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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니 May 23. 2018

버닝 (2018)

채울 수 없는 배고픔


무엇에 굶주려 있는지, 무엇을 불태우면 좋을지

답은 오직 자신에게 달렸을 뿐. #meant to be



버닝 (2018)

감독 : 이창동

주연 : 유아인(종수 역), 스티븐 연(벤 역), 전종서(해미 역)


* 스포 있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만이 이런 질문을 한다. 그저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아니면 수면이나 성욕을 채우기 위해 살아가는 게 전부가 아니란 걸 아니까. 이 영화는 동물처럼 본능적 욕구를 충족시키며 사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한 별볼일 없는 시골청년의 이야기이다.


소설가가 되기를 꿈꾸지만 정작 무슨 글을 어떻게 써야할지는 막연하고, 현실은 먹고 사는 게 고달픈 택배회사 알바생 종수. 일하던 중에 우연히 고향 친구인 해미를 만나게 된다. 성형을 해서 몰라보게 예뻐진, 익숙하고도 낯선 해미와 금세 몸을 섞는다. 해미는 아프리카로 여행을 간다며 고양이 밥을 부탁하고 종수는 정말 있는건지 아닌건지 확신할 수 없는 고양이 밥을 주러 그녀의 집에 다니게 된다.  



귤이 있다고 믿는 게 아니고,
귤이 없다는 걸 잊어버리는 거야.


귤 먹는 판토마임을 보여주며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 설명하던 해미의 말은 그냥 거기서 끝나지 않고 종수가 그녀의 집에 갈 때마다 두 가지를 잊어버리게 했다. 고양이의 존재와, 그녀의 부재. 종수는 그 집에 갈 때마다 고양이 밥을 주고 그녀가 없단 걸 잊으며 자위를 했다.


해미가 아프리카에서 돌아오던 날, 공항으로 마중을 나갔던 종수는 그녀의 곁에 웬 번지르르한 사내가 같이 나온 것을 보게 된다. 이름은 벤이라는데 한국말은 잘 하는 것 같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남자와 함께 있는 해미를 계속 같이 만나게 되는데.


배고픈 사람들은 두 종류가 있어.
하나는 리틀 헝거고, 하나는 그레이트 헝거.
전자는 먹을 것이 없어서
배가 고픈 사람들인거고
후자는 삶의 의미가 없어서
그것에 주려 있는 사람들을 말하는 거야.


아프리카에 다녀온 해미는 리틀헝거가 그레이트 헝거가 되어가는 춤을 추며 벤의 친구들 앞에서 웃음을 선사한다. 포르쉐를 몰며, 호텔같은 집에서 파티하며 사는 그들의 세계 속에 혼자 떠다니는 먼지처럼 앉아있던 종수는 해미가 그 춤을 추는 게 어쩐지 비웃음을 사는 것 같아 싫다.


벤과 이젠 그만 다녔으면 좋겠는데, 집근처에 왔다며 종수의 집에까지 찾아온 두 사람. 벤이 건넨 대마에 취해 옷을 벗어던지고 그레이트 헝거의 춤을 추는 그녀를 방 안에 재우고 벤과 아주 껄쩍지근한 마음으로 마주하게 된 종수는 가끔 비닐하우스를 골라 태운다는 벤의 비밀스런 취미를 듣게 된다.



내가 태워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
불타는 비닐하우스를 보면..
뼛속까지 울리는 베이스. 그걸 느껴요.


그날 이후 종수는 집근처의 모든 비닐하우스를 지키려고 온동네를 순찰(?)하는 한편, 해미는 도무지 연락이 되지 않는다. 집에도 가보았으나 그녀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찾을 수가 없고 벤의 뒤를 쫓으며 점점 그가 해미를 어떻게 해버렸다는 생각으로 가득차기 시작한 종수는 바람직하지는 못해보이는 방향으로 그레이트헝거가 되어간다.


벤의 집 화장실 서랍에 있던 해미의 시계, 벤이 길에서 주워 데려온 고양이에게 해미의 고양이 이름을 부르며 자신에게 떠오르는 그 생각이 실제론 없다는 것을 완전히 잊어버린 종수. 결국 눈밭에서 벤을 찔러죽이고 그 멋드러진 차에 태우곤 피묻은 자신의 옷을 속옷까지 벗어던지고 태운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뒤로한 채, 추위때문인지 살기가 남은 때문인지 모를 숨을 뱉으며 그곳을 떠나는 데에서 영화는 많은 물음과 느낌을 남기며 끝난다.



영화 속에서 벤은 정말 수수께끼같은 존재였다. 보여준 것만으로는 종수의 생각처럼 벤이 해미를 죽였는지는 모를 일이다. 나는 처음부터 벤이 종종 태운다는 쓸데 없는 비닐하우스가 실제 그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이 세상에서 쓸데 없는 비닐하우스처럼 텅텅 빈 그레이트 헝거, great hungirl 이라는 생각을. 벤은 재미를 위해선 뭐든지 하는 사람이었으니 헝거가 아니다. 그런 그에게 해미나 종수처럼 쓸데 없고 텅텅 빈 비닐하우스들은 손을 위로 들고 펄럭거리며 태워지기를 기다리는 것이니.


벤의 말을 빌리자면 ‘메타포’로 가득한 영화이나, 결국 나의 벤에 대한 해석은 벤의 태워짐으로 권선징악적인 결말을 맞이하였다. 혼자 생각하고 혼자 깨닫게 하지만 벤을 죽인 이후에도 여전히 종수에게 해미가 채울 수 없는 헝거의 운명처럼 남았듯, 나에게도 채울 수 없는 배고픔으로 남은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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