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세이건 <창백한 푸른 점>을 읽고 - 요약과 주석을 함께
우리는 애초부터 방랑자였다. 인류는 살아온 시간의 99.9퍼센트를 대초원에서 사냥거리와 먹거리를 찾아다니며 방랑자 노릇을 했다. 더 나은 곳으로의 이주를 위한 탐험과 개척 의지는 어느 한 나라나 민족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지니고 있는 천부적 특성이었다. 강물의 폭보다 넓은 것을 건너보지 못했던 어느 누군가는, 바다 건너 대륙에 대한 동경만으로 신세계로 향하는 배에 올라탔다. 오늘날 우리 역시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고자 했던 그 누군가와 마찬가지로 태양계를 가로질러 별들의 세계로 우주탐사선을 보내고 있다. 다만, 그 깜깜한 망망대해를 건너 존재하는 별들의 세계에는 아직까지 어떠한 생물의 존재도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우주 탐험과 개척에 지혜를 더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탐험에 관해 쓰인 책이다. 다른 세계들, 거기서는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지구를 떠난 우주선은 수많은 행성과 위성들을 탐사하였다. 아폴로 17호의 우주비행사가 달로 가는 도중에 찍은 지구 사진은 어렸을 적 우리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던 지구본과 완벽하게 닮아 있다. 그런데 이 사진에서는 인간이 지구 표면에 가했던 작업의 흔적, 혹은 인간이 만든 기계 등 그 어떠한 인간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지구와 달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인간의 존재를 느끼기에는 우리 인간이 너무나 미소하고 미약하기 때문이다. 지표에 붙은 얇은 생명의 막을 걷어내면 가끔 비행기나 전파잡음의 공간전기만 남을 뿐, 인간이 우주에 미치는 영향은 전혀 없다. 우주는 인간의 흔적조차 모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우리의 출생, 즉 우리가 인간이고 지구 위에서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 스스로를 우주의 주인공으로 상정하는 오류를 범한다. 이러한 오만함은 인간이 신의 모습을 닮았다는 생각에서 절정에 달한다. 칼 세이건은 이를 인간 중심적(anthropocentric) 과신이라고 부른다.
다시금 더욱 넓은 우주 공간에서 보면, 우리의 지구는 미약하게나마 창백한 푸른 점을 내뿜고 있을 뿐이다. 지구는 광대한 우주의 무대 속에서 하나의 극히 작은 무대에 지나지 않는다. 이 조그만 점의 한구석의 일시적 지배자가 되려고 장군이나 황제들이 흐르게 했던 유혈의 강을 생각해 보라. 또 이 점의 어느 한구석의 주민들이 거의 구별할 수 없는 다른 한구석의 주민들에게 자행했던 무수한 잔인한 행위들, 그들은 얼마나 빈번하게 오해를 했고, 서로 죽이려고 얼마나 날뛰고, 얼마나 지독하게 미워했던가 생각해 보라. 우리의 거만함, 스스로의 중요성에 대한 과신, 우리가 우주에서 어떤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망상은 이 엷은 빛나는 점의 모습에서 도전을 받게 되었다. 우리 행성은 우주의 어둠에 크게 둘러싸인 외로운 티끌 하나에 불과하다.
우리의 지구가 그저 창백한 푸른 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엄청난 격하(Great Demotions)>, 즉 인간이 하찮은 존재임을 알려주는 것으로서 우리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다. 이것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님을, 즉 태양의 중력에 의해 뭉친 거대한 집단 속 외로운 별 하나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 과정에서, 아마도 수천억을 헤아리는 수많은 은하들, 즉 저마다의 태양을 포함하는 또 다른 우주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과정에서 더욱 깊어졌다. 그러나 동시에 우주는 우리 인간이 만물의 기준이 아니며, 상상 밖의 불가사의가 존재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이처럼 우주과학은 인간의 자아의식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이 성숙과 고난의 과정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모든 문제의 원인을 '과학'에 둔다. 그러나 눈앞에 놓인 명백한 과학적 증거를 외면하는 것, 그래서 논의를 더 나은 방향으로 확장시키지 못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만약 우주 안에서 우리가 어떤 자리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알고 싶다면, 그래도 우주의 목적을 갈망한다면, 우리 스스로 보람 있는 목적을 찾아 나서야만 한다.
책에서는 보이저 탐사, 로봇과 인간의 협력 등 과학 기술의 발전과 함께 지구의 기원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한 천체로의 항해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인상 깊었던 부분은 토성의 위성 타이탄(Titan)의 탐사 과정이었다. 타이탄은 태양계 안에서 지구의 시초를 연구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천체라고 한다. 비록 타이탄은 극도의 저온, 즉 영하 약 180도나 된다는 점에서 원시 지구와는 다르지만, 수소가 풍부한 대기를 보유하고 있고, 생물을 구성하는 유기물질을 대량으로 생산하고 있는 천체이다. 이 밖에도 태양계에서 가장 이상한 모양새와 기원을 가지고 있는 천왕성의 위성 미란다(Miranda)와, 해왕성 집단에서 제일 큰 위성인 트리톤(Triton)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감명 깊은 부분은, 그곳이 우주의 어떤 별이었건 간에 상관없이 저자 칼 세이건은 새로운 생명체에 대한 기대감을 저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는 증거의 부재를 부재의 증거로 치환하지 않는다. 만약 어떠한 행성과 위성에서 생명체가 살 수 없다는 의견에 동의한다면, 그는 그만큼 확실하고도 정확한 증거를 나열한다. 그리고 그마저도 우리는 아직 우주에 대해서 많은 것을 모르고 있다는 말로 끝맺음한다. 그가 모른다고 하는 것은 자신감이 부족한 데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모르는가를 정확하게 인지하는 것은 다음에 답해야 할 질문이 무엇인가하는 물음으로 귀결된다. 또한 태양계 밖 미지의 은하수 탐사의 가능성은, 외계 생명체가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믿음에 오히려 불을 지펴주는 어떤 것이라서, 칼 세이건의 "모른다"라는 말은 내게 곧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와 같은 자신감을 담고 있는 듯 느껴졌다.
우리 은하 안에 혹은 다른 은하 간 외계 여행을 하는 다른 문명이 존재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들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지적 생명체를 찾아 탐사를 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들은 우리의 창백한 푸른 점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 지구의 첫인상은 흰 구름, 흰 극관, 갈색의 대륙, 지표의 2/3을 덮고 있는 푸르스름한 물질들일 것이다. 만약 적외선을 측정하면, 대부분의 위도는 어는 점 이상이고, 극관이 어는 점 이하인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지구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면 짙은 대기의 운동을 볼 것이고, 그보다 조금 더 망원경을 당기면 그제서야 문명의 흔적인 직선, 정방형, 사각형, 원들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외계 탐사대원은 지구의 대기 중으로 해마다 메탄이나 기타 온실가스가 꾸준히 늘어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남미 대륙의 거대한 열대림에서는 날마다 수천 곳에서 불길이 보인다. 외계 탐사대원이 지구를 관측하는 수십 년 동안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각해진다. 혼란스럽다. 무슨 생물이건 간에 지금 지구를 우점한 생물들은 지구 표면을 개발하는 데 그렇게도 많은 공을 들였건만, 그와 동시에 그들의 오존층과 산림을 파괴하고 표토를 흘려버리고 있으며 그들 행성의 기후에 통제하지 못할 묵직한 실험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닫지 못했는가? 아마도 이쯤이면 외계인 탐험가는 지구에 지성이 있는 생물이 있다는 추측을 재고할 때가 왔다고 생각할 것이다.
국가 간의 대립과 증오로부터 착상된 우주 비행은 곧 놀라운 초국가적 전망을 가져왔다. 바로 우리는 상처받기 쉬운 행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 창백하고도 푸른 지구는 그곳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인간들에 의해 스스로 자멸하거나, 혹은 20만 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거대한 운석의 충돌로 그 위에 살아가고 있는 생명의 존재를 위협당할 위기에 처해있다. 바로 이 점에서 비교 행성학의 입지가 빛을 발한다. 다른 행성들은 지구에 가해져서는 안 될 만행에 관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는 것. 즉, 생명체가 살고 있지 않은 이웃 행성을 연구하여 지구의 미래를 경고할 수 있다. 원시 지구의 환경에 가깝도록 되돌리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에 우세한 몇몇 나라의 협력만으로는 부족하다. 지구 대기를 떠돌고 있는 분자들이란 주권이라는 것을 주장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 세계와 다른 세계를 연구한다는 일은, 바로 그 특성 때문에, 지역이나 국적의 배타성을 초월해야 한다.
머지않아 인간이 우주 공간으로 진출하는 데 있어 다음 차례의 큰 한 걸음을 뗄 것이다. 만약 당신이 젊다면, 당신 생전에는 지구 근접 소행성과 화성에 인간의 첫발이 내디뎌지는 정도가 가능하다. 그러나 외계 공간에 마침내 거주할 수 있는 자들은 현재의 우리 관습과 사회 전통과는 다른 모습의 인간일 가능성이 크다. 그들은 우리가 가진 장점은 더 많고 약점은 더 적을 것이며, 우리가 진화했던 곳과 비슷한 환경으로 되돌아간 종으로, 보다 자신이 있고 앞날을 예견할 수 있고 능력 있고 신중한, 우리가 우주에서 우리를 대표할 만하다고 원할 만한 종이다. 그들은 별들 사이의 막대한 거리를 탐험하여 은하 간 공간에 자리를 잡고 다른 은하들을 발끝으로 돌아다닐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그토록 찾기를 바랐던, 다른 은하수에 거주하는 지적 생명체들과의 만남에서 지구의 역사라는 거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리라. 어쩌면 우주 공간에 존재하는 생물체의 종류는 현재의 지구 위에 서식하는 생물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해서, 우주의 지식을 새롭게 배우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할지도 모른다.
태양계와 그 너머 곳곳의 여러 세계들에 안전하게 흩어져 있을 우리의 먼 후손들은, 그들이 공유한 유산, 그들의 고향 행성에 대한 관심, 그리고 우주를 통틀어 다른 생물은 몰라도 인류만은 지구로부터 유래했다는 인식으로 한 가족이 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밤하늘을 우러러 창백한 푸른 점을 찾아내려고 애쓸 것이다. 그것은 비록 보잘것없는 나약한 존재에 지나지 않으나 그들은 사랑하여 마지않으리라. 인류의 모든 능력이 담겨 있던 그 그릇은 한때 얼마나 깨지기 쉬운 것이었던가, 인류의 어린 시절은 얼마나 위태로웠으며, 인류의 시작은 얼마나 초라했으며, 제 길을 찾아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강을 건너야 했던가, 그 사연 모두에 그들은 경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