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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진 Mar 23. 2017

다시, 런던 / Prologue

 [ 런던으로 또 다시 ]


계획이 없다.
그래서 아무것도 안하겠다는 건 아니고






공항가는길

 


이 부부가 사는 법


                                                                                                           

전날밤 우리부부는 밤잠을 설쳤다. 남편은 뭔가 걱정이 되는지 자꾸 잠이 안온다고 했고, 나도 비슷한 이유로 새벽부터 깨서 집안 곳곳에 드러누워 잠을 청해보다가 결국 아침이 됐다.

오늘은 나홀로 긴 여행을 떠나는 날이다.

진짜 장거리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은 애교같을 1주일간 나홀로 런던여행을 계획했기 때문이다. 왜, 다시, 런던을 선택했냐고 묻는다면, 나는 아직 런던에 보고싶은 것들이 많이 남아있었고 런던은 다른 유럽에 비해 안전하다는 남편의 판단이 서로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런던(1주일)-아테네(6일)-로마(6일)를 다녀오는 긴 여정이지만 아테네에서는 출장 중인 우리 집사(남편이다.)와 조우할 예정이라 실질적으로 완벽하게 혼자있는 시간은 단 '7일'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퍽 난감한 아내의 방향감각(오른쪽과 왼쪽 구분못함)과 무경험에 가까운 환승능력이 유독 걱정이 되곤 했던 것이다.

두 부부가 그렇게 잠을 한바탕 설치고 나서 공항으로 가는 길, 남편은 수시로 본인이 생각나는 것들을 이야기했고, 나는 대충 머리에 욱여넣다가 '될대로 되라'는 생각으로 공항 Bag Drops 줄에 어정쩡하게 섰다. 그 와중에 기특한 것은 탑승 48시간 전에 온라인체크인을 성공하여 미리 내가 원하는 편한 좌석을 사전에 선점했다는 것과 이미 체크인을 끝냈기 때문에 체크인 줄에서 한번, Bag Drops 줄에서 또 한번 긴 기다림을 반복하지 않아 시간을 절약했다는 것이다. 어찌저찌해서 탑승게이트를 찾고나니 갑자기 배가 고팠다. 사실 아까부터 고팠지만 내가 아는 곳에서 비행기를 탄다는 걸 확인하고 나니 배도 됐다 싶었는지 맘놓고 꼬록거렸다. 대왕김밥과 음료를 사서 탑승게이트 앞에서 우적우적 씹어먹었다. 확실히 소풍날에는 김밥이 딱이다.

식후엔 식곤증인지 잠이 쏟아졌다. 탑승시작 후 비상 시 산소호흡기와 구명조끼 방송이 나오기 전부터 이렇게 정신이 몽롱한건 오사카 1박2일 여행 이후 오랜만이었다. 승무원이 먼길 심심하지 말라고 땅콩을 쥐어줬다. 사실 이것도 땅콩을 받을 당시 기억은 없다. 내손에 고스란히 쥐어져있는 땅콩봉지를 보고서야 '아, 땅콩을 받았군' 추측했던 것이다. 비몽사몽 얼빠진 표정의 승객에게 사명감으로 땅콩을 쥐어줬을 승무원을 생각하니 웃음이 터졌다.






20도와 따듯한 앙고라니트의 콜라보


긴장했던 환승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사실 환승에 대한 긴장감보다 더 난감했던 것은 나의 패션이었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앙고라 니트와 탄성좋은 레깅스, 모직자켓까지 갖춰입고 공항에 내려서는 순간 홍콩의 습습함이 불길했다. 홍콩은 18도, 오늘의 한국과 근 20도 차이었다. 공항 내 사람들이 대부분 반팔을 입고 돌아다니는데 그 안에서 멀뚱히 걸어다니는 앙고라 털 니트는 너무 부끄러운 것이었다. 괜히 색도 새빨간걸 선택해가지고 한눈에 주목받으며 환승 게이트로 이동했다.


더웠다. 더워서 정수리 맡 에어컨이 시원하게 나오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홍콩에서 런던으로 더 긴 비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장시간의 비행은 좌석이 중요하다. 이코노미 기준으로 맨 앞에서 발을 뻗든가 맨 뒤에서 좌석 등받이를 최대한 빼든가 둘 중 하나는 되어줘야 그나마 편하게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사전체크인으로 미리 좌석을 받아놔서 앞자리를 선점할 수 있었다. 비즈니스클래스나 퍼스트클래스와 비교할 순 없지만 나름 다른 사람들보다 편안하게 여행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초코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런던으로 또 다시


비행시간동안 사육당하듯 때되면 자고, 먹고를 반복하다 지루함에 그리스를 배경으로 한 메릴스트립 주연의 <맘마미아>를 다시 봤다. <맘마미아>에서 메릴스트립의 <The winner takes it all>은 그리스 해안가와 절묘하게 떨어져서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장면인데, 다시봐도 역시 명장면이었다. 저 시원한 장면이 펼쳐질 그리스를 상상하니 설렘은 덤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한참 뒤 한번 더 식사시간을 가진 뒤에야 런던 히드로 국제공항에 착륙 할 수 있었다.



기내 간식으로 하겐다즈 아이스크림을 준단다. 워허후!



다시, 런던이었다. 작년에 한번 왔었지만 혼자 온 것은 처음이었다. 런던에서 교통카드(오이스터카드)를 충전 후 공항에서 지하철을 타기위해 이동했다. 유럽여행 때마다 느끼지만 지하철은 한국 지하철이 치안과 편의면에서 압도적으로 최고라는 생각이 든다. 푸석한 시트에 내 몸을 맡기고 트렁크를 내 몸에 맡기고(누가 훔쳐갈지 모른다. 내짐은 내가 지킨다.) 피카딜리서커스로 간다. 피카딜리 서커스는 공항에서 피카딜리라인을 타고 쭈-욱 가면 된다. 런던의 지하철 노선도는 한국의 노선도와 유사하다. 피카딜리 라인은 우리나라로 따지면 1호선쯤 될 것이다. 남색 노선이기도 하고 가로로 길게 주요관광지들을 가로지르는 노선모양도 그렇다.

피카딜리 서커스에 도착해서 게스트하우스 픽업포인트로 이동한다. 이동하는 동안 소호거리를 지나게 되는데 이 거리는 술집과 음식점이 늘어서있어 열시에 여자혼자 다니기엔 약간 무서웠다. 일단 취한 서양인들의 모습에서 이 사람들이 마약을 한건지 술을 마신건지 알수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키가 나름 큰 편임에도 불구하고 목 하나가 더있는 서양인들이 취기어린 말이라도 걸어오면 괜히 쫄보본능이 가동되는 것이었다. 픽업장소에서 짐을 만지작대며 동공이 열심히 주변을 살핀지 약 십 분 쯤 지났을까, 게스트하우스 담당자를 만날 수 있었다.



푸석한 시트






의 숙소


아, 게스트하우스... 이 게스트하우스를 어떻게 좋다, 안좋다 이야기 하긴 어렵다. 한 단어로 말하자면 '애증의 관계'랄까.. 그런 것이다. 런던에서 모든 것이 좋았지만 딱 하나의 오점으로 남은 것이 바로 숙소였다.


사건은 게스트하우스 담당자를 만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밤 열시가 넘어 피카딜리 서커스에서 만난 담당자는 처음 예약했던 4인실 피카딜리서커스 숙소에 갑자기 문제가 생겨 코벤트가든 숙소 6인실로 배정을 다시 해드렸다고 했다. 살다보면 이런일이 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하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화를 낼 수는 없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이 불편한 건 어쩔 수 없다. 여행에선 일단 좋은게 좋은것이니 알겠다고 했다.

담당자는 이어서 6인실에는 이층침대가 있긴하지만 나에겐 4인실에서 옮기는 것이니 단독침대를 주겠다고 했다. 왠걸, 갔더니 4개의 단독침대에 모두 짐이 풀어져 있었다. 딱 하나 비어있는 2층 침대의 1층만이 나와 내 짐을 반기고 있었다. 서비스업에서 보통 이렇게 사전에 양해할 일이 생기면 두 번째 실수는 조심해야 하는데도 또 실수를 한 것이다.

이들은 비싼 값을 지불함에도 불구하고 4인실을 선택한 데에는 고객이 그만큼 4인실에 가치를 뒀다는 것을 이해 못하는 듯 했다. 2층 침대에 짐을 풀고 '6인실에서 지내다 4인실에 자리가 나면 바꿔주겠다.' 해도 짜증이 솟구칠 판에 "일단 2층 침대에서 자다가 동일한 방에 다른 침대로 바꿔드리겠다.", "사실 게스트하우스에서 침대는 먼저 잡는 사람이 임자다.(이거 안하려고 4인실을 예약했는데도 말이다.)", "차액 환불은 전부 해드리겠다." 하는 것이었다.

그래, 좋은게 좋은 것이다. 이 여행은 나의 행복을 찾아 떠난 여행이다. 행복하자, 이 긴 여행에서...는 개뿔같은 소리이다. 이 마음은 1시간이 채 지속되지 못하고 화장실대란에서 다시 한번 고비가 찾아왔다. 4인실을 제외하고 6인실을 사용하는 남녀가 공용 화장실을 쓰는 데다, 서로 씻다가 안나오는 상황이 종종 발생했다. 그럴 때마다 불특정다수의 인원은 기약없는 기다림을 해야했고, 사용자도 대기자도 불편한 상황이 아침저녁으로 계속되었다. 이전에 파리여행에서 한인민박을 경험해본 나는 이런 문제가 있을 것을 고려, 4인실을 예약했으나 다시 이 상황을 맞이하니 뒷골이 뻐근할 정도였다. 물론 일반 한인민박에 비해 약간 비싼 가격(이 숙소가 한인민박치고는 가격이 약간 있는 편이다.)으로 예약한 게스트하우스에서 내돈주고 화장실 내맘대로 쓰겠다는데 뭐라 할 사람은 없다만, 다른 사람도 다 본인 돈내고 화장실 내맘대로 쓰고 싶어한다는 것을 서로 배려해야한다. 어쩌면 그것보다 우선 화장실을 이 많은 인원이 한개로 돌려쓴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였을지도 모른다.

숙소에 관한 에피소드가 더 있다. 이 숙소에서 이벤트를 했던 뮤지컬티켓을 예매했었다. 당일 아침까지도 뮤지컬이 어디서 하는지 위치가 어딘지 알려주질 않아서 여행계획을 짜기 애매했다. 게다가 오후 쯤에 바우처를 받았는데, 이 바우처는 입국심사 때 필요한 숙소정보가 있는 바우처였고 티켓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 티켓부스 앞에서 다시 유료 핸드폰 로밍을 켜서 담당자에게 확인을 한 후에야 바우처가 잘못갔고 다시 드리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사전에 숙소 스태프들에게도 확인을 했었는데 이 바우처를 보여주면 티켓으로 바꿔줄 것이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다른 하나는 환불과 관련된 것이었다. 4인실을 예약했는데 6인실에서 지냈으니 환불은 불가피했다. 문제는 그동안 이 숙소에서 일어났던 몇가지 일들을 회상해 보건대 이것도 유야무야 환불이 어려워질 수도 있겠다는 나의 우려, 그리고 그에 부응하듯 런던에서 나갈 때 까지 금액이 얼마고 언제쯤 입금이 될 건지에 대한 언급이 없는 숙소 담당자였다. 장기투숙객이었던 나는 환불 금액도 적지 않은 편이었는데 계좌번호 한 개 받아간 뒤 함흥차사인 이 숙소 담당자를 어떻게 해야할지 답답할 따름이었다. 결국 런던에서 나온지 4일이 지나서야 담당자에게 연락했고 확인해주겠다는 답변 후 또 함흥차사인 담당자에게 다음날 확인했냐고 채근한 뒤에야 금액에 대한 부분과 입금일을 알 수 있었다.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담당자가 이야기 했던 수요일엔 환불금액이 입금이 안됐다. 또 수요일에 입금이 안됐다고 보챈 뒤에야 나는 목요일에 환불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 이 숙소는 당장이라도 짐을 싸서 환불받고 나와야 할 곳이라는데 어느정도 공감이 될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증'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좋은 것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숙소에서 굉장히 맛있는 아침이 제공되었다는 점, 다른 한인민박에 비해 청결하게 관리되고 있다는 점, 무엇보다 코벤트가든역에서 30초 이내의 좋은 위치에 있다는 점등은 혼자 여행하는 나에게 있어 장점이 되어주기도 했다. 그리고 숙소에서 복닥거리며 여러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는 점도 나에겐 즐거운 추억거리로 남아있긴하다.

Mind the gap






2층 침대에 정수리를 맞대고


숙소에서 마음을 추스르고 이층침대에 정수리가 맞닿아있는 어정쩡한 포즈로 저스트고를 펴봤다. 내일 오후에는 남편의 오랜친구이자 나에겐 '아는언니'를 만나기로 했다. 언니와 만날 쇼디치(Shoreditch)는 런던의 홍대거리 같은 곳으로 빅뱅의 지드래곤이 <삐딱하게>라는 뮤직비디오를 촬영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오전엔 슬슬 나가서 세인트폴 대성당을 둘러보고 싶었다. 사실 이 여행엔 계획이 없었다. 'No plan is plan.'으로 전에 런던여행에서 못갔던 곳들을 찾아 전시도 다니고 공연도 보고 하고 싶었다. 지치지 않을만큼 걷고 이것저것 보길 원했다. 그런 면에서보면 나홀로 첫 런던여행은 꽤 성공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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