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원더풀 라이프>엔 림보가 등장한다. 림보란 '구약 시대의 조상들이 예수가 강생하여 세상을 구할 때까지 기다리는 곳'.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유아의 경우처럼, 원죄 상태로 죽었으나 죄를 지은 적이 없는 사람들이 머무르는 곳'. 여기까지가 림보의 사전적 의미. 영화 <원더풀 라이프>는 '죽음을 맞이한 인간이 그다음 세상으로 넘어가기까지 머무르는 곳'이라 설정한다. 선과 악의 경계는 존재하지 않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가상의 시공간. 천국의 입구다.
림보에 머물 수 있는 기간은 단 일주일. 망자들에겐 과제가 주어진다. 가장 소중했던 추억을 딱 한 가지만 꼽아내는 것. 그들이 고른 추억은 세트장으로 재현되어 영상에 담긴다. 마지막날, 영상을 시청하며 자신의 추억을 선명하게 떠올리는 순간 망자는 자리에서 사라진다. 그다음 세상, 천국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죽음을 맞이하면 가장 행복했던 추억만 가지고 떠날 수 있다는 설정인 셈이다.
그중 니시무라 키요라는 할머니가 등장한다. 어림잡아 여든 살 조금 넘어 보이는데 스물한 명의 다른 망자들과 달리 그녀는 말이 없다. 그저 말없이 허공을 바라보는가 하면 숲 속을 돌아다니며 도토리나 낙엽 같은 것을 주워다가 책상에 하나씩 올려놓기만 한다. 직원이 뭘 물어봐도 듣는 둥 마는 둥. 이에 직원은 매번 곤란한 모양새다. 수차례 상담을 진행하던 담당자는 어느 날, 그녀가 알츠하이머를 앓은 채 세상을 떠났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림보의 직원들에게 해당 사실을 공유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영화가 알츠하이머를 표현하는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니시무라 키요 씨는 살아계실 때 이미 추억을 선택하셨더라고요. 저도 처음엔 몰랐는데, 가만 보니 아홉 살 때 기억으로 살아가시는 것 같더라고요."
살아오며 가장 행복했던 추억을 선택하는 일. 나머지 모든 기억을 잃는다해도 돌아가고 싶은 순간. 영원히 살아가고 싶은 기억. 누구나 림보에 도착하면 해야 할 선택을, 그녀는 단지 조금 일찍 했을 뿐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