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 후 한 달이 되어갈 무렵, 내게 중요한 미션이 주어졌다. 자사브랜드 중 하나인 빅브랜드의 새로운 메인 카피를 쓰는 일이었다. 잘만 한다면 글로벌 영상광고, 옥외광고, 제품 패키지, 각종 SNS 등 내가 쓴 카피가 브랜드 전반의 모든 홍보물에 입혀지는 굉장한 포트폴리오가 되는 의미 있는 일이었다. 이 업무를 주며 리더는 내게 말했다.
이 일에서는 네가 전문가이고,
그래서 팀원으로 채용한 것이니
그에 맞는 역할을 해내야 한다
이 얘기는 그 뒤로도 몇 번을 거듭해 들었다. 솔직한 심정은 잘하고 싶은 마음보다는 자신이 없고, 부담스러운 마음이 더 컸다. 직전회사였던 에이전시에서는 같은 일을 팀 리더가 주도로 하여 팀 프로젝트로 진행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처럼 큰 브랜드는 진행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니, 나로서는 한 번도 리딩해본 적 없는 더 큰 규모의 업무를 홀로 리딩하는 상황이 부담스럽기만 했다.
변명을 하자면, 나는 사원 4년 차로 입사한 아직은 주니어급이었기에, 전문 에이전시에서 리더급이 팀 프로젝트로 진행하는 작업을 나 홀로 하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라는 생각이 들었다.(물론 팀 내 선배들에게 조언은 구할 수 있긴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주니어급이라 할지라도 '경력직'이라는 타이틀 앞엔 모두가 자신의 역할을 완벽히 해내야 했다.
어쨌든, 정말 잘 해내고 싶었다. 아니, 잘해야만 했다. 그래서 업무시간은 물론 퇴근 후에도, 주말에도 개인적으로 관련 책도 구입해 스터디를 했다. 정말이지 손을 놓을 수 없었다. 그리고 작업한 결과물을 중간중간 선배들에게 보여주며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선배들의 피드백은 아직 부족하다는 입장이었다.
선배들의 의견을 반영해 개선해 나갔고, 팀 리더에게 보고를 했다. 그러나 이 역시 부족하고, 아쉽다는 반응이었다.(싸늘했다) 팀 리더는 이 작업이 답이 없는 일이라 내게는 어려운 일일 수 있다고 얘기해 주었다. 하지만 경력직으로 온 만큼 나의 역할을 해냈으면 좋겠다고 했다. 도움이 필요하면 당연히 자신도, 선배들도 적극 도와줄 거라는 고마운 말과 함께.
그 뒤로 몇 번의 보고의 과정이 있었지만 부족한 결과물에 리더와 선배들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고, 그에 따라 난 계속해서 주눅이 들었다. 이제는 그들의 시간을 빼앗아가며 보고를 하겠다는 것도 미안하고, 눈치가 보이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렇게 지쳐갈 무렵, 이 업무는 팀에서 잠시 잊혀 갔다. 당장 급한 다른 업무에 더 집중했다. (에이전시와는 다른 인하우스의 특징이기도 한 기한이 없는 업무 프로세스다)
돌이켜보면, 나의 업무 태도는 늘 수동적이었다. 일을 잘 해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솔직히 리더의 눈치를 보는 쪽이 더 컸던 것 같다. 애석하게도 나는 강하게 채찍질하면 오기가 생기는 타입이 아닌, 오히려 더 주눅이 드는 사람이었다. 나도 처음 알게 된 나의 모습이었다.
또한, 난 큰 프로젝트를 뭘 믿고 나한테 맡기는 건지, 원망스러운 마음이 컸다. 그러나 오히려 이 기회를 발판 삼아 주도적으로 잘해보겠다는 마음으로 임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나의 이러한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태도가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을 리 없었을 거라는 것도 이제야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