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의 아파트란
“아무도 없는, 아무도 없는, 쓸쓸한 너의 아파트”
극 중에서도 울려 퍼지는 이 노래가 있을 만큼, 우리나라에서의 아파트의 의미란 단순한 공간의 의미를 넘어선 지 오래다. 총자산의 100%가 넘어가기도 하며, 임대아파트의 문제, 전세와 집주인의 묘한 경계의 차이. 입주민들과 외부인으로 나뉘어 벌어지는 각종 갈등상황들을 우리는 쉽게 만나볼 수 있다.
굳이 영화가 아니었더라도,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이 상황들에 영화적 상상력과 디스토피아의 극단적 상황이 포함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탄생한 영화가 바로 <콘크리트 유토피아>이다. 영화는 시작부터 배경이 되는 아파트 이외에 모든 것들을 무너트리며 시작한다. 그중 살아남은 단 하나의 아파트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주된 내용으로 진행된다.
한 번 상상해보자.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이외에 다른 아파트들이 모두 무너진다면? 과연 그곳은 유토피아일까 디스토피아일까. 사실 디스토피아에 가까워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폐허로 변해있고, 유일하게 남은 이곳은 사실상 많은 이들의 목표에 가까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반대로 “유토피아”라는 이름을 붙인다. 물론 이는 반어적인 표현일 것이다. 영화는 초반부부터 홀로 살아남은 이 아파트에 몰려드는 외부인과 입주민들의 갈등을 다룬다.
사실 이는 현실로 옮겨봐도 그리 다르지 않다. 현실에서도 택배차를 단지 내에 못 들어오게 하는 문제. 경비원을 상대로 한 갑질 문제. 그리고 외부인과의 마찰문제는 너무나 쉽게 우리 일상 속에 있다. 그렇게 현실에서도 있는 문제들을 좀 더 상상력이 더 해진 영화적인 시선으로 영화는 진행된다. 예상대로 영화는 입주자들끼리 뭉쳐서 외부인들을 쫓아내는 선택을 한다. 이 과정에서 부부이지만 생각이 다른 박서준-박보영 부부의 이야기. 얼떨결에 입주민 대표가 되어버린 이병헌. 그리고 김선영이 부녀회장의 위치에서 아파트 이기주의 표상과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외부인들을 쫓아내는 과정에서 아파트에서 십수 년 일한 경비원도 쫓아내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입주민이냐 아니냐로 편을 가른다. 그 과정에서 이 아파트에 과몰입되어 보이는 입주민 대표 이병헌의 모습이 어쩐지 조금 유난스럽게 다가온다. 그렇게 모든 외부인을 쫓아내고 그들끼리 살아간다. 여기서 우리는 또다시 우리를 대입해 볼 수 있다. 좀비물이나 이런 디스토피아적인 세계관의 영화에서 그 영화의 관객들은 항상 비슷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만약 나였다면?’ 이 질문에서 명쾌한 해답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마 많은 이들이 영화 속 그들과 비슷한 선택을 하게 되리라고 본다.
그렇게 주위를 탐문하며 먹을 것을 구하다 결국 남이 가진 것을 강탈하기도 하고, 본의 아니게 살인도 저지르게 된다. 그 상황에 어쩔 수 없었다는 생각과 그럼에도 그렇게 사는 것이 과연 최선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교차한다. 외부에서는 그 마지막 남은 아파트의 사람들이 식인을 한다느니 하는 이야기도 떠돈다. 이토록 입주민들끼리 뭉칠수록, 결국 외부인들의 시선에도 왜곡이 생기기 마련이다. 현실에서 어떤 아파트 사람들은 어떻다더라 하는 이야기가 오가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영화는 그렇게 그들끼리 어떻게 생존할지 다루다가 이내 반전을 맞이한다. 바로 입주민 대표였던 사람이 알고 보니 이 아파트의 입주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돌아온 옆집 사는 박지후와 평소 그의 행동을 수상하게 여기던 박보영에 의해 밝혀진다. 사실 그의 사정도 안타까운 것이 원래는 그 아파트에 오기로 되어있었지만 그 아파트의 실제 입주민에 의해 사기당하여 그것이 좌절된다. 마침 그 아파트에서 그에게 그것을 따지고, 결국 그 끝에 그를 살해하는 와중에 큰 재난이 발생하게 되어 그곳에 있게 되었던 상황이다.
그렇게 입주민이 되길 원했던 이병헌이었기에, 그가 입주민들의 대표가 되어 외부인들과 싸울 때 더욱 몰입감 있게 그들을 몰아냈을지 모른다. 특히 외부인들을 ‘바퀴벌레’라 표현하며, 그들을 색출해 내고, 그들을 색출해 낸 집에 빨간색 페인트를 바르며 공포스럽게 그걸 묘사하는 부분은, 어쩌면 더욱 외부인이었을지 모르는 그가 입주민이 되었을 때에 잔인함을 더 부각하기에 이른다.
원래 여기에 왔었어야 한다는 그의 외침은 사실 현실세계에서 어떻게든 아파트에 들어가고 싶은 우리와 그렇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전세사기라는 부분도 현실의 부분을 반영해 낸다. 그래서 한국에서의 아파트라는 의미는 정말 ‘유토피아’ 이면서 ‘디스토피아’ 이기도 하다.
영화는 결국 입주민이 아니게 되어버린 이병헌도, 그걸 밝혀낸 박지후도 모두 비참한 결말을 맞으며 끝이 난다. 결국 많은 이들에게 마음을 쓰던 박보영만 외부에서 옆으로 엎어진 집에 살던 이들에 의해 구조되고, 그들과 같이 살아가는 결말을 맞으며 영화는 마무리된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설령 모든 것이 무너진 세계에서라도 우리가 있는 이곳 이외에 다른 곳이 존재하리란 생각을 해봄직하다. 하지만 영화는 아파트라는 한정적인 공간에 많은 이들이 그것에 과몰입해있는 경우 그것을 무시하고 자신들이 있는 그곳을 지키는 데에만 급급하며, 또한 그 안에서 지역적인 이기주의와 우월에 쌓인 모습들을 구현해내고 있다. 앞서 강조한 것처럼, 사실 이건 우리의 다른 모습들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
우리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의 이해만을 따지며, 그것 이외의 것들에는 오히려 무관심하거나 혹은 배척한다. 그것이 아파트라는 공간적인 곳으로 집중되고, 그것이 삶의 터전 이외에 오히려 자산과 투자의 대상까지 되어버리며 우리나라에서의 아파트는 그것 이상의 어떤 것이 된 지 오래다. 누차 강조했듯 주거공간 이상의 의미가 되어버린 그곳에서 그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 많은 이들이 과몰입하고, 그들끼리의 성벽을 두텁게 쌓아 올리는 장면들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다.
그래서 이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오히려 현실에서 자신들의 ‘유토피아’로 생각하며 살고 있는 이 아파트는 사실 그것이 아니라 “아무도 없는, 아무도 없는, 쓸쓸한 너의 아파트”가 된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는 그런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