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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효이재 Apr 27. 2024

3.1.1.2 초인(超人)으로서 초개인

가장 인간다운 인간 [초개인] (2)

Ólafur Arnalds - Only The Winds


 니체의 낙타, 사자, 어린아이 비유를 경영의 시스템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낙타는 전통적인 경영 시스템인 테일러리즘에서 추구하는 암묵적인 인간상과 오롯이 오버랩 됩니다. 생각과 전략은 관료제, 권력 사다리 위의 소수 수뇌부가 하고 계층 아랫단의 구성원은 복합한 규칙과 내규, 관습에 따라 정해진 일을 정확히 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테일러리즘 관점에서 좋은 시스템, 체계란 최대한 정확하고 정밀하게 할 일과 역할, 책임을 정해주는 것입니다.


 이 시스템에 따라 사람들의 속성도 변해가는데 일련의시스템, 문화 아래서 사람들은 불확실한 상황에서 자신이 할 일이 아닌 새로운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 주어졌을 때 이를 불편해 합니다. 동료 간 서로의 역할 책임이 겹치거나 중복되는 상황이 갈등을 불러일으켰을 때 이를 서로 조율하고 협력해 해결하기를 그 누구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시스템은 더욱 정교하게 그 상황을 정의하고 분류하고 분절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조직 내 개개인 역시 이를 ‘정해주세요’ 요구하는 형태로 낙타로써의 정체성을 드러냅니다.


 니체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19세기말 ~ 20세기초)과 그 이후의 근/현대 조직 시스템을 고려하면 낙타는 당대의 지배적인 요구였으며, (자유, 자율의) 사자와 (가치 창조의) 어린아이는 거대 관료조직, 사회 시스템의 구조에서 환영받거나 흔쾌히 용인되기 힘든 존재였습니다.


 희망적인 부분이 있다면 지금의 시대 환경은 더 이상 낙타의 정신, 이를 유도하는 시스템만으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낙타를 강요하던 테일러리즘은 여러 이유로, 또 여러 신호로 수명을 다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제는 사회, 경영 시스템과 우리 개개인이 합심해서 낙타에서 사자, 사자에서 어린아이로의 변신할 수 있는 경로의 문을 열어야 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니체가 낙타에서 사자로, 사자에서 어린아이로의 변신을 통해 추구하고자 한 인간상은 초인超人, 즉 ‘넘어서는 인간(독일원어로는 위버멘쉬_Übermensch)’입니다. 초인은 자칫 슈퍼맨_superman, 인간을 초월한 힘과 능력을 가진 인간으로 오역되기 쉽지만 그 둘의 의미는 엄연히 다릅니다. 슈퍼맨은 보통사람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 온갖 인간적인 약점을 극복하고 인간을 초월한 완전한 사람의 의미에 가깝습니다. 이에 따르면 초인은 불완전한 속성을 갖는 우리 인간과는 다른 존재가 됩니다.


 하지만 본래의 단어 ‘위버멘쉬_Übermensch’, 넘어서는 인간은 조금 다른 뉘앙스를 갖습니다. 넘어서는 인간은 절대적인 능력, 초월이라기 보다는 자기 자신의 나약한, 취약함을 넘어서려 부단히 노력하는 과정의 의미에 더 가깝습니다. 넘어서는 인간은 또 자기 주체성을 전제로 합니다. 즉 자신이 주체가 되어 세계를 해석하고 그로 인해 자기 목적성을 갖는 인간을 의미합니다. 자기 목적성이란 존재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1]


 예컨대 우리가 자기 목적성이 있는 활동을 추구할 때 우리는 구태여 외부로부터 대가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가장 큰 보상은 이런 일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이른바 ‘외부 목적성’이 있다는 것은 그 목적이 외부에 있어 외부로부터 대가가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제목, 그리고 서문부터 본문 내용 중간 중간 ‘초개인’이라는 단어를 줄곧 써왔습니다. 초개인은 1차적으로 우리 각자의 개인성을 부각하는, 이미 한 켠에서 널리 알려진 초개인화_hyper-personalization의 의미를 물론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초개인화’가 주로 개개인의 욕망을 맞춤화 한다는 기술, 마케팅적 용어에 가깝다면 우리가 의도한 의미는 ‘평균적 인간’의 반대되는 ‘개개인성_indivisuality’을 우리 스스로 되찾고, 조직과 기업 역시 이를 전제한 운영을 해야 한다는 의미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바로 이 ‘위버멘쉬로서의 ‘초인’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초개인은 우리가 제시하는 ‘가장 인간다운 인간’상입니다. 즉 ‘초개인’은 우리 각자의 개개인성을 존중한다는 의미인 동시에 가장 인간다운 인간이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낙타와 사자와 어린아이를 유연히 넘나들 수 있어야 합니다. 


 니체는 고귀한 인간은 그 과정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짐승과 초인을 연결하는 밧줄로써 서로 끊임없이 줄다리기하는 과정 자체에 새로운 가치가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해석을 좀 더 덧붙여 가장 인간다운 인간의 의미를 재구성하자면 우리가 제안하는 ‘초개인’은 자기 주체적이되 고도로 복합적인 인간입니다. 상황 맥락에 맞추어 스스로 낙타와 사자, 어린아이로 변신해 가치와 의미를 창조하는 인간입니다.


 누군가는 “왜 가장 인간다운 인간에 ‘낙타’도 될 수 있어야 한다 말하는가?”라고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주체성이 전제되지 않았을 때 낙타는 그저 짐승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자기 주체성을 회복했음을 전제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것을 상상해보면 낙타가 상징하는 인내와 희생 역시 창조에 매우 필연적인 과정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소위 혁신, 강력한 가치를 창출했다고 여기는 위인 아무나 붙들고 그들의 삶을 추적해 보면 그들 대부분은 반드시 때로는 인내하고 묵묵히 짐을 짊어졌으며, 때로는 강력히 어떤 것에 맞춰 싸웠으며, 때로는 어린아이로 변신해 몰입하고 유희했을 것입니다. 즉 진정한 변화, 가치창출 과정에 낙타가 따로 있고 사자가 따로 있고 어린아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두를 우리가 주체적으로 품고 복합적인 상황 맥락이라는 길 위를 신중히, 때로는 거침없이 걸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초개인’이 갖는 또 다른 의미는 ‘개인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성숙한 인간으로서 고유의 주체성을 찾아 우리 앞에 놓인 문제 앞에 직면하는 초인으로서의 인간은 동시에 개개인의 한계와 취약성을 인정하는 인간입니다. 자신의 유한성을 긍정하는 겸손한 인간은 그 스스로 자기 자신을 넘어 타인과 이타적으로 협력하고 연대하기를 추구합니다. 초개인은 자기 의지를 추구하면서도 동시에 자기 자아를 내려놓거나 넘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정신분석학자 마크 엡스타인_Mark Epstein에 따르면 우리의 의식적 자아는 ‘자신이 성취한 자립, 권력, 지배력, 성공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그 일이 다른 사람, 문화, 또는 세계에 고통을 주더라도 거의 무엇을 할 수도 있습니다.’[2] 우리가 만들어낸 이런 ‘절대적 자아’를 풀어주고 더 폭 넓은 삶의 의미를 인식하는 것이 좀 더 건강한 삶의 접근법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호모 디그누스: 초개인과 조직경영] 글 가장 앞부분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깊은 불안 앞에서 우리는 좀 더 당당할 수 없을까? 짙은 불확실성의 안개 속에서 우리는 좀 더 의연할 수 없을까? 나아가 우리가 몸담은 조직이 좀 더 건강하고 안전하게 생존, 성장할 확률을 높이는 길은 없을까?』


  이에 대한 가장 근원적이면서 1차적인 답은 우리 스스로가 ‘인간다운 인간: 초개인’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다시 이는 1) 우리 스스로의 개개인성과 주체성을 되찾는 것, 그 과정에서 2) 정신적으로 유연하면서도 성숙하기를 부단히 노력해 가치와 의미를 창조하는 것, 3) 나아가 자기 자신을 넘어 타인과 협력하고 연대하는 것입니다. 


 본격적으로 이를 다루기 전, 우리가 간과해선 안 될 문제가 있습니다. 더 이상 과거의, 낙타 생산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시대가 왔다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희망적인 일일 수는 있을지라도 단기적으로는 비극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세계가 급격히 변하는데 반해 그에 대응해야 할 주체인 우리, 그리고 우리가 속한 조직은 여전히 아직 많은 부분에서 미처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시스템이 그렇고, 그에 어느덧 속박된 우리가 아직 그렇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여전히 강력한 테일러리즘 시스템 속에 있습니다.


 예컨대 시간이 지나면 자동적으로 역할, 책임이 상승하고 그 시간에 비례해 보상이 책정됩니다. 이 체계는 권위가 시간, 직책에 따라 자동부여됨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리더는 ‘과거의 희생, 정치에 대한 보상’처럼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현실 세계는 더 이상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직장이 아닌 직업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기에도 조직 내의 직무 순환 시스템이 이를 방해합니다. 자기 고유의 커리어 패스를 적어도 한 조직안에서는 자신의 비전, 뜻대로 이루기 어려운 구조입니다. 이런 관료 시스템 속에 익숙해졌던 일부 구성원은 지금의 갑작스런 변화가 때로는 공포스럽습니다. 조직이 과거에 강조하고 요구하던 정해진 경로, 그에 따른 복종과 그에 비롯한 보상과 질서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조직과 개인 모두에게 깊은 불안감을 선사합니다. 혼란스런 상황 속에서 기업은 소위 유행하는 새로운 트렌드를 앞다투어 다루고 도입하려 하지만, 사실 그 역시 매우 겉핥기 식의 스쳐 지나가는 것에 불과한 경우가 많습니다. 정작 중요한 새로운 패러다임 변화에 맞는 구조, 시스템, (특히 리더십의) 마인드셋은 좀처럼 변화하지 않습니다. 기업은 그저 조직 내 개개인에 대해 ‘세상이 변했다’, ‘변해라’와 같은 일방적인 요구와 명령을 내리고, 때로는 구조조정 하는 것으로 ‘변화했다’ 주장하려 합니다.


 하지만 이는 조직 내 개인에게는 변화를 빌미로 한 일종의 폭력에 다름 아닐 수 있습니다. 달라진 외부환경에 따른 경영의 패러다임 변화와 그에 비롯해 또 달라지게 될 ‘개인의 변화’, 그 중에서도 개인이 짊어지게 될 부담, 어려움에 대해 무엇보다 세심해야 이해하고 신경 써야 할 주체는 다름 아닌 ‘기업’ 그 자체입니다. 기업과 기업의 리더는 무엇보다 먼저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인간상에 대해 깊게 이해하고 고민하고, 그 관점에서의 인재관리 정책 변화를 꾀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먼저 있는 기업의 시스템으로 인해 고착화되어) 이를 상대적으로 더디게 이해, 실천할 가능성 있는 기업 내 조직 구성원을 위한 기다림과 인내, 그리고 대안도 충분히 고민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reference

[1] 미하이 칙센트미하이_Mihaly Csikszentmihalyi, 몰입의 경영(good business), 민음인, ‘몰입겨엄과 자기 목적성, 100p

[2] Mark Epstein, “Freud and Budda”, http://spiritualprogressives.org/newsite/?p=651.Retrieved Feb.8,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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