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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즁 필름 Jan 17. 2024

<괴물> 리뷰

괴물은 누구인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신작입니다. 전작 <브로커>에 대한 개인적인 실망이 컸기에, 이번 작품에 대한 우려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오랜 팬의 자세라면 투수의 실투를 커버하는 포수의 마음으로 차분하게 다음 공을 기다렸습니다.


영화가 개봉하고, 제작진이나 배우가 공개되었을 때부터 신기한 점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각본이 본인이 아닌 “사카모토 유지”였고, 단골손님이었던 칸 시상식에서 다름 아닌 각본상을 수상했던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우리를 떠난 “사카모토 류이치” 의 참여 유작이기도 했습니다. 원래부터 엄청난 연기를 보여준 “안도 사쿠라”까지. 불안과 기대가 공존하는 작품이었지요.


영화를 보고 난 다음에 이 영화가 정말 “괴물” 같다고 느꼈습니다. 관객에게 이야기를 던지는 방식. 아주 촘촘하게 짜인 구성 속에서 많은 관객들이 비슷한 감흥을 느낄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바쁜 나날에 틈에서 영화를 재관람하였고, 평소 잘 손이 가지 않았던 영화글을 쓰는 앱을 켜서 오늘 이 리뷰를 씁니다.


영화의 포스터 이후로는, 이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주의해주세요.

괴물은 없었다.

속임의 3장 구성


영화를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 “속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이런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달한 적이 없기에 적잖이 당황했다. 이야기의 구성을 대략적으로 정리해 보면, 프롤로그-엄마의 이야기-호리 선생님의 이야기-미나토의 이야기의 구성이다. 각 장의 방식은 앞서 보여준 장에서 보여준 어딘가 비어있는 사실들을 관객에게 알려주며, 일종의 반전을 이끌어낸다.


결말까지 본 관객들은 걸스바가 있는 건물에 불을 지른 것은 요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가 가지고 다니는 장난감에서 나는 독특한 소리가 프롤로그에 얼굴이 보이지 않는 소년이 멀리 불이 나는 건물을 바라보며 돌린 그 독특한 소리와 같다는 생각을 하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프롤로그를 보며, 음산한 배경음악으로 시작되는 첫 장에서 관객들은 나무나 자연스럽게 미나토의 이상한 행동에 의문을 품는다. 그것은 철저하게 엄마의 시선으로 미나토를 보게끔 감독과 각본가가 의도했기 대문이다.


어느 날 “돼지 뇌” 농담을 하기 시작하는 아들이 갑자기 자기 머리를 스스로 자르고,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걱정하게 한다. 어머니는 아들을 너무나 사랑했지만 아들을 전혀 알지 못했고, 그 화살을 학교로 돌리게 된다. 누군가가 방화를 한 것 같은 모습. 무언가를 자꾸 숨기는 아이. 아 저 아이가 <괴물>이 된 것일까? 1장의 중반부를 넘어가면 그 괴물은 자연스럽게 호리 선생님이나 학교로 이동하게 된다. “돼지 뇌” 농담을 한 것도 선생님. 그리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해결하려는 마음 없이 그저 영혼 없이 사건을 무마하려고 하는 학교가 바로 <괴물>아 아닐까? 하는 생각. 하지만 이 생각도 갑자기 이전의 이야기로 돌아가 다시 써 내려간 시선에서 이내 뒤집혀 버리고 만다.

이 때 정말 나도 화가 같이 나더라

영화는 갑자기 이전 시점의 화재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면서 앞장에서 펼쳐진 많은 이야기가 뒤집히게 된다. 호리 선생님이 걸스바를 갔었단 소문은 와전된 것이었고, 그가 미나토를 폭행하거나 돼지뇌에 관련한 농담을 한 것 같지도 않다. 실제로 그의 주장대로 미나토는 요리를 괴롭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단계에서부터 관객들은 본격적인 혼란을 경험하게 된다. 아 역시 그렇다면 이 학교, 우리가 사는 이 사회가 <괴물>일까. 아니면 역시 미나토가 <괴물>인 것일까. 억울한 일을 당한 호리선생님의 심정이 되어 그가 되어 학교에 찾아가 옥상 위에 올라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 때즈음 어디선가 들리는 뱃고동 같은 소리에 호리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 글짓기에서 모든 의혹을 한 번에 풀어줄 단서를 발견하게 된다. 뒤늦은 깨달음으로 미나토의 집으로 향해 그를 찾아 나섰지만 거센 폭풍우 속에 미나토는 실종되고 만다. 미나토의 엄마와 같이 그를 찾아 나섰다. 그는 도대체 어디에 있고, 호리가 그를 찾아간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이 둘을 눈치챈건 호리밖에 없었다.

영화는 다시 한번 화재로 돌아오고 이야기가 진행되며 모든 고리가 풀리기 시작한다. 미나토는 요리를 사랑하게 되면서, 그 사랑을 밝힐 수 없음에 속이 아팠고, 그런 행복과 이 세상은 같이 존재할 수 없음에 괴로웠던 것이다. 요리의 성향을 고치기 위해 아버지는 아이에게 병에 걸렸다며 한 이야기가 “돼지뇌”와 관련된 것이었고, 그런 자신의 사랑을 솔직하게 고백할 수 없었던 미나토는 자꾸만 이해할 수 없는 행동과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평범한 가정에서 행복하게 살길 바라는 엄마의 바람을 들어줄 수 없었고, 요리에 대한 마음이 커질수록 불안도 커져만 갔다. 둘이 폐열차에서 “괴물은 누구?” 게임을 할 때 둘은 무엇보다 행복했지만, 그 행복은 어쩌면 잘못되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리를 같이 괴롭히기도 하고, 밀어도 내봤지만 그건 잘 되지 않았다. 그 둘의 공간이나 이야기가 펼쳐질 때 슬며시 나도 관객들도 생각하게 된다. 

둘만 있을땐 참 행복한데 말이지

이 영화 안에서 괴물은 없었다는 것을. 누군가를 쉽게 괴물처럼 생각하게 하고, 그런 게으르게 많은 걸 판단하는 마음 자체가 우리가 가진 우리들의 마음이 괴물은 아니었을까


인물의 이야기


이 이야기에 주요 등장인물은 많지 않다. 미나토, 요리, 호리선생님, 엄마, 그리고 교장선생님이 주요 인물. 고레에다 히로카즈감독의 영화답게 모두들 호연을 펼친다. 특히 아이들의 명연기가 일품인데, 각 인물들이 나타내는 감성들을 주요 포인트로 언급해보고 싶다.

이런 눈빛은 도대체 어떻게 디렉팅하는 것일까

미나토


가장 혼란스러우면서도 분명한 아이다. 남모를 고민에 빠진 그는 자신의 사랑을 지키는 것 이외에 모든 것을 던지는 인물로 묘사된다. 요리가 돌리던 장난감을 같이 돌리고, 돼지 뇌 농담을 들은 요리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리고 그것을 몰라주는 이들에겐 거짓으로 대한다. 가장 가까운 인물인 엄마에게, 그리고 가장 편할 수 있었던 존재인 호리선생님에게 조차 말이다.


그만큼 그는 자신의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가 불행을 내포하고 있다고 믿으면서, 그런 혼란을 모두 감내한 체 요리를 선택한다. 영화의 모든 내용을 알고 나서 영화를 보다 보면 알 수 없는 불안과 혼란이 내내 이 아이를 지배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사랑하는 이를 잃는 꿈을 꾸면서 사랑을 하는 아이. 요리를 기다린 장소에 엄마가 나타나, 그를 데려왔을 때 걸려오는 요리의 전화에 망설임 없이 차문을 열던 그 아이의 사랑은 참 용기 있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가진 그가 결국 마음이 통해 열어낸 진실은 처음엔 호리 선생님에게 내비치고, 나중엔 교장선생님을 만나 호른을 분다. 그 호른의 소리가 마치 코끼리의 울음소리 나 뱃고동 소리로 들리는 것은, 그가 가진 비밀의 무게와 깊이를 짐작케 한다. 

참 맑고 순수해보이는 요리

요리


물처럼 잔잔하지만, 그 깊은 아픔을 자신으로 덮은 아이. 그는 괴롭힘 당하는 순간에도, 그렇게 괴롭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자신의 가족에게 큰 상처를 받은 뒤였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자신을 “돼지 뇌”를 가진 병에 걸린 아이로 말하고, 그것 때문에 어머니가 떠났다 믿고 있다. 그렇지만 이 맑고 투명한 물 같은 묘사에 오히려 그 처연함의 깊이를 더한다. 마치 심해를 보는 듯하다. 


이 처럼 물 같은 아이가 걸스바에 불을 지른 것을 보면, 그 아픔의 깊이가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아버지로부터 온갖 가스라이팅과 괴롭힘을 당했을 것을 가늠케 하기도 하지만, 천진하게 장난감을 돌리며 프롤로그를 지나쳐갔던 것을 생각하면, 그것이 어떤 잘못인지 모르고 있을 가능성도 크다. 마치 물에 영양제를 넣으면 이롭고, 독약을 넣으면 해롭게 되어버리듯 말이다.


항상 다시 태어나길 바란다고 말하는 이 아이의 말은 우리에게 아픈 감성을 전달한다.

안도 사쿠라 연기는 정말 대단하다

미나토의 엄마


이토록 애타는 사랑이 있을까. 그것은 현재를 같이 살아가는 많은 모자관계와 닮아있다. 엄마의 시점으로 영화를 보다 보면 그 애처로움이 눈에 밟힌다. 이상한 행동을 하는 미나토에게 차마 이유를 말하지 못하고, 어떻게 물어야 아이가 상처받지 않을지를 먼저 고민하는 그녀의 모성은 관객들의 마음에 닿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 모성의 양면이랄까. 그녀는 아들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평범한 가정에서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이 아들에게 어떤 말로 들렸을지. 사랑하는 이의 꿈에 남자아이가 나왔을지. 야밤에 갔던 터널에서 아이를 구출하듯 꺼내왔을 때, 그것은 사실은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렸던 순간인지. 보도블록에서 떨어져 ‘앗 지옥이다’라는 말이 어떻게 들렸을지 말이다.


어머니가 정해놓은 선들 모두를 미나토는 힘겨워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고민을 쉽게 털어놓지 못했을 것이다. 아들을 사랑했기에, 아들 이외의 것들을 모두 의심해 결국 호리 선생님을 곤경에 빠트리기도 한다. 하지만 나도 관객도 모두가 알고 있다. 그것이 악의가 아니었음을. 진정으로 어머니로서 사랑하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말이다. 그것이 모성이 가진 어떤 잔인한 측면이기도 하다.

그도 분명 어떤 사연이 있었으리라

호리 선생님


그는 어딘가 착하지만 어딘가 비어있다. 그의 유일한 취미는 책의 오탈자를 찾아내 제보하는 것이었고, 연인에게도 의지 없이 차이며, 학교에서도 별다른 저항을 해보지 못한 상태로 억울하게 몰린다. 이 부분에서 주요 등장인물 중 비슷한 인물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바로 이름이 비슷한 요리다. 요리는 물 같다면, 호리 선생님은 물에 이미 무언가 섞인 모습이다. 아니면 조금 더 사회화가 된, 어른으로서의 요리 같은 모습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묘하게도, 그 둘의 사이를 눈치챈 것은 호리가 유일했다. 그들이 써낸 장래희망 글짓기에서 서로에 대한 메시지를 읽어낸 것은 그가 평소에 가진 그 쓸모없는 취미 덕분이기도 했지만, 그것을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그들과의 나름의 동질성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그가 가진 착한 심성을 나타낸 부분이기도 하다.


그랬던 그가 학교에서 사람들의 소문과 분위기에 이끌려 아무것도 못하는 모습은 마치 아이들에게 심한 장난을 받으면서도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는 요리와 비슷해 보이기까지 한다. 심지어 둘 다 아무런 잘못도 없었던 행동에 대해 받고 있는 괴롭힘이라는 점에서 특히나 말이다.

분량 대비 가장 임팩트 있었다

교장선생님


주요 인물로 설명하기에 무척이나 분량이 적지만, 나올 때마다 많은 감성과 임팩트를 주는 인물로 묘사된다. 손녀딸의 교통사고로 교직에서 잠시 쉬었던 그녀의 심정은 어떨까. 처음 그녀가 관객에게 주는 인상은 흡사 감정을 잃어버린 사람이란 느낌이 든다. 미나토의 어머니가 학교에서 그렇게 항의해도 감정의 동요도 없고, 마트에서 시끄럽게 뛰어다니는 아이의 발을 넘겨 트리는 일도 하고. 호리의 억울함에도 전혀 미동이 없기도 하고, 요리에게 발화장치를 다시 돌려주는 모습까지도.


그러다 그녀의 반전을 이끄는 두 가지 중요한 장면이 나오는데, 남편과의 교도소 면회와 미나토와 호른을 부는 장면이다. 남편과의 대화에서 손녀딸의 죽음은 남편이 대신 덮어쓴 거라는 소문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 감정을 가진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까지 감정을 나눠주기란 사실 쉽지 않다. 어딘가 깊숙한 곳에 감정과 공감을 봉인해 놓을 수 있는 일로 까지 생각되기까지 한다.


그러다 미나토와 호른을 불 때 “행복이란, 모두가 가질 수 있는 것”이라는 말을 할 때, 교장선생님도 말하지 못한 못다 한 비밀이 감정적으로 나오는 것을 억누르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이었는지 관객으로 끔 알게 한다. 마치 미나토의 요리의 관계를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어서, 거짓말과 거짓 행동으로 모두를 속이는 것처럼, 교장선생님 또한 그런 인생을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한다. 


괴물은 누구? 라는 물음이 이렇게 천진했을 줄이야


결말


폭우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 미나토와 요리를 찾아 나선 호리선생님과 엄마는 둘만의 아지트였던 폐열차를 발견해 낸다. 폐열차는 이미 그들의 생사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태. 그 둘이 다급하게 유리문을 닦아보는 상황이 마치 관이나 땅속에서 그 위를 바라봤을 때를 상상하게 한다. 


그러다 영화는 그 둘이 터널 안으로 다시 돌아와 맑아진 하늘과 싱그러운 숲 속에서 행복하게 달려 나가는 그 둘을 묘사한다. 그리고 그동안 닫혀서 들어가지 못했던 문을 열고 활짝 웃는다. 둘이 달려 나가는 곳은 그들이 겪었던 것들이 아닌 마치 다른 세계인 것처럼 너무나 밝다.


이 결말을 두고 어느 것이 정확하다는 것은 사실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내 생각으론 좀 더 슬픈 쪽에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그들은, 특히 요리는 항상 다시 태어나길 바라는 것 같은 이야기를 해왔고, 영화의 연출도 극심한 폭우에서 갑자기 개인 하늘. 그리고 미나토가 말한 자신에게 행복이 없음에 항상 시무룩한 모습에서 그렇게 밝게 뛰어가는 모습에서 우리는 지금의 세계가 아닐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시퀀스만 유난히 연출이 다르다

물론 그 장면은 그런 고난을 뛰어넘은 미나토와 요리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극 중 현재의 모습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질문은 결국 “괴물은 누구인가”라는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오게 된다. 영화는 종반부를 제외하면 아이들의 천진한 미소를 찾아내기 힘들다. 둘이 함께 하는 순간에도 자신이 가진 이 감정에 대해 불안함을 가지고 있고, 그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그러던 그들의 행복해지는 것에 어색함을 느낀다면, 오히려 그런 걸 어색하는 사회나 우리의 분위기가 바로 괴물은 아닐까 하는 물음을 던지고 있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마치 내가 <괴물>이라는 영화를 보며 바로 “괴물 찾기”에 바로 매달렸는데, 아이들은 기차 안에서 “괴물은 누구?”라는 게임을 하며, 괴물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그렇게 심각하게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 것과 너무나 상반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괴물은 찾아서 없애거나, 혹은 멀리해야 한다고 생각한 반면, 오히려 스스로가 마치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인식아래, 괴물이라는 것조차 친숙하게 표현해 낸 아이들과는 너무나 다르다.


이 다른 점이 주는 질문이 너무나 깊고 좋은 질문처럼 느껴진다. 결국 누구도 괴물은 없었다. 제목이 <괴물>인 영화를 보며, 가장 떠올리기 힘든 그 사실이 영화를 보고 난 뒤, 류이치 사카모토의 <Aqua>가 흘러나오면서 계속 생각을 되네이게끔 한다.

몇몇 사람만 가질 수 있는 건 행복이라 부르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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