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장 버리기
20년 넘게 사용한 서랍장을 버렸다.
가구의 위치를 조금 옮기려다 다리를 부러뜨리고 말았다. 아마 이사 다닐 때마다 조금씩 망가졌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여기저기 문제가 많기는 했다. 문고리들이 몇 개 사라져 버렸고, 서랍의 합판 이음새가 벌어져서 불안해 보였다. 지난번 이사 때 버렸어야 했나. 그렇지만 친정 엄마가 사주신 물건이기도 했고, 수납에 별 문제가 없었고, 무엇보다 버리고 새것을 사는 게 귀찮았던 이유가 제일 클 것이다. 암튼 이런저런 이유로 계속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제대로 망가져 버렸으니 고민 없이 버리게 되었다. 익숙한 것과의 이별은 매우 어렵고 오래 걸리기도 하지만 때로는 순식간에 일어나기도 한다.
구청 홈페이지에서 폐기물 신청을 하고 필증을 붙인 후, 주차장 한쪽 폐기물 보관장소에 가져다 놓았다. 식구처럼 오랜 세월 함께 했던 가구가 집 밖에 나와 있는 모습을 보려니 기분이 좀 묘했다. 사람들이 오가는 길목에서, 다리는 부러지고 여기저기 흠집도 나고, 손잡이 고리도 없이 버려진 모양새가 한없이 초라해 보였다. 쓸데없이 가구에 감정이입을 다하네 생각하며 집으로 얼른 올라와버렸다. 내일이면 수거 트럭에 조각조각 부서진 채 실려가겠지. 고생했다, 잘 가거라.
서랍장에 하루라도 내 손길이 닿지 않은 날은 없었을 것이다. 속옷과 양말, 옷가지뿐 아니라, 통장, 도장, 시계 등 귀중품들도 보관해놓았으니까. 새로운 가구를 구입하기도 전에 서랍장을 버리는 바람에 안에 있던 옷과 소지품들이 방에 아무렇게나 쌓여있었다. 어차피 여름옷들을 정리하고 가을, 겨울 옷을 꺼낼 시기이기도 했다. 이참에 안 쓰는 것들은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6개의 서랍마다 가득 차 있던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얼마 전 책장을 정리할 때와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손길이 안 가는 옷들은 역시 올여름 한 번도 입지 않았다. 그렇게 몇 년째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옷들이 꽤 되었다. 미련 없이 버리기로 했다. 수거함으로 보낼 옷들을 따로 담아두고 나니 정작 입는 옷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버렸던 서랍장 2칸도 안될 부피였다. 서랍장을 새로 구입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너비 120cm짜리 서랍장이 빠진 안방 공간이 무척 넓어 보였다. 나는 서랍장 대신 넉넉한 크기의 책상을 사기로 마음먹었다. 책상을 넣고 남는 공간에 작은 서랍장을 배치하면 좋을 듯했다.
예기치 않게 서랍장을 버린 덕분에 책상을 산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왜 좀 더 빨리 서랍장을 버리지 못했을까.
주변을 잘 살펴봐야겠다. 쓰지도 않고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물건이 또 없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