었다. 그런 정신병자랑 왜 여태 같이 살고 있냐는 내 질문에 B는 소름 끼치는 명대사를 양산했다.

“근데 잘해줄 땐 잘해줘ㅎㅎ”

ㅎㅎ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이건 유행어에 가깝다. 남친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하소연하다가 마지막에 하는 말은 왜 이럴까?


K-드라마의 영향으로 언젠가부터 나쁜 남자의 인기가 높다. 예전에는 여자 친구에게 선물을 건네며 “내 마음을 받아줘. 한 달 월급을 모아서 샀어.”가 통했다면, 지금은 준비한 선물을 휙 던지며 무심히 내뱉는 “오다 주웠다.”가 더 잘 통하기도 한다. 그래 뭐 이 정도는 받아들이기에 따라 매력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주먹을 쓰고 집안 살림을 부수는 남자라면? 과연 그것도 우리가 말하는 나쁜 남자인 걸까?

흔히 말하는 나쁜 남자는 그저 비교적 조금 불친절하고 무심한 척하는 사람쯤이지 데이트 폭력범을 일컫는 게 아니다. 데이트 폭력은 뉴스 등 매체에 심심치 않게 나오면서 이슈가 되고 있다. 데이트 폭력이라는 용어가 생겨났다는 것부터가 안타깝다. 

우리나라의 데이트 폭력에 관한 한 해 신고건수는 약 8천 건이나 된다고 한다. 놀랍지 않은가? 경찰청 통계다. 신고하기를 꺼려하는 숨은 피해자들까지 합치면 훨씬 더 어마어마한 숫자임에 틀림없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그중 폭력을 넘어 죽음에까지 이르는 사람이 1주일에 1명 꼴이라고 발표된 바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피해자들은 왜 사전에 방어하거나 대처를 하지 못할까? 



- 2편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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