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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진 Jun 28. 2017

그리고, 아테네 / Ep. 04

[아고라의 흔적]















오늘은 아고라

- 소매치기는 알아서 조심하기로



나 홀로 여행의 마지막 날이었다. 아마도 내일부터는 남편도 일정을 끝내고 이 여행에 합류하게 될 것이므로 정처 없이 걷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었다. 여행객에게 있어 마지막 날이라는 개념은 없던 힘도 쥐어짜게 하는 원동력이므로 그 힘에 기대어 숙소를 나왔다. 그래서 갈 곳은 '플라카지구'와 '아고라'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고라'를 가고 싶었는데 아고라 가는 길에 아테네의 번화가인 '플라카지구'를 지나야 했다. 플라카지구에는 소매치기가 많기로 유명해서 그동안 시치미 뚝 떼고 발걸음도 안 했건만... 울며 겨자먹기로 겁쟁이처럼 슬금슬금 발걸음을 끌어갔다.





막상 들어가 보니 상점이 즐비했다. 공예품들과 신들의 두상을 표현한 미니어처 등이 흥미진진하다. 남대문 화방상가에나 가야 볼 법한 두상들이 이렇게 한 곳에 모여있으니 흥미로웠다. 브론즈와 석고 등 다양한 재료로 표현된 신상은 가격 또한 천차만별이었다. 플라카지구에서 필요한 것은 바로 '흥정'이다. 가격표가 없는 모든 제품, 어쩌면 가격표가 붙어있는 제품까지도 장사꾼 마음대로 받는 이 곳의 문화는 나에게 합리적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선천적으로 흥정엔 소질이 없던 나는 과감히 마음을 접고 눈으로만 만족한 뒤 아고라로 향했다.








스타벅스

- 반갑다.



아고라로 걷는 데 반가운 그곳! 스타벅스가 보인다. 아테네에는 스타벅스가 없다 해서 단념하고 있었건만 이렇게 길 모퉁이에서 보니 반갑다. 타국에서 마주한 초록색의 사이렌은 늘 나에게 안정감을 준다. 특히 이렇게 사방에 위험요소가 있는 곳이라면 더 그렇다. 일단 들어가자. 아고라에 대해 정보도 살펴보고 커피도 한 잔 할 겸... 안에서 바라보니 햇살이 좋다. 스타벅스 안을 듬성듬성 메운 사람들 사이로 짱짱한 햇살이 관통한다.





커피를 홀짝이며 로만 아고라(Roman Agora)의 위치를 본다. 로만 아고라는 지금의 플라카지구와 그 모습이 닮아있다. 로마 초기에 생성던 로만 아고라는 시장과 집회장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고대 아고라(Ancient Agora)보다는 다소 규모가 작다. 먼저 여기에서 가까이 있는 로만 아고라를 가보고 그 뒤에 고대 아고라를 찾아갈 수 있으면 가기로 결정했다.








흔적

- 로만 아고라



로만 아고라 입구가 보인다. 아크로폴리스 관람 당시 사두었던 통합권을 내밀어 입장했다. 로만 아고라로 들어오는 입구가 사방에 서너 개는 되어 보이는데, 문을 열어주는 곳은 한 곳뿐이다. 그럼 다른 입구에는 사람들이 왜 있는 건지 이해가 안 되었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아고라 안에 있으니 여행객들이 펜스 너머로 입구가 저쪽이냐고 손짓으로 물어오기도 했다. 입구인 듯 입구 아닌 입구 같은 입구를 만들어뒀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고라 안에 들어오니 소꿉놀이가 생각난다. 어린시절 철봉 아래에 집 문을 만들고 그 뒤로 흙이나 돌을 쌓아 안방도 만들고 주방도 만들고 했던 그런 장면이 갑자기 떠올랐다. 물론 그 장면에선 나와 내 가족의 공간에만 공을 들였지만 이들은 공동의 공간을 정교하게 구성했다. 또 한 가지, 나는 얼기설기 만들어 집이 그 모습이었다지만 로마인들은 잘 지어놓고 전쟁통에 날려먹어 지금의 이 모양이 되었다는 것도 엄청난 차이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지금의 아고라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계속 건물을 복원하는 과정이라 주변에 무성히 흩어진 돌덩이들과 그 돌덩이들이 쌓이기를 기다리고 있는 각 구역들이 전부다. 다만 이런 구역들을 보고 과거에 소꿉놀이하듯이 '여기선 이런 걸 했고 저기선 저런 걸 했다더라.' 수준의 상상만으로 이 곳은 깨나 복작대는 곳이었음을 짐작할 뿐이다.








바람신의 탑

- 그들이 나눈 세상



이렇게 폐허가 된 와중에 유일하게 그 형태를 온전히 갖추고 있는 건물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람신의 탑'이다. 총 8개의 면으로 되어있는 이 건물은 해시계와 물시계, 풍향계의 역할을 했다고 한다. 각 면에는 바람을 대표하는 신들이 조각되어있다. 우리나라에선 1434년 세종의 왕명으로 장영실, 김조, 이천이 함께 자격루를 만들었다는데 기원전 1-2세기부터 이런 측정기구를 시장통에 고안해 낼 수 있었다는 게 참신하다.


갑자기 문득 이  탑 앞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세상을 나누는 데 선천적인 재능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어떤 기준으로 나눠둔 시간의 변곡점들이 이어져 1년이 되는 것도 그렇고 그냥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하루의 시간들이 어둠과 빛에 의해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지는 것도 그렇다. 더욱이 현대에는 더 정교하게 100만 분의 1초(마이크로초), 10억 분의 1초(나노초)까지 나누고 있으니 더 그렇다. 생각해보면 분쇄되는 것이 시간 만의 일은 아니다. 나를 비롯하여 모든 이들이 사상, 지역, 빈부, 문화에 이르기까지 본인을 둘러싼 세계를 계속 나누고 있으니 그 이유가 문득 궁금했다. 이렇게 나눠서 뭐하려고? 이 물음은 보통 사람들이 언제 나눈다는 표현을 쓰고 싶어 하는지 생각하게 만들었다.





'나누다'라는 표현을 사람들이 언제 쓸까. 나와 타인을 '가른다'는 것을 표현할 때, '함께'하는 어떤 행위를 의미할 때 사용하기도 한다. 모순되지만 가령 술 한 잔, 슬픔, 기쁨을 함께 공유할 때도 우리는 '나눈다'라고 한다. 여기에 생각이 닿을 즈음 다시 바람신의 탑을 바라보며 안도했다. 고대부터 인간이 숱하게 세상을 나눠온 이유는 '내 것과 네 것을 위한 갈등'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잘게 조각난 찰나조차 함께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믿고 싶다. 같은 시기에 수확의 기쁨을 함께 누리고 가뭄의 고통을 같이 이겨내고자 하는 마음이 나누는 행위의 목적이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로만 아고라를 나왔다. 고대 아고라를 넘어가려니 시간이 여의치 않아 단념하고 담장 너머로 슬금 구경만 하고 내려왔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셔틀버스 정류장 맞은편에 홈메이드 샌드위치 집이 있었다. 며칠 전 이 샌드위치 집주인에게 길을 물어본 적이 있다. 그때 친절하게 대해줬던 것도 기억나고 저녁도 해결할 겸 샌드위치 가게로 들어갔다. 가게 주인이 날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샌드위치와 커피를 주문하고 앉아 내일 남편과 뭘 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아무래도 긴 회의 일정을 소화한 남편 입장에서는 숙소에서 푹 쉬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남편의 휴일

- 아기다리고기다리던!





나 홀로 여행을 마무리한 다음날 나와 남편은 주말에 열리는 모나스트라키 벼룩시장을 구경하고 아테네 투어버스를 이용하여 시내를 한번 쓱 둘러보는 것으로 아테네 여행을 마무리했다. 혼자 여행하는 것이 나쁘진 않았지만 뭘 먹을 때만큼은 누군가가 옆에 있어야 더 맛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남편과 함께 실험적으로 마셔봤던 우조(그리스의 전통 술)는 딱 한 모금 먹고 다 버려야 했다는 것은 예외다.





도수도 40도로 높은 편인 데다 향이 정말 오묘해서 못 먹는 여행객들이 상당할 것 같았다. 콜라나 물에 타 먹는 것이라 해도 향이 너무 강했다. 그렇게 남편과 적당히 아테네 산책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로마로 갈 채비를 시작했다.





로마, 생각만으로도 낭만적인(Romantic) 도시였다. 런던에서 아테네를 지나 로마로 향하는 이 기나긴 여정에도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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