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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카 Oct 04. 2021

MBTI에 과몰입하는 사람

'나'같은 사람이 세상에 몇 프로?

영화 <우리들>의 첫 장면은 체육시간 피구를 하기 위해 팀을 이룰 친구를 한 명씩 뽑는 목소리와 자신의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는 '선'의 초조한 얼굴에 집중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이후의 장면은 모른다. 채널을 돌리다 자연스럽게 보게 된 영화 소개 프로그램 속의 이 장면은 어떤 잔인한 영화보다 똑바로 쳐다보기 어려웠기에.


실습을 나온 교생 선생님들은 첫 시간에 우리 반 학생들에게 한 명 한 명씩 일어나서 특별한 제스처와 함께 자기소개를 하라고 시켰다. 앞자리부터 한 명씩 일어나 손을 흔들고, 사랑의 총알을 하며 밝게 인사를 하는 동안 점점 속이 울렁거렸다. 뒷자리에 앉은 내 순서까지 오면서 팔자에도 없는 익살스러운 성격 연기도 버거운 와중에 그만 제스처 소재까지 똑 떨어졌고, 나는 결국 죄송할 게 없지만 굉장히 죄송한 표정으로 '할 게 없어요...'라고 말하며 자리에 앉아 재미있게 이어져오던 분위기를 싸하게 가라앉혔다.

교생 선생님들도 첫 수업을 앞두고 들떠서 이것저것 준비해 온 것이겠지만, 이런 분위기를 힘겨워할 학생이 한두 명쯤은 있을 거라는 걸 전혀 계산하지 않은 수업방식이 아직까지도 못내 아쉽다.


나 빼고 남들은 다 스트레스 없이 잘만 적응하는 것 같은데 나만 왜 그럴까, 하는 의문을 가지며 힘겨운 노력을 해오던 차에 MBTI 테스트의 유행이 시작되었다. 남들 다 하는 테스트라는 말에 휩쓸려서 시도해보고 이내 나의 유형조차 잊어버린 것도 잠시, 알파벳 네 글자의 생소한 조합이 모르는 새 귀에 익고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도 구별하게 될 정도로 어느샌가 MBTI 콘텐츠들에 몰두하게 되었다.

유난히 내성적이었던(대학생 김태리 버전 아니고) 성향과, 무던하고 싶어도 복잡한 내면 때문에 피곤할 수밖에 없는 까탈스러운 성격을 가진 부류가 이 세상 사람들의 몇 퍼센트 씩이나 차지할 정도라니. '나만 이런 게 아니었구나'하는 새로운 깨달음과 동시에 안도감이 들었다.


나에 대한 주변의 평가가 늘 궁금했지만 행여 부정적인 말이라도 들을까 싶어 한 번도 누군가에게 물어본 적은 없었다. 그렇지만 MBTI 결과지에 빌려 뼈 아픈 지적 없이도 나라는 사람에 대한 평가를 간접적으로나마 받아볼 수 있다는 게, 그리고 그 대상이 온전히 나의 평소 모습을 기반으로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기에 가벼운 기분으로 마주할 수 있을 만큼 부담이 없었다. 그래서 오늘도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탐구하기 위해 MBTI 콘텐츠를 찾아보곤 한다.

이전에는 이해하기 어려웠던 이들의 말과 행동도 단지 나와 사고를 하는 방향이 달라서 그랬던 거구나 하며 너그러워지던 차, 다른 사람의 MBTI도 차츰 궁금해졌다.


개인 사찰 멈춰!!! (출처 : 유미의 MBTI들)


요즘 과몰입 중인 프로그램 <스트릿 우먼 파이터>를 더욱 흥미롭게 시청하게 되는 건 각각의 개성이 뚜렷한 댄서들의 캐릭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춤에 대한 무한한 자신감을 뿜어내며, 남에게 미움을 살 수 있는 솔직한 발언도 서슴지 않으며 크루 간의 선의의 경쟁을 벌이는 모습을 보며 비록 댄서와는 거리가 먼 시청자임에도 그들을 리스펙 하게 된다.


특히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는 다수의 댄서들이 'ENTP'라는 점을 발견하곤 이 유형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치솟았다. 본인의 능력에 대한 티끌만큼의 의심 없이 자신감과 확신으로 가득한, 역경이 덮쳐와도 하루 이상은 우울함을 허락하지 않을 것만 같은 늘 밝고 활기찬 사람.

평소에 즐겨 듣는 DAY 6의 대부분 곡에 작사를 한 멤버 영케이 또한 ENTP 유형인데, 그가 가사를 쓴 <완전 멋지잖아>라는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다들 수군대 대체 누군데
저리 멋있대 쟤 봐 쟤 봐
아주 이놈의 인기를 어떻게 해
다 쳐다보네 아주 피곤해
거의 뭐 연예인 I know I know
아주 이놈의 매력을 어떻게 해


이 곡에서 말하고 있는 '완전 멋진'은 알고 보니 좋아하는 대상에게 다가가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향한 것이었다(!) 설령 누군가가 코웃음을 치더라도 전혀 끄덕하지 않을 법한 '자기 잘났다'하는 저것이 ENTP 특유의 자신감이란 말인가? 나와는 마치 S와 N극처럼 대척점에 서있는 그들이 어찌나 멋있고 반짝여 보이던지.


그렇지만 누군가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상대의 성격이 궁금하다고 대뜸 MBTI를 묻거나, MBTI가 얼마나 흥미로운지에 대해 신나서 이야기하진 않는다. MBTI 이전 혈액형 열풍이 한바탕 휩쓸었던 적이 있었다. 영화 <달콤, 살벌한 연인>에서 혈액형 별 성격을 줄줄 읊는 미나에게 대우가 일갈하는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게 뭐가 과학적이에요, 죄다 헛소리지. 백인들이 다른 인종보다 우수하다는 우생학에서 처음 출발한 게 혈액형 이론입니다. 나중에 일본 작가 하나가 지 주위 사람들 2~300명 대상으로 조사해서 책 하나 냈는데, 그걸 계속 우려먹고 있는 거라고요! 정작 중요한 질문에는 동문서답이고, 혈액형이니 별자리니 그따위 소리나 해대고."


혈액형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의 성격을 나눌 수 있을까 하며 궁금해했던 어린 시절의 나는 대우가 또박또박 날리는 촌철살인의 대사에 뜨끔함을 느끼며 '밖에선 저러지 말아야겠다...'라고 생각한 적이 있기에 검사의 신빙성에 대해 논란이 있는 MBTI도 그저 가벼운 취미로 즐겨야지 하고 다짐하는 바다.

또 나 같은 사람도 있다면 어딘가에선 사람들 참 할 짓도 없나 보다 하며 한심한 표정으로 혀를 차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MBTI를 불신하는 사람은 무슨 유형일까? 한번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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