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민화 Aug 16. 2022

누군가를 위해 버틸 수 있는 삶의 한계

주말에 이어 광복절이 이어진 연휴를 앞두고 이틀 연차를 신청했다. 총닷새의 휴일을 만들고 그동안 미뤄왔던 일들을 처리하고 나서 방학 기간에도 엄마가 일하느라 친구들도 많이 없는 어린이집에 등원했던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리라 마음먹었다.


네 살 아이는 어린이집에 가지 않고 엄마랑 하루 종일 함께 놀 거라는 말에 방방 뛰었다. 기분이 좋다는 것을 티 없이 천진난만한 미소와 온몸으로 표현하는 아이와 함께 온종일 함께 지내면서 아이로부터 넘쳐흘러 나온 행복이 내게로 흘러들어왔다. 어제도 내일도 없는 오직 지금, 매 순간의 기쁨을 만끽하는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는데 눈물이 났다.


'나는 이 아이가 있어서 살아가겠구나.'




동생을 생각하면 '엄마를 생각해서라도 버틸 수는 없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자기가 그런 선택을 하면 평생을 가슴 쥐어뜯으며 슬퍼할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을 생각하면 죽으려는 생각을 하다가도 마음을 바꿀 수 있지는 않았을까...


누구에게도 내보이지 않았고 내보이지 못했던 절망의 늪 속에서 허우적대던 동생의 마음을 뒤늦게라도 헤아려야겠다는 마음에 그 흔적들을 찾고 뒤져봤다.  

동생의 휴대폰에는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부터 자살과 관련된 것들을 검색한 기록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4월... 거의 매일 밤 엄마에게 전화를 건 기록을 보고 알 수 있었다. 동생은 어느 날, 많은 날 죽고 싶었다가도 엄마에게 전화를 걸고 마음을 바꾸는 일을 몇 번이고 반복했었구나. '내가 이런 선택을 하면 남겨질 사람들이 얼마나 슬퍼할까?' 하는 생각으로 몇 번을 버텼겠구나 하는 것을 말이다.


내가 떠나면 평생을 슬퍼할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다 버리고 떠나고 싶은 사람의 마음이란 어떤 것인가. 벌어진 결과를 놓고 보면 자기가 그런 선택을 하면 평생을 가슴 쥐어뜯으며 슬퍼할 사람이 있어도 버틸 수 없는 절망이 있구나. 그냥 다 버리고 다 놔버리고 싶은 마음이라는 게 있구나...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마음이 있었기에 너무 늦었지만 이제라도 알아주고 싶다. 동생은 힘들었을 나날 동안 나는 뭘 하고 살았는지 사진첩 속 사진들의 날짜를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나는 이렇게 웃고 있을 때 넌 죽을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이제는 사진 속에서만 볼 수 있는 동생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왜 말 안 했니. 난 왜 몰랐니... 부질없는 푸념은 마음속에서 시시각각 떠오르고 잦아들기를 반복하고, 숨을 쉬는 일이 이렇게 힘든 일이었던가. 심장 위에 묵직한 뭔가가 얹혀서 짓누르고 있는 느낌이다.


내 마음속에는 슬픔도 있지만 원망도 가득했다. 동생의 사정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던 것이 미안하면서도 동시에 그 지경이 될 때까지 아무 이야기하지 않고  혼자 끙끙 앓았던 게 미련하게 느껴졌다.

  

나는 힘들어도 아이를 위해서라도 살겠다고 마음먹는데 넌 왜 그게 안됐니...라고 생각했다. 그 마음은 사실 동생을 위한 마음이 아니었다. 그냥 좀 살고 싶은데 넌 왜 남을 사람들 마음 생각해서라도 버티지 못하고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해서 내 가슴을, 엄마 가슴을 이렇게 쥐어뜯어놓니... 하는 원망이었다. 엄마를 위해서라도 버틸 수는 없었냐는 생각은 그냥 엄마가 아니고 항암치료를 하고 있는 아픈 엄마이다. 그런 엄마를 생각해서라도 너 힘들었어도 어떻게든 버텼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질책이었다. 내 잔잔한 삶에 감당할 수 없이 거대한 바위를 던져서 가족의 삶을 이렇게 쑥대밭으로 만들었어야 했냐는 원망 말이다.  


그냥 좀 살지.

조금만 더 버티지.

나 죽고 싶다고 힘들어서 못살겠다고 하지. 좀 살지. 아까운 인생 왜 그렇게 가버린 거냐고.


동생은 나의 이런 이기적임으로 늘 양보하면서 살았었지. 피해받기 싫어하는 누나를 배려하고 양보하고 삭히면서 살았었지. 나는 네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도 이러고 있구나...


슬픔과 원망이 뒤죽박죽 되어 마음속을 온통 헤집고 다니면서 이성을 감정을 모두 집어삼켜버린 시간 속에서 나는 그 어떤 일에도 몰입할 수가 없었다. 슬픔은 내가 아보겠다는 시도를 막아섰고, 원망은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게 했다. 그냥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않고 가만히 멈춰서 있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 싶었다.


할 수 없이 살아야만 하는 일상. 슬퍼도 먹고 자고 싸고 일하고 TV도 보고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 웃기도 한다. 껍데기만 움직이는 피상적인 일상 속에서 어떤 날은 뜻대로 되지 않는 이런 삶이라면 그만 살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생각이었을까. 이런 삶이라면 그만 살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 생각해보면 사랑하는 가족, 자식이 있어도 스스로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에 대한 뉴스를 자주 봐왔다. 나는 감히 상상조차 어렵지만 그런 마음이 있는 거다. 곁에서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있음에도 나는 삶을 놔버리고 싶은 마음. 아무리 애써도 지치기만 하는 삶. 내가 살고 싶은 삶에서 한참 벗어난 삶. 이런 지친 삶을 아무와도 나눌 수 없고 이해받을 수 없어 외로운 마음. 더 이상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마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은 마음. 누군가를 위해 버틸 수 있는 삶의 한계는 거기까지일까. 어떤 지친 상태가 지속되어 더 이상 일어설 힘이 없어지면 누군가에게 미안해진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그 마음은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는 걸까. 어떻게 지켜줄 수 있는 걸까.




엄마와 함께 하는 하루가 마냥 행복한 아이를 바라보며 마음을 다잡는 나의 힘듦은 동생이 한계를 넘어서버린 외로움과 절망에 비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누군가를 위해 버틸 수 있는 삶이라는 건, 아직 스스로 일어설 힘이 남아있다는 뜻이 아닐까. 미안함에 눈물이 났다.


그런 마음이 있는 거다. 미리 알았더라면 손잡아주고 지켜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하지만 아무것도 몰랐고 앞으로도 알 수 없을 동생의 마음과도 같은 마음이 있는 거다.  그 마음을 생각하면 나는 그저 둥둥 떠다니는 외딴섬과 같은 존재처럼 느껴진다.  


늦은 헤아림과 미안함으로 울부짖어도 되돌아갈 수 없는 시간. 살아 돌아오지 않을 사람. 받아들여야 하는 운명을 바라본다. 아직은 담담할 수 없기에 너무나 슬프기에 뭐라도 해야 버틸 수 있는 시간이기에 많은 사람들은 웃는 순간에 나는 눈물이 터져 나온다. 이렇게 웃음이 가득한 순간에 너는 세상에 없구나.


이런 나날을 살고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9월 25일(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