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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유 Aug 02. 2021

1-1. 가드를 내리고 여행지와 친해지기

밴쿠버는 무미건조한 동네가 아니에요

밴쿠버 여행

2019.08.16~2019.08. 22

동행: 엄마

방문한 장소: 버나비, 밴쿠버 다운타운(롭슨 스트리트 등), 밴쿠버 아트갤러리, 그랜빌아일랜드, 킷실라노, 스탠리파크, 잉글리시베이, 노스밴쿠버

그랜빌 아일랜드에서 킷실라노까지 걸어가다가 찍은 사진으로 추정된다. 아름다운 광경이지만 꽤 지쳤던 기억이 있다.


누가 그러지 않겠냐만은, 내게는 여행지를 지나치게 낭만화하는 경향이 있다. 떠나기만 하면 내 모든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는 생각을 한가득 품고 떠난다. 알아들을 수 없거나 그러기 힘든 낯선 언어로 대화하는 사람들, 이국적인 건물과 맡아본 적 없는 냄새, 거짓말처럼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광.


밴쿠버의 첫인상은 버나비의 휑한 교외 주택가였다.


먼지 알레르기로 고생했던, 버나비 숙소의 창밖 풍경.

우리의 첫 숙소는 밴쿠버의 위성도시인 버나비에 있는 한인민박이었다. 50달러에 픽업 서비스를 나오신 사장님의 차를 타고 도착한 숙소는 허름한 주택가였다. 거실과 주방은 지난 숙박객들의 흔적(00 민박 사장님 고맙습니다 ㅠㅠ 등이 적힌 메모)과 사장님 내외가 생활한 자국으로 어지럽혀져 있었다. 우리가 묵을 방바닥에는 카펫이 깔려 있었고, 그 위에 큰 침대가 있었다. 그 카펫 때문에 그 숙소에서 지내는 며칠 동안 먼지 알레르기를 달고 살았다. 숙소 밖으로 나오면 넓고 휑한 잔디밭 위로 낡고 못생긴 집과 가게, 주유소가 이어졌다.

밴쿠버 다운타운은 우리 숙소에서 도보 8분 거리에 있는 역에서 전철로 2~30분 만에 갈 수 있었다. 안 그래도 날씨가 흐린데 이상하게 길에 사람이 많지 않아서 이상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저녁을 먹고 시내를 돌아다니는데 아주 새롭고 놀라운 느낌이 없었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풍경이 이어지는 기분이었다. 더군다나 젤라또 가게에 들어갔더니 점원이 한국어로 우리 주문을 받았다. 도시의 어딜 가나 한국인이 있었다. 분명히 떠나왔는데 떠나 왔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함께 여행하고 있던 엄마 눈치가 보였다. 밴쿠버 등 미대륙 서쪽 여행은 원래 언니와 함께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언니와의 여정에 맞춰서 모든 숙소와 교통편 등등을 두 명씩 예약해 둔 상태였는데 언니가 갑자기 여행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 자리를 급하게 엄마가 채우게 되었고 갑작스럽게 하게 된 여행에서 엄마가 실망하지 않길 바랐다. 그런데 숙소는 칙칙하고, 도시도 칙칙하고(그런 것 같고), 그다지 이국적인 느낌도 들지 않고 어느 가게에서나 한국어가 통하다니. 하염없이 예일타운을 활보하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엄마가 말했다. "여긴 외국 같지가 않네." 내가 보기에도 그래서 할 말이 없었다. 침울한 하루였다.

밴쿠버에서 제일 또 가고 싶은 곳 top2 중 하나인 잉글리시 베이

하지만 며칠이 지나고 나서 그것이 얼마나 안일한 생각이었는지를 깨닫는 순간을 맞이했다. 여행 넷째 날. 엄마와 나는 멋도 모르고 쌍둥이 자전거를 탔다.(나는 자전거를 못 탄다...) 사이클 타는 사람들 사이에서 스탠리 파크의 해안 도로를 생존을 위해 달리느라 공원 구경도 제대로 해 보지 못한 채 지친 심신을 끌고 잉글리시 베이에 도착한 참이었다. 여름에도 서늘한 기온인지라 그럴 거라 생각지 못했는데, 해변은 해수욕을 하러 나온 여유로운 사람들로 가득했다. 사람들은 헤엄도 치고 햇빛도 받았다. 엄마와 나는 해안선을 따라 멋있게 펼쳐져 있는 길을 따라 걸었다. 언젠가 긴 휴가를 받게 된다면 이 해변에 또 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출출해져서 산책의 출발점으로 돌아왔다. 이따 저녁은 저기서 먹자 하고 엄마와 내가 봐 놓은 식당이 있었다. 대기가 있을까 봐 걱정했는데 야외 좌석에 앉지 않는다면 바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해서 들어갔다. 따뜻한 빛의 조명이 켜져 있고 커다란 창으로 햇빛이 한가득 들어왔다.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밝게, 그렇지만 시끄럽지는 않게 들려왔다. 엄마가 술을 잘 못 드셔서 여행 중에 술을 한 번도 마시지 않았는데, 기분이 너무 좋아서 맥주 한 잔을 시켜 봤다. 몰슨 캐네디언-처음 마시는 캐나다 맥주-이었다. 나오자마자 한 입 마셨는데 아주 시원하고 부드러웠다. 엄마와 나는 각자 샐러드와 포케를 시켜 만족스럽게 먹고는, 자유와 행복감을 한껏 충전하고 숙소로 돌아갔다.

이게 여행이지, 그때 생각했다. 첫날에는 이토록 개성 없는 도시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걱정했다. 그것은 밴쿠버에 발 한 번 제대로 들여놓아보지 않은 여행자의 오만이었다. 너무 낯설지 않다는 것은 그만큼 편안히 여행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도심은 작지만 활기 넘쳤고, 몇 블록만 걸어 나가면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한 해변이 펼쳐졌다. 도시 곳곳에서 이 장소가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을 받아들이며 성장해 왔는지 그 흔적이 느껴졌다. 거의 밴쿠버의 소울푸드가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로 산재하는 스시 레스토랑들과 아무렇지 않게 놓여 있는 퀴어/페미니즘 관련 어린이책들이 그것을 방증했다. 밴쿠버는 고집을 버린 도시라서 매력 있고 편안했다. 엄마도 엄마의 방식으로 이곳을 받아들이고 좋아했을 텐데 왜 여행 초반에는 엄마 눈치를 봤을까, 나 자신에게도 엄마에게도 미안해졌다. 

한편, 교환학생으로 네 달을 지낸 토론토는 밴쿠버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도시였다. 도심도 훨씬 컸고 분위기도 더 차가웠다. (한국으로 따지면 서울과 부산의 차이 같은 느낌)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밴쿠버 생각이 났다. 첫 여행지에서 조금만 덜 경계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작은 후회도 들었다.


+ 잉글리시 베이를 '또 가고 싶은 밴쿠버 여행지 top 2'로 소개했는데, 나머지 한 군데는 그랜빌 아일랜드다. 이곳에 대해서는 따로 글을 쓸 예정.

++ 6박 7일의 여행 중 나흘은 밴쿠버 도심에서 머물고 나머지 이틀은 노스밴쿠버에서 지냈다. 다음 글은 노스밴쿠버에서 경험한 '생각보다 여행지에서 할 일이 별로 없을 때는 어떡하지?'에 관한 글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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