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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은 Oct 01. 2020

미리 쓰는 여행기 [1]

여행후기 말고 여행 전기


제피는 책을 내보겠다며 몇 군데 출판사와 접촉을 시도했지만 당연하게도 어디서도 원하는 답을 얻지 못했다. 가당치 않은 자신의 계획을 포기하는 대신 그보다 더 황당한 다른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되는데, 가지 않은 여행기를 쓰는 것이었다.

그는 최근 여행에 대한 정의를 다시 생각했다. 좁은 이코노미 석을 견디며 찾아다녔던 무수한 도시와 산, 바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이제 국경 밖은 SF 소설 배경처럼 미지의 공간이 돼 버렸다. 그러니 여행은 발로 하는 게 아니라 상상과 정보의 조합이 되어야 했다. 노이즈 캔슬링 된 공간에 머물 듯이 공기와 소음, 냄새가 차단된 여행기를 쓸 것이다. 그는 자신의 생각에 무릎을 쳤고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먼저 여행지에 대한 자료 수집에 착수했다. 관광지 정보는 인터넷 나무 위키만 보아도 훌륭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현지인들만 알 수 있는 맛집, 카페, 색깔 있는 상점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그동안 해외여행을 하면서 쌓았던 인맥을 총동원했다. 최근 여행 도서의 트렌드를 분석하여 글 전반에 흐를 정서와 문체를 정했다. 그리하여 제피의 출간 기획서가 한나절 만에 만들어졌다.

출판사 담당자들에게 이메일을 썼다. 코로나 시대의 출판, 여행 도서 기획이 나아갈 방향 등을 구구절절 적었고, 자신의 기획서가 얼마나 시대의 흐름에 부응하고 있는지 강조했다. 부디 기획서를 잘 읽어봐 달라는 간곡한 요청으로 메일을 마무리했다. 파일 첨부가 잘 되었는지 테스트 메일까지 보낸 후 메일 발송 버튼을 눌렀다.



몇 군데 출판사에서 연락이 오긴 했다. 그러나 기획서에 관심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그가 보낸 샘플 글을 읽고 자기네 출판사가 발간한 책에 리뷰를 써달라거나 온라인 홍보를 도와달라는 일종의 댓글 알바를 부탁해 오는 게 다였다. 공들여 작성한 기획서는 그렇게 조용히 소멸되는 듯했다.  작성할 당시만 해도 아무도 시도한 적 없는 이 기발한 계획을 행여 누설할까봐 사람도 거의 만나지 않았고, 트위터나 페이스북도 자제했다. 그러나 한 달이 넘도록 바라던 연락은 오지않았다. 하루 종일 울리지 않는 휴대폰을 노려보며 보이스피싱이라도 왔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이제는 누구라도 붙들고 자신의 생각을 떠들고 싶어서 입이 간질간질했다. 기다리다 지친 제피는 출판사에서 이제 막 신입 딱지를 뗀 대학 동창에게 카톡을 보냈다. ‘족발 어때?’ 그날 저녁 공덕오거리 족발집 테이블에서 동창과 마주 얹은 제피는 막걸리 한 잔을 시원하게 비운 후 말을 꺼냈다.


‘대박 아이디어 있는데, 들어볼래?’

‘또 뭔 황당한 짓을 하려고?'

‘자식, 나중에 제발 너네 출판사와 계약해달라고 빌지나 말아라.’


제피가 막 입을 떼려는 순간, 전화가 걸려왔다. 모르는 번호였다. 잠시 망설였으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화를 받았다.

‘제피로스님 맞으시죠?’

‘네, 누구시죠?’

‘00 출판사 김 00 대리입니다. 저희한테 출간 기획서를 보내주셔서 연락드렸습니다.’


제피는 그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돋으면서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생각했다. 최대한 표정을 바꾸지 않으면서 앞에 앉은 친구에게 눈짓을 해 보이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와서 통화를 이어갔다.


‘혹시 다른 출판사와 혹시 계약을 맺으셨나요?’

제피는 경험상 이 순간이 정말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너무 쉽게 자신을 허락하는 것도, 그렇다고 너무 튕기거나 거만하게 구는 것도 좋지 않았다. 썸을 타듯 세심하고 유연한 밀당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만나서 얘기하시죠. 김 00 대리라고 했나요?’


제피는 담당자와의 미팅 일정을 정하면서 출간 기획서에 담지 못한 자료들이 있으니 가져가겠다고 말했다. 페루 여행기를 쓰기 위해 제피가 가진 것이라고는 구글 지도와 SNS 계정뿐이었지만 상관없었다. 모두에게 닫힌 국경을 자유롭게 넘어설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었고 이런 상황이 비단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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