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엄마
엄마는 2020년 6월에 위암 4기를 진단받으셨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항암치료를 계속하고 계신다. 위암 분야 명의로 유명한 교수님께 수술받고 싶어서 서울에 있는 병원을 선택했는데 복막에 전이가 있어 수술은 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항암치료를 하고 계신다.
수술을 기대하고 있다가 수술이 어렵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엄마의 표정을 기억한다. 그리고 항암치료를 위해 외과에서 종양내과로 전과되어 첫 진료를 받을 때 교수님의 따뜻한 격려가 기억이 난다. 종양 크기는 기적적으로 많이 줄었고, 다른 장기로의 전이도 발견되지 않아서 엄마는 작년부터 올해 3월까지 거의 1년 동안 3주 간격으로 표적 항암제 하나만 당일 병상에서 맞으시면서 활기차게 생활하고 계셨다.
엄마의 위암 진단 순간부터 동생은 큰 의지가 되었다. 우리는 2008년 위암으로 아빠와 이별했다. 아빠는 진단 당시 '3개월 정도 남았다'라고 이야기를 들었지만 1년을 살다가 가셨다. 그때 우리는 아빠를 제대로 돌봐드리지 못했다. 엄마가 위암을 진단받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엄마도 울고 나도 울었다. 2018년부터 부산 본가를 떠나 원주에서 생활하던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의 위암 진단 소식을 전하면서는 엄마 앞에서 울지 못한 몫까지 몰아서 울었다. 동생은 그런 나를 위로해줬고 같이 있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고, 용기를 줬다.
우리 가족(엄마, 나, 내 남편, 아기)은 부산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엄마가 서울에 진료와 항암치료를 받으러 다니실 때는 거의 혼자 다니셨다. 때로는 보호자가 상주해야 하는 검사나 시술이 있어서 급하게 보호자를 찾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럴 때는 동생이 늘 엄마 곁에 있었다.
'누나야, 나는 매일이라도 갈 수 있으니까 무슨 일 있으면 꼭 전화해. 엄마한테도 그렇게 말씀드리고.'
동생은 늘 내게 저렇게 말했다. 부산에 있는 나보다는 자기가 서울 왔다 갔다 하기 편하니까 무슨 일 있으면 꼭 연락하라고. 실제로 그렇게 해주었다. 엄마는 가끔이지만 자주 보지 못하는 아들을 병원에서라도 볼 수 있었다.
올해 3월, 엄마의 항암치료 효과를 점검하기 위해 PET-CT를 찍었는데 전이 소견 없고 경과도 너무 좋다고 표적 항암제 1개만 당일 병상에서 맞으면서 유지하자는 소견을 전해 듣고 동생은 크게 기뻐했었다. 엄마가 항암치료를 받고 내려오신 그 주말에 가족끼리 맛있는 대게찜을 먹으면서 축하파티도 했다. 나는 그때 동생도 대게를 좋아해서 그 자리에 함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한 달 즈음 뒤 갑작스러운 동생의 사망 소식으로 엄마의 몸과 마음이 무너져버렸다. 엄마의 면역체계는 감당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방어하는데 총동원되었던 것 같다. 나는 동생을 잃었지만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을 감히 상상할 수 조차 없다. 나도 네 살 아들이 있다. 나는 고작 4년을 키웠지만 내 전부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엄마는 38년을 키우셨다. 나도 엄마기에 자식을 잃은 우리 엄마가 앞으로 어떻게 살까 하는 걱정이 너무나 컸다. 게다가 지금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본인의 건강에만 집중해야 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엄마가 모든 걸 내려놓으시진 않을까 하는 우려도 됐다.
동생이 떠난 4월을 보내고 엄마는 예정되었던 항암치료 일정에 맞추어 서울에 가지 못하셨다. 거의 한 사이클을 건너뛰셨다. 항암치료 일정 변경은 내가 전화로 처리했다. 중요한 치료를 미루는 것이기에 병원에서 사유를 묻기에 자녀 초상이 났다고 말했었는데 엄마가 오랜만에 진료와 항암치료를 위해 담당 교수님을 만났더니 그 사유가 메모되어 있었던 것 같다. 교수님이 엄마를 보시자마자 '초상이 났다면서요'라고 물으셨다고 한다. 누구 초상이냐길래 엄마가 아들 초상이라고 대답하시니 교수님은 보호자가 상주해야 해서 동생이 몇 번 병원에 갔을 때 만났던 것을 기억하시고는 엄마를 진심으로 위로해주셨다고 한다. 심지어 동생이 원주에서 살았다는 것도 기억하시고는 그 많은 환자 진료 일정 속에서 진심이 담긴 위로를 건네주셨고, 진료실에 있던 간호사도 눈물을 흘리면서 엄마의 슬픔에 공감해주시는 바람에 엄마는 진료실에서 엉엉 우셨다고 한다. 그날 진료실에서 교수님과 간호사님께 너무나 큰 위로를 받으신 엄마는 마음껏 울고 나서 후련해진 마음으로 용기를 내서 항암치료를 받고 내려오셨다. 하지만 큰 상심이 몸을 많이 상하게 했던 것 같다. 3월 초에 경과가 너무 좋다고 들었는데 5월에 찍은 CT에서 항암제 내성 소견이 보여 1년 만에 항암제를 변경하게 되었다.
당일 항암제 주사를 맞고 내려오시다가 2박 3일 입원 일정으로 변경되었고, 이번에 맞는 항암제는 울렁거림과 어지럼증, 그리고 탈모의 부작용이 찾아왔다. 첫 항암치료를 시작할 때도 탈모가 있긴 했지만 이번에는 항암치료 후 2주가 지나자 가만히 서있어도 머리카락이 빠지고 손으로 훑으면 우수수 탈모되어 머리가 좀 빠진다고 느끼기 시작하고 3-4일 만에 정수리 두피가 훤히 드러날 정도가 되었다. 엄마가 지나간 자리에 머리카락이 수북이 쌓이는 것에 심란함을 느끼셨다며 며칠 전 엄마는 삭발을 하셨다. 일단 급한 대로 두건과 모자를 몇 개 주문해놓고 가발도 준비하려는데 엄마는 입원 병실이 나와서 내일 서울로 가신다.
엄마는 서울에서 입원 항암치료를 하시고 부산에 내려오시지 않겠다고 하신다. 근처 암 전문 요양병원에 입원해서 요양하시겠다고 한다. 항암치료 직후 어지러움과 울렁거림이 심해지면 직접 식사를 챙겨 드시기가 어렵고, 응급상황이 생겼을 때 병원 근처에 있어야 대처하기가 쉽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첫 항암 후 부산에서 내려와서 요양병원에 계셨는데 장폐색으로 응급상황이 되자 부산의 대학병원들은 잘 받아주지 않으려고 해서 앰뷸런스를 타고 서울로 갔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엄마의 결정에 나와 남편은 동의했다.
모든 것이 처음 가보는 길이기에 낯설긴 하지만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항암제를 바꿀 때, 엄마가 삭발하실 때, 서울에서 지내시기로 결정할 때 엄마와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 다짐했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는 그런 큰 상실을 겪었으니 몸과 마음이 망가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지금도 그 상실은 엄마와 나의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슬픔의 한가운데에 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우리는 상실로 인한 슬픔 속에서도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고 있다.
엄마는 동생의 49재 기간 동안 많이 우셨다. 49재 기간 동안에는 많이 울겠다고 선언을 하셨었다. 그리고 49재를 치르고 난 후 엄마는 한발 한발 앞으로 가고 계신다. 엄마만의 속도와 방식으로 동생을 마음에 품고 애도하면서 같이 살고 있는 또 다른 자식과 당신 자신의 삶을 위해서 슬픔 속에서도 슬픔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고 계신다.
그런 엄마를 보면서 나도 일어선다. 매일이 고통스럽고, 무기력하고 슬프지만 마냥 주저앉아 있지는 않으려고 한다. 엄마를 따라 한 발 한 발 걸어가면서 모든 것을 마주하려고 한다.
내일 서울로 항암치료를 받으러 떠나셔서 한동안 서울에 머무는 엄마를 응원하기 위해 오늘 저녁은 맛있는 장어구이를 먹으려고 한다. 물론 엄마가 좋아하는 단골 음식점이다.
항암치료로 엄마가 힘든 고비를 맞을 때마다 동생은 늘 함께 했다. 울면서 전화하는 누나를 다독여주던 다정하던 동생이었다. 동생과 전화하고 모든 것을 공유하고 나면 마음이 후련해져서 또 힘을 낼 수 있었다. 나의 그런 전화들이 동생의 마음을 더 힘들게 하진 않았을까 미안한 마음이다. 동생을 생각하면 모든게 다 미안하다. 지금 동생은 이런 나를 보면서 미안해할 거라고 생각한다. 함께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이다. 전혀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그동안 네가 함께해줘서 너무 큰 힘이 됐어. 고마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