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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thy Feb 05. 2021

나를 애도하기 위해 쓰는 글

상세한 자기고백 주의


지난 사흘 동안 나의 일상은 한마디로 지옥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돈 300만원을 잃었고 인간으로서 바닥으로 자존심을 내팽개쳐가며 구걸하여 150만원만 겨우 돌려받았다. 300만원은 외벌이로 바깥일도 하면서 아이도 키우고 있는 내가 6개월 남짓, 사고 싶은 유기농 식재료로 내 아이 밥을 건강하게 해먹일 수 있는, 중요한 비상 자금이었다. 그래서 애 엄마로서 있는 자존심 없는 자존심 다 내려놓고 사정하여 겨우 150만원을 돌려받은 일이 있었다.

사정을 구체적으로 다 말할 수는 없고 요컨대, 복비에 눈먼 욕심 많은 부동산의 장난질 및 아파트 매매 경험 제로의 사회 물정에 얕았던 어리숙한 우리 부부의 실수로 얼떨결에 아파트 매매 가계약을 했다가 하루만에 번복을 했었다. 부동산의 장난질에 놀아난 우리는 가계약금 300만원을 통째로 날릴 뻔했고, 당연히 집주인은 계약금을 꿀꺽 하고 안 돌려줘도 그만이었다. 주변에서는 구차하게 굴지 말고 그냥 깨끗이 포기하고 인생 경험 호되게 했다 생각하고 넘어가라고 했지만, 아이 키우는 엄마로서 그럴 수 없었다. 300만원으로 내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무언가, 300만원을 아끼기 위해 7년간 살림 동안 내가 한 처절한 노력을 감히 부정할 수 없어서 나는 집주인에게 읍소했다. 장문의 문자로 사정을 알리고, 제발 선처를 빌어달라고 호소했다.

집주인은 처음에는 냉랭했지만 나중에는 선심 써서 “물론 내가 이거 안 돌려줘도 그만이지만 절반이라도 먹고 떨어지겠느냐”는 식으로 반액만 돌려주었고, 나는 그런 말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전화기 너머 보이지 않은 그분께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드렸다. 그만큼 나는 절실했고, 내 지금 현실이 그만큼 녹록지 않다. 그런데 내가 이 글을 쓴 이유이자 내가 가엾은 이유는 그게 아니다. 이 정도 일쯤은 삼땡 인생에서 아무렇지 않은, 술자리에서 우스갯소리로 몇 번을 우려먹으면서 “아아 그땐 그랬지” 웃으면서 넘길 일이다.

이 글보다 더 세세하게 전후 사정을 다 알고 있었던 친정 엄마 vs 시부모님의 반응이 기가 막히도록 극명한 차이를 보였단 데에 있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열의 아홉은 시부모님께서 내 가슴을 후벼파는 말을 했겠거니 하겠지만, 내가 가엾다고 한 데에 좀 더 주목해야 한다.

돈을 날릴 뻔 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시아버지는 내게 전화해주셨다. “다은아, 우째 세상이 노랗냐? 속이 휑하지? 그런데 어쩔 것이냐. 세상 살다보면 그거 아무것도 아니다. 전 재산을 잃고도 버티는 사람들이 있다. 너희들이 공짜로 얻은 소나타 그거 300만원 주고 샀다고 생각해라. 주말에 맥주 한 잔 하자.”

똑같은 소식을 친정엄마에게 전했을 때 엄마는 중간 중간 내 말을 다 듣지 않고 끼어들며 나의 과오를 탓했다. “아니 됐고, 무슨 상황인지는 알겠고, 너 그 집 사려고 하기 전에 등기부등본이랑 그 집 문제 없는지는 다 확인했어?” “아니 니가 그 상황에서 그렇게 했으면 안 되지. 좀 더 딱 부러지게 말했어야지. 그랬으니 니 책임이지. 넌 돈 못 돌려받아도 할 수 없어. 인생 공부 했다 생각해.”

계약금의 일부라도 돌려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시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아이고 하느님 감사합니다. 진짜 그분 복 받으셔야겠다. 네 소식 듣자마자 너희들 이모마저도 ‘내가 가서 사정이라도 해볼까?’ 하면서 같이 늬들 걱정했는데. 얼마나 다행이야. 지금 당장 전화해서 기쁜 소식 알려야겠다. 감사 헌금 꼭 해야겠다.”

있는 자존심 없는 자존심 다 내려놓고, 그분께 그렇게 잘못한 일만도 아니건만 대역죄라도 지은마냥 나 자신을 깔아뭉개고 그분을 드높여가며 사과문을 쓴 딸에게, 첫 번째 통화에서는 200만원 준다고 해놓고서 몇 시간 뒤에 좀 더 저울질하더니 150만원으로 깎아서 이거라도 받겠느냐는 식으로 “내가 정말 이 돈 안 돌려줘도 되는데, 새댁 하는 게 딱해서 내가 조금이라도 돌려주려는 거야. 이거라도 받는 게 낫지 않겠어?” 하시는 말씀에 “아이고 그렇게라도 생각해주시니 감사하지요”라며 마지막 자존심마저 사뿐히 즈려밟았던 딸에게. 친정엄마는 오히려 좀 더 구걸하라고 조언하였다.

“다시 집주인에게 읍소해봐.”
“아이고, 그나마라도 받겠느냐고 전화하는 사람한테 어떻게 더 달라고 해.”
“더 읍소해 봐.”
“됐어. 그건 너무 구차해. 이미 받아놓고서 거기에다가 더 달라고 하는 거야말로 거지야.”
“구차하다고? 몇 십만 원이 뉘 집 애 이름이야?”
“그럼 엄마가 해. 감사할 줄 모르고 그러는 거 정말 아니야.”
“그럼 나한테 전화번호 알려줘 봐. 내가 읍소할 테니.”

그 순간 깨달았다. 엄마는 지금 내가 이 일을 엄마에게 들려주고 있는 이유를 모르는구나. 내가 이토록 속상했고 힘들었다는 사실보다, 200만원에서 150만원으로 줄어든 차액 50만원이 더 중요하구나. 물론 나의 친정엄마가 나에게 일부러 상처 주려고 그런 게 아니라는 거는 지겹도록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한 가지 떠오른 게 있었다.

나는 살아오면서 (돈 때문이라는 이름으로) 귀하게 크지 못했던 경험이 많이 있었겠구나.
내가 기억하지도 못하는 어떤 순간들에, 나는 귀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딸로 살았겠구나.
돈이 없어도 마음이 부자인 사람들과, 돈도 없는데 마음은 더 가난한 사람들은
자식을 대하는 태도가 이다지도 다르구나.

시댁도 친정도 돈 때문에 가난 때문에 지긋지긋했던 것은 똑같다. 둘 다 똑같이 IMF 때 집이 지독하게 망했다. 하지만 시댁은 집이 망했어도 자식들을 귀하게 여길 줄 알았던 반면, 가난 때문에 밥벌이와 치열한 삶에 이골이 나서 자식의 마음을 들여다볼 줄 몰랐던 엄마는 자식의 외로움을, 서글픔을, 자식이 세상 눈치를 너무 많이 보고 살고 있단 사실을 차마 알지 못했다.

나는 10년 전 남편을 봤을 때부터 참 신기했다. 어떻게 그렇게 사람이 맑을 수 있는가. 그렇게 어려움을 겪고서도 부침을 겪지 않은 온실 속 화초처럼 따뜻한가. 그건 오롯한 시부모님의 배려와 사랑이었다.

집이 망하고 대저택에서 살던 남편이 허름하고 낡은 어느 집으로 이사를 가던 날이었다. 고등학생인 남편은 야자 끝나고 나서 연락받은 주소로, 인생 처음 가는 어느 으스스한 골목길을 걸어 생판 모르는 그 집을 찾아갔더랬다. 시부모님에게 그날은 얼마나 지옥이었을까. 사업이 망했고, 온 집에 빨간 딱지가 붙은 것을 뒤로하고, 인생 처음 마주하는 가난한 동네로 이사를 왔다. 개차반 같은 현실을 온 피부로 마주한 그들이 땅을 치고 오열하고 인생을 비관하며 술을 퍼붓고 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날에 시부모님은 이삿짐 정리를 끝내고 묵묵히 아들을 기다렸다고 한다. 할 말도 없이 멍하니 앉아서 벽만 바라보고 있다가, 야자를 끝마치고 그 집을 찾아온 아들을 반색하며 환영했다고 한다. “아이고 내 새끼. 어디 가서 길 잃어버리고 살진 않겠네! 어떻게 잘 찾아왔구나.” 그렇게 인생이 망한 날에조차 내 새끼가 집을 잘 못 찾아오지는 않을까 걱정했고, 내 새끼가 초라한 집에서 마주할 비참함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자, 애써 웃으면서 아들을 맞이했다고 한다. 그리고 진짜 웃었다고 한다. 이 일화는 나중에 시부모님께서 들려주셔서 생생하게 복구가 되었을 뿐 남편은 특별히 기억하지도 못했던 일이라고 한다. 그에게는 시부모의 그런 배려가, 봄날의 가랑비처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래서 그 낯선 집에 들어갔을 때 그저 ‘아 여기가 우리 새집이구나.’ 하고 말았던 것 같다고 했다. 그는 그런 사랑 속에서 컸다.

하지만 나는 생생히 기억한다. 나는 내 엄마의 치열한 인생에서 뒤켠에 있었을 뿐이었다. 엄마는 나를 먹여 살리기 위해 생의 최전선에서 혈투했고, 나는 그런 엄마의 그림자만 보았다. 정작 엄마의 따뜻한 눈길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그녀의 뒤에서 패잔병처럼 지친 엄마를 위로해야 했었고, 심심한 엄마의 인생에 위로가 되고자 삐에로처럼 수다를 떨어야 했었다. 그녀를 위해서 나는 늘 무언가를 했어야 했다.

엄마가 벌어온, 그 시발 지긋지긋한 돈. 그 돈을 아끼기 위해 얼마나 지독하게 노력했던가. 고등학생인 나는 문제집 한 권 살 돈을 아끼기 위해 어느 날엔가는 새벽 등굣길에 문제집 한 권을 산 다음, 그날 새벽부터 야자 끝나는 밤 10시까지 그 한 권의 문제집만 죽어라 풀었다. 내가 오늘 너를 다 풀고야 만다. 왜? 정답을 연습장에 쓰고, 채점도 그 위에 해가며 문제집을 샀을 때 그대로 깨끗하게 두어야 다른 새 문제집으로 교환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다음날 다시 서점에 가서 새 문제집으로 교환을 하며 나는 스스로의 알뜰함에 탄복했다. ‘나는 어떻게 이렇게 잔머리를 잘 굴리지?’ 그때는 나 스스로가 기특해 마지않았는데, 14년이 지난 지금, 나는 스스로를 기특해했던 그 녀석이 안쓰러워 죽겠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그렇게 억척스러웠구나. 그저 천진난만해도 될 때에, 굳이 짊어지지 않아도 될 짐마저 자처하며 살았었구나.‘ 교무실에 가서 선생님들에게 들어오는 증정본 문제집을 쓸어 왔었다. 이미 정답이 쓰여 있는 문제집. 그걸 감사해하며 넙죽 받아서 일일이 답을 화이트로 지운 뒤 풀었다. 그렇게 치열하게, 잠이 올 땐 뺨을 후려쳐가며 미친년 소리 들어가며 죽기 살기로 공부했다. 그건 자아실현의 문제가 아니었다. 생을 건 사투였다. 지긋지긋한 가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동앗줄. 개천에서 살아남기 위한 새끼 미꾸라지의 발악.

밥을 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급식을 먹을 때는 2인분씩 먹었다. 뒤돌아서면 배고픈 시기에 간식을 사먹을 돈이 없어서 급식 시간만 기다리며 그렇게 자주 허기졌다. 친구들에게는 쉬는 시간마저 공부해야 한다며 빡빡한 모범생인 척 굴면서, 배고픔을 속으로 삭혔다. 때때로 야자를 땡 치고 급식 지겹다며 교문 밖으로 밥을 사먹으러 나가는 아이들에게서 ‘석식 3천원을 너끈히 버릴 수 있는 여유’를 느껴가며 비참하기는 했지만, 그깟 기분 따위가 날 먹여살리진 않는다며 2인분씩 밥을 입에 욱여넣었다. 그렇게 애잔했다.


물론 내 엄마는 사는 게 힘들다는 이유로 고등학생이었던 내가 겪고 있던 다른 종류의 부침에 대해 일일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공부하는 게 성적 올리는 게 힘들겠거니 짐작하셨으리라 내가 짐작할 뿐이다. 그녀는 내가 어떤 학교생활로 어떤 시선 속에서 어떤 열등감을 느껴가며 공부했는지 굳이 알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수험시절이 끝나고 명문대에 합격한 나는 그녀의 자랑스러운 배지가 되었다. 그렇게 힘든 속에서도 딸자식 잘 키운 엄마가 되었고, 나는 어떤 열등감 속에서 마음이 문드러져가며 그 시절을 보냈는지 따위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다.반짝반짝 빛나는 합격증 뒤에 숨겨진 나의 노력은 고작 여느 수험생의 그것처럼 성적을 올리기 위한 치열한 사투로만 치부되었다.


그래서 반짝반짝 빛나는 배지로 그녀의 왼쪽 가슴에 동행하여 엄마의 친구들을 만나던 날이면, 나는 그렇게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엄마의 친구들은 말그대로 엄마의 친구일 뿐이라, 엄마의 고초만 안쓰러울 수밖에 없으므로 엄마를 칭찬하고 응원했으며 오로지 나는 결과일 뿐이었다. 나의 과정은 참 서글프고 험난했는데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무심한 공범자들 같으니.


그런데 똑같이 집이 망했던 남편은, 똑같이 몸도 마음도 가시밭길이었던 수험생 시절에 그렇게까지 가난을 체감하며 보내진 않았다고 한다. 시부모님이 그때 당시 가장 신경 썼던 부분이 ‘과일’이었단다. 아이들이 먹는 것 입는 것 갖고 ‘우리 집이 망했구나’ 느끼면 안 된다고, 굳이 운동화가 다 헐지 않았을 때에도 새 운동화를 사주고, 굳이 안 먹겠다는 아이에게 밥 먹고 후식으로 제철 과일을 깎아 주셨단다. 아이들이 가장 피부로 느끼는, 입고 먹고 자는 것에서 결핍을 느끼지 않도록, 당신이 할 수 있는 것 열 가지를 줄이고, 아이에게 한 가지를 보태셨다.

지난 결혼 7년간 내가 느꼈던 박탈감을 일일이 적으려야 다 적을 수 없다만. 이렇게 사람이 다르고야 만다. 오늘 나는 나를 애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귀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컸을 수 있겠구나, 아니, 실제로 그렇게 컸구나.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쓰기 전에, 굳이 맥주를 캔 째로 먹지 않고 예쁜 맥주잔에 따르고, 냉동실에 묵혀두었던 빵을 정성스레 다시 굽고, 내가 직접 만든 깻잎페스토까지 듬뿍 떠서 술상을 그럴 듯하게 차렸다. 그게 뭐라고 사진으로 남겨가며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를 귀하게 대해주고 싶어서. 나를 애도하고, 내 자식만큼은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지긋지긋한 대물림을 끊겠노라고 이를 악물고 다짐하면서.

글을 쓰면서 오열할 줄 알았는데, 너무나도 글이 사실적인 르뽀 느낌이라 울컥했던 감정마저 쏙 들어가버렸다. 나는 내 시부모에게서 뒤늦게 받게 되는 이 사랑으로, 나의 과거를 뛰어넘는 현재가 되고야 말 것이다. 내 부모의 부족함이 서른셋 먹은 나를 여전히 울게 만들고, 나를 자꾸만 과거의 그 어느 순간으로 끌고가면서 ‘거봐, 너는 네가 벗어난 줄 알았지? 여전히 지옥이야.’ 하며 나를 올가미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처럼 비웃는 것 같지만. 나는 분명 달라졌다.

비참했던 과거와 오늘마저 이렇게 글로 남기면서도 분노할지언정 나의 달라질 미래를 그릴 수 있는 힘이 생겼다. 나는 좀 더 섬세하게 지효를 사랑할 것이다. 그냥 사랑하지 않고 애틋하게 사랑할 것이다. 억척스럽게 사랑하지 않고, 따뜻하게 사랑할 것이다. 그 어떤 순간에도 지효의 마음을 가장 먼저 들여다볼 것이다. 변명하기보다 사과할 것이다. 나는 절대로 내 딸을 내 엄마처럼 키우지 않을 것이다. 많은 것이 비슷하고 닮았을지언정 조금은 다를 것이다. 나는 나의 과거를 뛰어넘을 것이다. 나는 다르고야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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