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없어], 키티 크라우더 글/그림, 이주희 옮김, 논장
글을 잘 쓰기 위한 100일간의 챌린지
'그림책에서 첫 문장을 빌려오다'
오늘은 [나와 없어]에서 영감을 받아 글을 써 보았습니다.
여기, 있는 건 없어.
그래, 있는 건 나야. 없어와 나.
없어는 이름이 없어야.
없어는 나하고 같이, 내 곁에 살아.
태어나자마자 생사를 오고 간 동생 덕에, 세상에 나온 지 1년이 채 안돼 죽음을 생각했고 동생을 간호하기 위해 나를 큰집에 두고 간 부모님 덕에 상실을 경험했다. 부재는 그렇게 내 불안감의 근원이었고 엄마는 나의 불안감을 잠재우는 유일한 존재였다.
내 나이 23살 때 암 4기 진단을 받은 엄마 덕에 불안감을 가려둔 얇은 막이 걷히고 다시 또 홀로 남겨질 거 같다는 불안이 나를 삼키려 다가오고 있었다. 엄마의 투병 생활 8년 간 죽음, 상실, 부재, 이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됐다 싶었는데, 현실은 상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고 또다시 8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그때의 감정을 언어로 옮길 수가 없다. 내가 알고 있는 단어들로 표현할 수 없어서, 생각을 정리하러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아서다. 그렇게 그곳에 내 감정들은 쌓여있다. 정리됐다 생각했는데, 무뎌져 있었다.
낮에 한창 바쁘게 일하고 있었는데 옛 친구의 부고를 들었다. 30대 후반, 돌이 안된 둘째 아이를 둔... 아직도 소녀 같은 미소를 간직한 사람. 그 사람이 오늘 죽었다고. 젖먹이 아이를 두고 떠났다고 한다.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어차피 죽는데 왜 살아가는가? 신은 존재할까? 있다면 도대체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거라 생각해 묻어둔 질문들이 고개를 든다. 한병철 작가는 <에로스의 종말>에서 ‘모순을 자기 안에 품고 견딜 수 있는 힘을 지닌 것만이 살아 있을 수 있다.’고 했는데, 어쩌면 나는 살아남을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여기, 그녀는 없어.
그래, 있는 건 나야.
없어는 이름이 없어야.
없어는, 부재는, 죽음은, 사라짐은 나하고 같이, 내 곁에 살아.
내 옆을 줄곧 따라다니는 죽음의 그림자를 느끼며,
있음과 없음, 무와 무한대 사이에서
연약하고 작은 나는 얄팍한 현실을 움켜쥐며 살고 있다.
[나와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