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이 많은 곳에는 늘 낭만이 있다.]
아테네의 풍경은 미련으로 포장했다.
해가 미처 뜨지 못한 이른 새벽, 남편과 나는 서둘러 숙소 체크아웃을 했다. 아테네에서 로마로 향하는 아침 비행기를 탑승하기 위함이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공항으로 가는 동안 남편과 나는 어스름한 창 밖 풍경을 응시했다. 한산한 도로를 제동없이 내지르는 택시기사 덕에 창 밖의 풍경은 빠르게 변했다. 남편의 말에 의하면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해변이 있었단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 해변 근처를 지나가는 것 같다고 했다. 남편의 말과 함께 스쳐가는 풍경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테네에서 머물며 망설임이 없었다면 지금, 내 눈 앞의 흐리터분한 풍경에서 햇빛으로 물결이 일렁이는 해변을 떠올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길을 잃거나 위험한 일이 생길까봐 주저했던 나의 일주일은 공항으로 향하는 새벽 택시 안에서 미련으로 포장되는 중이었다. 택시가 공항에 도착했을 때 남편은 운전수에게 40유로를 주었다. 미터기의 계산대로라면 잔돈을 받아야 맞지만 역시나 그런게 있을 리 없었다. 잔돈을 챙길 생각도 없었지만 줄 생각도 없었음을 확인하는 순간, 실망은 온전히 나와 남편의 몫이었다. 확인사살을 당하는 기분이 이런걸까.
떠난 비행기는 돌아오지 않는다.
아테네 국제공항에서 셀프체크인을 하던 중 남편이 적잖이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남편의 출장때문에 부부가 따로 로마행 항공권을 예매했는데(비행기만 같은 것을 타도록 맞췄던 것이다.) 날짜를 어제로 잘못 예약했던 것이었다. 망했다. 나는 스머프같은 얼굴로 다시 티켓을 사러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가 줄창 회의만 했던 전쟁같은 일주일을 회상했다. 예약대로 갔다면 45유로(약 6만원)에 갈 것을 300유로(약 40만원)를 내고 가야한다니... 그의 전리품이었던 출장비가 아테네의 발권데스크에서 증발하고 있었다. 다만, 얼마나 정신이 없었으면 안하던 실수를 했겠는가 싶어 잠시 마음이 무거워졌을 뿐이다. 그의 바쁜 일상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그가 로마에선 즐거운 기억만 담아올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좋은 것도 아니지만 나쁘지도 않은 것에 대하여
로마행 비행기 탑승게이트는 공항이 분명했지만 어딘지 시골역 대합실의 분위기를 자아냈다. 샌드위치를 파는 작은 가판대가 그 분위기를 거들고 있었다. 인천공항만 보고 살다가 아테네의 공항을 보니 무척이나 아담했다. 늘 근사한 것에만 익숙했던 감각들을 아테네에서 툭 내려놨다. 돌덩이들이 널려있던 고대의 유적지들과 번화가의 소매치기들, 거스름돈은 늘 팁으로 꿀꺽하는 택시기사들과 대합실 같은 공항 게이트까지 뭐하나 감탄할 만한 것이 없다는 건 사실이었지만 이게 현실이었다. 그리고 아테네의 현실들은 막상 경험해보면 아주 불편한 것도 없었다. 유난스럽게 좋은 것, 편안한 것에 집착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아테네는 편안함과 불편함의 괴리에서 벗어나 현재에 만족하고 안정을 찾는 방법을 나에게 알려주었다.
낭만에 대한 기대
비행기에서 로마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를 환기했다. 나에게 로마는 임의로 선택한 시간과 풍경이 모두 영화의 한 장면이 될만한 곳이었다. 늑대의 후손이라는 컨셉으로 건국신화부터 남다른 로마의 이야기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곳의 거리마다 촘촘히 박혀있는 서사들은 영화로 만들기에 손색이 없었다. 이렇게 사연이 많은 곳엔 늘 낭만이 있었다. 불현듯 '로망스(Romance)'라는 단어가 뇌리에 스쳤다. '로마적'이라는 표현에서 '낭만적'이라는 뜻으로 바뀐 그 것이었다. 로마제국이 성장하면서 본래의 그리스어와 라틴어는 정치, 철학, 문학 등에서 쓰이게 된 반면, 로마인이 유럽 전역에서 사용한 라틴어의 방언들은 통틀어 로망스(Romans)가 되었다. 그리고 로망스에서 다루었던 이야기가 주로 남녀간의 절절한 사랑이야기라 하여 지금의 의미로 변화하였다는 사연 깊은 단어다. 로망스에서 절절한 사랑이야기가 그냥 나왔을 리 없다. 분명 로마는 그들이 공유했던 이야기보다 더욱 아름다운 풍경들로 가득할 것이란 확신에 기대가 되었다.
로마 피우미치노 공항에 도착해서 도심으로 들어가려면 레오나르도 익스프레스에 탑승해야했다. 탑승권을 발권하려는데 기계 앞에 안내문이 멈칫하게 만들었다. 뒤에 소매치기가 있을 수도 있으니 조심하란 내용이었다. 다시 소매치기의 보이지 않는 손과 신경전을 벌여야 하다니 이만하면 이 상황을 즐길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매치기를 비켜갈 확실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호되게 당한 것도 없었다. 여유를 갖자. 나는 아테네에서도 큰 사고 없이 잘 넘어왔다. 시간이 되어 남편과 함께 테르미니로 들어가는 열차에 탑승했다. 창밖을 보니 오후의 햇살이 적당히 늘어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