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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작가 Dec 18. 2023

흔들리다

자서진 3

아직 흥분이 다 가시지 않았지만 최대한 이성적이게 메일을 썼다.

고민고민하던 나는 전체 원고를 다 보냈다.

어떤 종류의 예술이든 작품을 통째로 건넨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든 작품은 내 자식과도 같다.

그 자식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날까 봐, 온갖 종류의 상상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주먹 꽉 쥐고 원고를 보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답장은 긍정적이었다.

문제라면 과하게 긍정적이라는 점?

예의를 갖춘 메일 속에는 계약서가 동봉되어 있었다.

계약서를 검토하고 작성해서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상투적인 계약서 안에서 나의 위치는 너무도 명확하게 드러나 있었다.

저작권 소유와 기타 몇 가지를 제외하면 내게 남는 것은 그리 크지 않았다.

당연했다.

난 등단하지도, 책을 출간하지도, 심지어 이름이 알려지지도 않은

현재로선 그냥 일반인인 데다가 좋게 쳐야 작가 지망생이니까.


작가 지망생, 나는 그 단어로부터 늘 자유롭지 못했다.

지망하는 사람일 뿐이지, 단 한 번도 그 업에 뛰어든 적은 없는 사람.

그렇기에 보수를 많이 줄 필요도, 위험을 감수할 정도의 투자를 할 이유도 없는.

메일에는 '작가님'이라고 표기되어 있지만, 사실 아직 작가라곤 할 수 없는.

깨달았다, 나는 단 한 번도 작가라는 이름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는 걸.

그래서 그토록 싫어했었지, 작가 지망생이란 말.


어정쩡하게 받아 든 계약서를 보며 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출판사 입장에서 분명 최대는 아닌, 그래도 최선은 다했을 계약서였다.

이 계약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자리를 박차고 나가면 그만이었다.

그러니까, 계약 상 을이 되고 싶지 않으면 아직 갑인 상황에서 끝내면 되었다.

알고 있는데도 '에잇, 퉤' 하고 떠날 수 없음은 내 분수를 너무 잘 알고 있기에.


내 글이 사랑받을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는 생각했다.

그렇다고 내 글에 돈을 투자하겠다는 사람이 또 나타날까?

자기 명예를 걸고 내 글에 가장 높은 상을 주겠다는 사람이 또 나타날까?

이번 기회가 아니면 다음 기회는 올까? 언제? 안 오면 어쩌게?

난감한 상황에 정지된 주인공의 얼굴을 하곤 결정하지 못하는 꼴이란.


흔들리고 있었다.

작았던 들썩임은 큰 지진을 예고했던 것일지도.

나의 삶은 상하좌우로 끊임없이 몸을 흔들며 나에게 결정을 종용하고 있었다.

어쩔 거냐고, 이제부턴 어디로 가든 너의 책임이라고.

어떤 선택을 하건 이후의 인생은 달라질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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