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걸 너무나 좋아해서 아침에 눈 뜨자마자 동화책에 얼굴을 파묻고 읽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어두운 그늘 밑에서도, 흔들리는 차 안에서도 책을 읽느라 덕분에 근시가 너무 빨리 오는 바람에 유치원 졸업식 때부터 안경을 쓰게 될 정도였는데 그 이후로도 책을 열심히 읽었느냐 하면, 학업에 열중하고 수능 준비, 취업 준비에 치이며 우선순위에서 책이 계속 밀리다 보니 아무튼... 그렇게 됐다.
그러던 중 오랫동안 영어 스터디를 같이 하던 친구들이 이번엔 독서 모임을 만들자고 제안했고, 약간의 강제성이 있어야만 억지로라도 하는 우리네 습성을 일찍이 파악한 나는 그렇지 않아도 자주 쓰던 단어마저 '뭐더라?'가물가물해하는퇴화된 어휘력에 독서의 필요성을 통감하며 바로 모임을 만들게 됐다.
각자 본인들이 읽은 책들을 소개하는 시간인 자유 독서 1회, 그다음 1회는 각자 읽고 싶은 책을 추천한 뒤 투표를 통해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책을 모두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지정 독서 모임 순서로 배치를 했으며 책을 읽을 시간은 적어도 2주 정도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격주 모임을 갖기로 했다. 부담 없이 가볍게 책에 대한 소통을 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스터디 가입요건 또한 간단하게 만들었다.
1. 퇴근 & 하교 후 뭐라도 하고 싶은 분들 2. 몇 장 넘기다가 방치한 책들이 쌓여있는 분들 3. 독서를 통해 자기 계발을 원하는 분들
※ 5회 이상 미참여 시 / 대화에 장기간 답변 없을 시 강퇴
시스템은 이렇게 정해졌겠다, 독서모임을 구성하는 건 사람이므로 사람관리 또한 책을 읽어오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었다. 새로 모임에 참여한 사람이 뻘쭘하지 않도록 누구나 편히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어야 했고, 4-6명 정도의 인원이 앉아 대화를 해도 너무 시끄럽게 들리지 않을 법한 협소하지 않은 카페를 여러 군데 후보지로 두며 결정된 인원수에 맞게 여러 카페에서 스터디를 진행했다.
모임의 리더라고 해서 방대한 독서량을 자랑하거나 심도 깊은 토론을 할 능력을 특별히 갖춘 건 아니기에 좌중을 휘어잡는 리더십 발휘라기보다, 인원 모집 및 장소와 도서 선정 등의 그저 자질구레한 매니징을 도맡아 하는 것이 리더의 주 역할이었다.
그간 모임에 여러 사람이 들어오고 나갔기에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로 인해 힘든 것도 있었다. 연락처를 별도로 받는 게 아니기에 오픈 카톡방으로 모집과 소통을 하는데 그냥 말없이 나가버리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물론 당연히 그만둘 수 있지만, 모임도 몇 번 나와 얼굴도 여러 번 본 사이에 사정 설명 한마디 없이 [OOO님이 나갔습니다.]라는 표시만 채팅창에 휑뎅그렁하게 남은 걸 볼 때의 섭섭함이란. 게다가 그렇게 나갔던 사람이 몇 달 후 다른 독서모임인 줄 알았는지 아무렇지 않게 잘 부탁드린다며 들어온 적이 있어 황당함을 자아내기도 했다.
참여도가 낮아도 문제지만 도리어 책은 대충 읽으면서 모임은 꼬박꼬박 참여하는 경우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다. 5회 이상 불참은 퇴장이라는 룰에 본인이 해당되는 꼴은 못 볼 것 같았는지, 네 번 불참을 한 이후는 부득불 모임에 나왔던 모임원이 있었다. 오늘 다룰 책이 어떤 건지도 몰랐던 상태로 와서는 남이 말하는 감상을 토대로 상상력에 의존하며 이야기하는 신기한 스킬을 선보이기도 했다.
왜 굳이 모임을 만들어서 받지 않아도 될 이런저런 사람 스트레스를 받는 걸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각자의 생각과 가치관을 공유하는 시간은 흥미롭고, 이렇게 일부러 만든 시간이 아니면 좀처럼 자연스레 가질 기회가 없기에 소중하다.
코로나가 심했던 터라 다 같이 모일 수 없어 스터디는 그간 기나긴 휴지기에 들어갔다. 참여도가 높았던 멤버들은 마지막 모임 이후 일 년이나 되는 시간 동안 아무도 이탈하지 않고 모임이 재개되기를 진득하게 기다려주었는데, 예상했던 대로 대부분의 모임원이 그동안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에게 정확히는 독서가 아닌 독서'모임'이 취미라 해야겠다. 혼자 즐기는 것도 좋지만 다 같이 함께하는 취미도 다른 느낌으로 즐거움을 준다. 다시 시작된 모임 시즌2가 활발하게 진행되길 바라며 같이 열심히 읽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