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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니 Nov 08. 2023

이방인의 하루

맑은 하늘에서 비가 내리던 기묘한 날


흐리고 비가왔다. 바람이 나를 미는 정도의 궃은 날씨인줄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한여름 햇빛같이 쨍한 빛이 젖은 바닥을 비추었다. 우산을 살짝 치워보니 찬란한 하늘에서 여전히 비가 계속 오고 있었다. 심지어 비가 오는 하늘은 파란색이었다.


회색의 짙고 어두운 그늘과, 파란 하늘 밑으로 깊은 가을 햇빛이 내리쬐는 묘한 날이었다. 음울하기 그지없다가도, 잠깐 고개를 돌리면 도대체 언제 그랬냐는 듯 평화롭게 나뭇잎을 투과하는 햇빛을 느낄수 있었다.

구름의 이동이 그렇게나 빠르고, 체감이 되는 날이었다.


시시각각으로 홱홱 변하는 날씨 탓에, 내 기분도 몇분 새 너무나 여러가지 모습으로 변해 갔다. 정말이지 빠르게 지나가는 영상처럼 기분이 변해 갔다. 그렇게 부질없이 변하는데도, 나는 그짧은 기분들을 너무 진실되게 앓았다.


목걸이를 차고, 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오늘 있을 일이 얼마나 또 바쁘고 힘들지 이야기하면서 삼삼오오 걸어간다. 나는 그 틈에 혼자서 역행을 하면서, 혼자서 가방을 메고 있었다. 나는 타지에서 여행 온 이방인처럼 그 길을 걸어갔다.



우육면을 파는 식당에 들어갔다. 바쪽에 자리를 안내해 주기에 가서 앉아 한 그릇을 시키고 식당에 적응을 했다. 금방 국수가 나왔고, 국물 한 입을 시작으로 타지의 음식을 먹으며, 타지에 온 이방인의 기분을 느꼈다.

식당엔 중국어로 된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메이꽌시 하나였는데, 그 말을 반복적으로 하는 노래를 들으며 뜨듯하고 진한 국물을 먹는 내게 무언가 위로의 순간처럼 그 메이꽌시란 단어가 들려왔다. 문득 밖을 내다보니, 언제 비가 왔냐는 듯 환한 빛이 바닥을 비추고 있었다. 빨간 틀의 식당 미닫이문 너머로 내다 보이는 연두빛 나뭇잎과 아직 마르지 않은 길바닥. 꽤 괜찮은 식사였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자 맑은 비는 점점 거친 바람과 함께 매서워져 갔다. 그 양상은 마치 인생의 즐겁고 기쁜 순간들을 태풍처럼 쓸어버리듯 찾아오는 현실과도 같았다.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과 우연히 간 카페는 공사장 옆에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수 있는 정도의 좁은 골목에 위치하고 있었다. 80년대 풍의 앤틱한 인테리어 속에서 그저그런 맛의 빵과 그저그런 맛의 초코라떼를 마시며 기쁨의 순간을 태풍처럼 쓸어버리는 현실에 대해 이야기했다.


‘ 나는 죽을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죽을지를 생각을 해 봤죠. 한강에 떨어져 죽을까, 목을 매달아 볼까, 아니면 수면제를 40알을 먹어볼까.’


카페에서 할 만한 이야기는 전혀 아니었지만, 이 공간에는 한국말을 하는 사람이 우리들 외엔 없었고 여전히 이방인이 된 것 같은 그 기분의 연장에서, 나의 현실은 인생을 쓸어버린 허리케인 같다는 말을 하는 중이었다.


‘ 그런데 죽을 방법을 생각하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죽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죽을 사람이여야 죽을 방법을 생각하는구나. 그럼 내가 안 되는 이유는 되고 싶은 사람이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될 사람이여야 될 방법을 생각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


내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웃지만 결코 웃지 않는 얼굴로 자신들의 살 방법을 생각해 보노라는 마음들을 전해 왔다.


‘ 그 얘기, 글로 써서 올려주세요. 기승전결이 있는 스토리텔링이야. ’


죽는 얘기를 하는 게 딱히 충격적이지도 않은 시니컬리스트 셋이서 생의 부질없음을 털어내는 동안에도 주변에선 여전히 영어가 들렸다. 고상한 토론과 활기있는 잡담이 공존하는, 80년대 한국. 갑자기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은 부질없는 도파민이 돌았다.



그 카페에서 이방인의 기분을 흠씬 느끼며 죽음과 삶과 최근의 이슈에 대한 대화들을 하다가 밖으로 나왔다. 이젠 갑자기 겨울이 된 듯한 차가운 공기와 바람이 살을 에는 듯했고 조금 걷다가 적당한 식당에 들어가려고 했던 우리는 당혹스러운 날씨에 어디로 갈 바를 잃은 채 지도를 켰다.


보이는 곳을 향해 걸었다. 그렇게 외국인 여행객이 즐비한 명동 거리에 들어섰다. 분명 당혹스러운 날씨를 피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여기까지 걸어와 버린 우리는 많은 인파와 상점들 틈에서 잠깐 바람의 매서움을 잊고 사람들 구경을 했다.


뭘 먹을까 하다가 눈에 보이는 칼국수집에 들어왔다. 그 프랜차이즈 브랜드는 너무나도 오래되어 전혀 스타일리시하지 않고 딱히 엄청 맛있지도 않아 왜 그렇게 오래가는지도 모르겠는 그런 정체성을 가진 식당이었다.


그런 식당에, 대기 줄이란게 있었다. 지친 우리는 의자에 앉아서 조금 기다리기로 했고, 추웠던 기운이 가시고 조금 노곤해질 때쯤 식당에 들어갈 수 있었다. 식당 안은 외국인들로 만석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는 메뉴를 시키며 타지에서 온 이방인이 현지 음식을 한껏 즐기려는 것과 같이 여유를 갖기로 했다.


‘ ㅇㅇ칼국수가 어디 있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ㅇㅇ칼국수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을, 그 딱히 스타일리시하지도 않고 맛도 없는데 아직도 숨이 붙어있는 식당에 빗대어 한 말이었다. 오늘 내내, 우리자신의 살 방법을 어떻게든 찾아보겠노라고 하는 말이었다.


‘ 일 년 중에, 몇월이 제일 싫어요, ’


크리스마스가 곧 온다는 얘길 하다 나는 갑자기 속절없는 어둠을 느껴서 그걸 물어본 건데,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들려온 대답이 내 몸에 전기가 흐르듯 하게 했다, 일월이요.


그 대답이 들려온 순간 우리는 말이 멎었지만 같은 찰나를 느끼고 있었다. 사람들은 1월이 되면 새해 계획을 세우고 희망을 가지고 기대하고 한다는데, 나는 지독스럽게도 그 새해라는 더욱 무거운 족쇄가 지난 일년간 전혀 변하지 못한 나를 집어 삼키는 것 같거든.



칼국수를 먹고 나온 우리는 길거리 음식이 즐비한 거리를 걸으면서 한국 여행을 즐겼다. 길거리에 피아노가 있었다. 나는 그것을 지나칠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소나타를 볼품 없는 투로 지꼈다. 추웠고, 꽤나 오래 연습하지 않았지만 몸이 기억하는 음악이었다.


사람들과 헤어져 집에 가는 버스를 타러 왔다. 백화점 전면에 크리스마스가 온 듯한 스타일링을 해 놓은 것과, 그 앞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과, 추운 공기와, 그럼에도 나이를 무론한 남과여가 저마다 서로 다정하게 바라보며 이야기하는 장면들이 나도모르게 몽글한 무언가를 느끼게 했다.


그 순간을 카메라에 잠깐 담고, 나는 지독스런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돌아갈 집이 있는, 이방인. 흐린 하늘 사이로 보이는 아주 적은 면적의 파란 하늘. 파타고니아와 같이 정의할 수 없지만 그 자체가 정체성인 오늘의 날씨, 딱히 스타일리시하지도, 그렇다고 맛있지도 않으면서 이상하게 숨은 붙어있는 칼국수. 그게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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