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세번째 이야기
제피는 방 한쪽 벽에 커다란 세계지도를 붙여두었다. 글로 읽었거나 사진으로 보았던 도시들을 하나씩 찾아내어 빨간색 압정으로 표시를 해두었다. 빨간 점들이 박힌 도시들을 바라보면서 전 세계에 자신의 발자국을 남기는 기분이 들었다. 구글 지도에서 ‘마추픽추’를 입력하고 해당지역 스트리트뷰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에서도 검색했다. 현지의 맛집이나 여행객들의 사진이 가득했다. 좋은 글이나 사진을 만날 때마다 하트를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특색 있게 글을 쓰거나 감성적 사진을 올리는 사람들은 반드시 팔로잉해두었다. 필요한 자료를 찾고 도시의 풍경을 즐기는 시간이 제피는 가장 행복했다.
여행 에세이에 담을 내용은 직접 경험했건 하지 않았건 상관없을 것 같았다. 특정한 장소에 대한 감상을 적어놓은 글을 여행기라고 부른다면 반드시 직접 가봐야한다는 전제가 꼭 있어야 할까. 방문하지 않더라도 어떤 도시에 대한 감상을 쓸 수 있는 것 아닐까. 그 도시의 역사와 문화, 특징을 파악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제주도를 처음 찾았던 20살의 자신이 모습이 생각났다. 화산 폭발로 생겨난 섬. 섬 특유의 문화와 역사를 간직한 곳. 여행을 계획하면서 제피는 제주도 설화에 관한 책부터 구입했다. 제주는 단군신화가 대신 설문대할망, 천지왕 등 제주만의 창조설화를 가지고 있었다. 삼성헐이나 4.3 사건 등 제주의 신화와 역사를 읽을수록 우리나라가 아닌 미지의 문명에 대해서 읽는 것 같았다. 새로웠다. 제주행 비행기에 앉아서도 제주 해녀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았다. 제주 공항에 도착한 제피는 주차장을 둘러보며 초봄의 제주 공기를 힘껏 들이마셨다. 입고 있던 패딩재킷을 벗어서 한쪽 팔에 걸쳤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서있는 주차장 야자수들을 둘러보면서, 자신은 이미 제주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피의 여행기]
챕터 1 - 여행의 시작 ‘미래로 가는 기차’
‘열차의 출입문이 닫히고 출발을 알리는 방송이 들렸다. 역사를 벗어나자마자 열차는 컴컴한 터널 속으로 급속히 빨려들어갔다. 진공같은 공간을 한동안 달렸다. 시간을 가름하기 힘들었다. 한참 후 멀리서 작은 구멍처럼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기차가 터널을 빠져나와 드디어 다리를 건넜다. 내가 가고 싶었던 바로 그곳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중고등학교 동창들이 하나둘 직장인이 되고 차츰 결혼했다는 소식도 듣는 동안 제피는 소설을 썼다. 자신의 문학적 자질에 회의감이 들고, 무모해 보이는 도전이 한심해 보일 때도 많았지만 그래도 계속 썼다. 공모전이나 신춘문예에 원고를 보낸 날은 방에서 갇혀 지내던 시간에서 벗어나서 최여사와 외식을 했다. 계산은 당연히 최여사 몫이었지만 그래도 그 시간을 최여사는 좋아하는 듯 했다. SNS 친구들 이야기를 들려주면 최여사도 흥미롭게 들었다. 인스타그램에서 찾은 이국적 풍경의 사진들을 휴대폰으로 보여주면서 제피는 최여사에게 말했다.
“이번에 당선만 되면 같이 여행가자. 상금이 엄청나거든.”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만큼은 제피도 좋은 아들이 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소설가라는 타이틀은 아직 얻지 못했지만 온라인에서는 작가 행세를 했다. 제피라는 아이디로 접속하는 순간만큼은 박식하고 경험 많은 여행 작가로 변신했다. 제피의 팔로워들은 모두 제피가 수많은 도시를 섭렵한 전문 여행가인줄 알았다. 물론 거기에 일조한 것은 최여사의 카드로 사들인 수많은 여행관련 도서들, '트래블러', '뚜르드몽드', 'AB-ROAD', 'Bar&Dining' 과 같은 해외 잡지들이었다. 구독료만도 매달 백만원이 넘는 돈을 쓰고 있었다. 제피는 국내여행 조차 귀찮아하는 편이었다. 유명 관광지나 주변 맛집에서 붐비는 인파를 참아내느니 집에 있는 쪽을 선호했다. 말도 통하지 않는 해외에서 지도를 들고 헤맬 생각을 하면 머리가 지끈거렸고, 그래서 비행기티켓을 구매하는 대신 여행지에 대한 도서를 구매하는 쪽을 택했다.
너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 누구 눈치 보지 말고.
최여사의 응원이 고맙고 힘이 되는 건 분명했다. 하지만 명절이나 경조사에서 친척들과 나누는 대화를 들어보면 같은 말도 뉘앙스가 다르게 느껴졌다. '언젠가는 효도하는 날이 오겠죠. 기다려 봐야죠.' 엄마가 친척들에 둘러싸여 아들의 취업이나 결혼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자신도 같이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엄마는 적당한 답을 고르느라 진땀을 흘렸고 그럴 때마다 제피는 핑게를 대고 자리를 피해버렸다. 제피를 무겁게 짓누르는 건 눈치없는 친척들의 오지랖이 아니라 엄마가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무한한 믿음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피가 독립을 꿈꾸며 최여사 몰래 공사장에서 막노동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다. 돈이 모일 때까지 비밀로 하고 월세 보증금을 모아보기로 결심했다. 홍대 근처 월세방을 알아보고 보증금을 모으려는 목표를 세울 때만 해도 꿈에 부풀었다. 매월 저축액을 설정하고 성실하게 돈을 모을 수 있는 어플도 깔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자리를 검색해보았다. 많지는 않았다. 일당이 가장 높은 막노동도 도전해보았다. 풀옵션 신축오피스텔에서 은은한 조명 속에서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을 자신을 그려보면서 뭐든 할 수 해야겠다고 의지를 불태웠다.
그런데 고작 한 달도 안 되어 포기해버리다니. 최여사의 카드를 쓰면 될 일을 왜 고생하나 싶기도 했다. 자꾸만 제피에게 이사 날짜를 물어보는 친구들 때문에 한동안 SNS에도 접속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