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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Jun 15. 2024

소설반에서 일어난 일

요즘 소설반에서 합평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

‘남의 글을 보면 허점이 잘 보이는데 내가 쓰는 건 어렵다’는 말에 나는 공감하기가 어렵다. 소설은 작가주의가 가장 빛나는 장르인 만큼 어떤 형식도 규제가 가해져선 안 된다고 생각해서였다. 실제로 수강생들이 써오는 글은 다 그럴듯해 보이고 잘 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건 나의 나이브한 생각이었을 뿐이고. 소설엔 개연설, 필연성, 핍진성이 기본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걸 서서히 알아가는 중이다. 합평의 취지는 비단 작가를 격려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점, 문제점을 지적함으로써 작가의 글을 더 나아가게 만들기 위함이라는 데 있다. 그러니 나처럼 마냥 장점만을 발견하는 일은 정작 작가들이 원하는 지점 또한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지난주엔 한 수강생이 써온 4장짜리 단편소설을 두고 고민이 길어졌다. 그의 문체는 이청준, 주요섭의 초기 소설과 가깝다고 느껴질 정도로 내겐 완벽했기에. 1960년대를 배경으로 혼례날 신랑이 신부 측 친척들로부터 발바닥을 맞다가 (예전엔 그런 문화가 있었다) 참다못해 성을 내며 문을 박차고 나가는 내용이었다. 내게도 어릴 적 기억으로 자리 잡은 풍경이었기에 익숙하고도 유쾌한 마음으로 읽어 내려갔다. 다만 내 기억 속 친척들은 다들 웃는 얼굴이었는데, 소설 속 주인공은 뭐가 그리 못마땅하길래 문을 박차고 나갔을까, 의아했을 뿐.


준비해 간 비평은 대강 이런 식이었다. ‘잘 읽었습니다. 제 기억 속에도 익숙한 풍경이라 즐겁게 읽혔습니다. 다만 제 기억 속 친척 어르신들은 아무리 발바닥을 맞아도 좋은 날인만큼 하하 호호 넘기는 분위기였는데, 소설 속 주인공이 욱해서 문을 박차고 나갔다는 지점에서 조금 의아했습니다. 그는 뭐에 그렇게 화가 났을까요?' 어디까지나 '나의 경험'을 토대로 '나의 관점'에서 끌어낸 이야기.


스스로 생각해도 비평의 근거가 조금 모자란듯해 꺼내려다 말았다. 그런데 마침 선생님이 같은 지점을 언급하시는 게 아닌가. ‘소설 속 주인공이 화물차 운전기사로 평생 혼자 일을 하다 보니 사교성이 부족하다는 설정이 있다. 그럼에도 발바닥을 맞아 욱하는 건 개연성이 떨어진다. 주인공이 어떤 성격인지 아직 와닿지 않으니 좀 더 설명이 필요하다.'


비평은 그렇게 하는 것이었다. 어디까지나 소설 속 설정만을 가지고. 소설에서 이루어지는 시작과 끝을 벗어나지 않는 범주에서.


곧잘 수업에서 등장하는 비평의 문장들은 대개 이렇다. '작가님은 피해자였던 경험이 있나요?' '제가 이런 일을 비슷하게 겪어봤습니다만' '제가 겪은 바와 다릅니다만'. 소설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려고 하는 시도. 그 기저엔 '나는 여기까지 경험했지만, 너는 부족한 것 같은데'라는 심리가 깔려있음을 안다. 희미해서 스스로만 못 알아차리고 있을 뿐.


소설 쓰는 법을 배우려고 등록한 수업이지만, 그 이상의 것을 배우고 있다. 선생님이 건네주는 비평은 언제나 날카롭고 우아하고 따뜻하다. '나'를 드러내려 함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그럼에도 그의 비평은 언제나 가장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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