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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작가 Sep 20. 2023

빗 속의 타자소리

비 오는 날에도 감성적이지 않게 된 건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다.

당장 출퇴근길에 신발 앞코와 양말이 젖어들어가는 느낌을 혐오하게 되면

자연스레 비 오는 것 자체를 꺼리게 된다.

그럼에도 가만히 앉아 빗소리를 듣고 있으면 이처럼 평온할 수가 없다.

물이 많은 사주라 그런 걸까, 빗방울이 내 몸속의 웅덩이에 둥둥 울리는 것만 같다.


비가 내리면 나는 모순적인 인간이 된다.

무언가를 쓰고 싶고, 어떤 내용을 쓸지도 머릿속에 빤히 보이는데

손가락을 움직이기가 싫어진다.

생각과 행동의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더더욱 생각이 많아진다.

무작정 쓰자고 자리에 앉아도, 그냥 공포영화나 한 편 때리면서

가만히, 마냥 가만히 있고 싶다.


안다, 빗소리와 함께 들리는 타자소리는 고요하지만 아름다운 연주라는 걸.

오늘도 스스로 개최한 연주회, 객석에는 나 홀로.

눈을 감고도 쓸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사치인가.

종종 눈을 감은 채로 눈꺼풀 안에서 떠오르는 글자의 잔상을 기록한다.

그건 꽤 멋진 일이다.

박자만 다를 뿐이지, 모든 연주가 훌륭하다.

잘 써진 글 같은 건 없다.

기록된 글자와 기록되지 않은 글자만이 존재한다.


이제 보니 빗소리와 타자소리가 제법 닮았다.

내 몸은 어떤 바다일까.

중요한 건 너비가 아니라 깊이일 것이다.

표면을 두드리는 것만으로는 그 너머까지 다 알 수 없는.

어쩌면 난 표면을 때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끝없는 잠수를 하고 싶은 걸지도.

이 바다에 표류하는 글자들을 한 아름 끌어안고

뭉근한 헤엄을 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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