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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은 Dec 25. 2020

가상 여행기 1

연재 소설 - 첫번째 이야기

   장마가 예년보다 길어지면서 습도 높은 끈적끈적한 날들이 이어졌다. 제피는 오랜만에 집밖으로 나왔다. 어김없이 장맛비가 내리고 있었으나  우산 위에 통통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눅눅한 바깥공기조차 반가웠다. 며칠 동안 집안에만 머무르며 출간 기획서 작성에 매달렸다. 엄마가 일하러 나간 사이 하루종일 식사도 거른 채 작업에만 몰두한 날도 있었다. 드디어 출간기획서를 완성한 후 출판사 담당자들에게 이메일로 발송하였다.

   제피는 우산을 접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철역사 안으로 내려갔다. 나온 김에 맞은편에 있는 대형마트에 들려볼 참이었다. 엄마 최봉숙여사가 좋아하는 해물탕 요리를 해주면 좋을 것 같았다. 출입구가 10개나 되는 복잡한 역사 안에는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빠른 걸음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제피는 지나가는 사람 한 명을 붙잡고 자신이 얼마나 멋진 기획서를 완성했는지 마구 늘어놓고 싶어졌다. 당신들이 여행을 못 간다고 낙담하고 바이러스에 시간을 빼앗겼다고 불평하는 사이 나는 한발 먼저 미래로 먼저 달려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제피가 여행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 것은 포털 사이트에서 본 기사 때문이었다. 기자는 신개념 여행상품을 ‘회항여행’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진짜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공항에서 여권을 보여주며 출국수속을 밟고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는 국경을 넘어 목적 국가의 상공에 도달하지만 착륙하지는 않았다. 하늘 위에서 창문 아래 풍경을 감상하고 사진도 찍었다. 그리고 다시 회항한다. 여행을 마치고 비행기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정말 행복해보였다. 

  TV 뉴스에서 정장 차림의 커플이 좌석에 나란히 앉아서 승무원이 따라주는 와인을 받으며 웃고 있었다.  비행하지 않는 비행기 좌석에 앉아서 기내식을 즐기는 이색 여행에 대한 외신이었다. 좌석 급수별로 메뉴 구성과 가격이 달라졌다. 퍼스트 클래스 메뉴에는 최고급 스테이크와 프랑스산 와인이 제공되었다. 그들 앞에 고급 레스토랑 셰프가 한 듯한 세련되게 플레이팅된 음식이 보였다. 상품을 구매하면 공항 라운지에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쿠폰도 제공한다고 했다. 

    비행기를 타고 주변만 맴돌다가 돌아오는 사람들을 보면서 제피는 그들의 마음이 궁금해졌다. 설레임을 느껴보는 것. 지금 여기가 아닌 어딘가로 갈 수 있다는 기대감. 이색 여행 상품을 즐기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그거면 충분하다는 표정이었다. 제피는 저런 상품에 돈을 지불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의아했는데 기자는 해당 상품이 몇 분 만에 매진되었다는 사실도 전해주었다. 황당해 보이지만 사람마다 행복의 기준은 다른 거니까. 

   잠시나마 여행의 환상에 빠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보다가 제피는 여행을 기록하는 방식에도 변화가 필요한 거 아닌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바이러스가 사라지더라도 세상은 분명 지금과 많이 달라질 것 같았다. 제피는 자신이 꿈꿨던 여행을 제안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TV에서 앵커의 말소리가 점차 귀에서 멀어졌고, 제피는 자기만의 여행을 기획하는 상상에 빠져들었다. 그러다 뭔가 결심한 듯 제피는 티브이를 끄고 방으로 들어와 노트북을 켰다.


    제피라는 이름은 예전 여자 친구가 지어주었다. 그녀는 자신의 물건들에 별명을 붙여주는 걸 좋아했다. 그리스 신들, 님프들의 이름으로 부르곤 했는데, 제피로서는 어떤 이유로 그런 이름을 붙이는지 알도리가 없었지만, 그때마다 물어보기도 좀 민망했다. 그녀는 제피가 사준 최신 아이폰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이제부터 이 아이는 헤르메스라고 부를 거야. 헤르메스 알지? 그리스 신인데 날개달린 신발신고 여기저기 날라 다니는 메신저 말이야’

    헤르메스라면 프랑스 명품 브랜드 아니었나. 안타깝게도 한 달도 못되어 헤르메스는 날개가 달린 듯 증발해버렸는데, 같이 다녔던 글쓰기아카데미 내에 분실사고가 많았던 걸 생각하면 단순 증발은 아니었을 테고 당연히 다시 찾지 못했다. 사라진 휴대폰과 함께 두 사람의 관계도 흐지부지 끝났고 제피라는 이름만 남았다. 자신을 ‘제피’라고 부를 때 허스키하면서도 귀여운 그녀의 색시한 음색이 좋았다. 의미 따위가 뭐가 중요한가. ‘김동수‘라는 흔해 빠진 이름 대신 ‘제피’라는 애칭을 선사했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이후 제피는 인터넷 계정을 만들 때마다 그녀가 붙여준 자신의 애칭을 사용했다. 어느 날 페이스북 친구가 제피라는 이름이 무슨 뜻이냐고 묻는 댓글이 달렸다. 여태 뜻도 모르면서 계속 이름을 썼구나 싶었다. 휴대폰에서 구글 검색을 했다. 결과 창에 붉은 색 곡식이미지들과 산초, 계피, 추어탕 등의 연관 검색어들이 보였다. 이게 아니었는데. 제피는 자신의 이름이 신화와 관계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구글 화면에는 조개껍질 위에 선 비너스에게 입김을 불어넣는 그림이 검색되었다. 서풍의 신, 제피로스. 이거였구나. 모르고 썼지만 어쩌면 앞일을 예감한 것처럼 자신에게 딱 어울리는 아이디를 쓰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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