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으로 가는 마지막 버스
2017.03.28 러시아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대한민국 1 - 0 시리아 @상암월드컵경기장
최근에 이어져온 국가대표팀의 부진으로 국가대표팀 감독 슈틸리케는 한국 축구팬들의 뭇매를 맞는 중이다. 시리아전이 사실상 '단두대 매치'가 아니냐는 이야기들이 무성할 정도로 여론은 그에게 등을 돌린지 오래다. 축구팬들은 그에게 변화를 요구했지만 그의 적절한 응답은 꽤 오랜 시간 나오지 않고 있다. 그는 중국과의 경기가 종료된 이후에 진행된 인터뷰에서조차, 시리아전에서는 변화를 꾀할 것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미온적인 답변만 내놓았다. 인터넷의 각종 커뮤니티, SNS에서는 시리아전에 대해 회의적인 의견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고 '기대도 안 한다'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다소 의외였다. '정말' 대신 '다소'라는 단어를 쓴 이유는 고명진 때문이고, '의외'라는 단어를 쓴 이유는 황희찬, 최철순 때문이다. 슈틸리케 감독의 선발 기용은 고집을 넘어 아집 수준임을 고명진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훈련 과정에서 김보경, 허용준 등의 다른 카드들이 제 컨디션을 못 찾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명진이라니. 반면에, 최철순, 황희찬의 선발 출전은 고집불통의 슈틸리케 감독이기 때문에 다른 의미로 놀라웠다. 최철순이라니. 너가 이런 선수도 쓰긴 쓰는구나! 하는 정도의 놀라움이랄까. 황희찬은 공격진에서의 변화 차원에서 어느 정도 선발이 예견되기도 했지만 최철순은 이전 경기들에서도 슈틸리케의 눈에 들지 못해 경기에 온전히 뛴 적이 많지 않다. 그가 "과감하게" 내놓은 4-1-4-1 포메이션도 눈길을 끌었다. 미치도록 사랑하던 4-2-3-1을 내려놓았으니 말이다.(물론 2선에서 한 명 내리면 바로 4-2-3-1인 건 함정이지만)
기대와 걱정을 동시에 하며 경기를 보기 시작한 지 얼마 안되어 "의외"의 골이 나왔고, '오.. 혹시...예전의 모습으로..?'하는 아주 근거없는 망상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밀집수비-역습을 주된 전술로 하는 시리아와의 경기였기 때문에 이른 시간의 득점은 침대축구를 방지한다는 차원에서 매우 중요했다. 그런데 그 중요한 걸 홍정호가 해내다니. 사실 약속된 플레이도 전혀 아니었으며 우연히 공이 앞에 떨어졌는데, 슈팅은 뭐..그래.. 훌륭했다. 득점 이후에도 기성용-구자철-남태희가 구성하는 역삼각형과 황희찬, 손흥민의 속도를 이용한 공격으로 분위기를 가져오는데 성공했다. 다만, 최철순이 국가대표팀 오른쪽 풀백 자리가 아직까지는 조금 어색해보였으며 수비 라인에서 종종 이탈하는 모습은 아쉬움을 남겼다. 물론 분위기가 좋았던 전반 초반이지만 우리의 '고명진'은 스텔스 모드에 돌입했고, 우측면에 위치한 고명진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자 대표팀의 공격은 좌측면에 조금씩 쏠리기 시작했다. 전반 초반까지는 '중국화' 수비수 듀오도 큰 문제 없이 경기를 뛰었다.
조금씩의 변화가 보인건 전반 15분~20분 경부터였다. 물론 그 변화는 부정적인 변화. 이 시점부터 대표팀이 공을 소유하는 지점이 조금씩 내려오기 시작했다. 선제 실점 이후에 당황하던 시리아는 정비를 빠르게 마치고 득점을 위해 전술을 수정해나갔다. 조금씩 라인을 높여가는 시리아에 한국은 상대 진영에서 공을 가지고 플레이하지 못하고 전체적인 공격라인이 중앙 센터서클 지역까지 내려왔다. 선수간의 호흡이 잘 맞지 않는 모습들과 잦은 패스미스는 주도권을 시리아에 조금씩 넘겨주는 시발점이 되었다. 더 큰 문제는 공격 전개 과정에서 찾을 수 있었다. 전체적인 라인이 내려온 상태에서 상대의 압박으로 인해 후방과 전방의 간격이 서서히 벌어졌다. 손흥민, 남태희가 수비가담을 위해 진영 아래쪽까지 내려올 때에는 황희찬 혼자 전방에 고립되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전반 30분경부터는 사실상 시리아가 경기를 지배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거세게 압박이 들어오자 한국 선수들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공격 전개를 풀어나가는 것은 고사하고 당장 안전하게 패스를 돌리는 것조차 힘들어보였다. 최철순은 여전히 수비 위치를 제대로 잡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고, 김진수 또한 하지 않아도 될 실수들을 계속 하게 되면서 대표팀의 템포를 뚝뚝 끊었다. 중앙 수비수들 역시 조금씩 집중력이 약해지는 모습을 보였다. 30분에 있었던 상대의 결정적인 찬스 상황에서도 홍정호, 장현수는 공에만 시선이 쏠려있고, 본인들이 마크해야할 선수들은 완전히 놓치는 모습을 보였다. 한편, 황희찬, 손흥민, 남태희는 모두 발이 빠르고 공간을 향해 패스를 넣어줄 때 위력적인 선수들이다. 간간히 찾아오는 공격 상황에서는 매우 느린 템포의 공 전개때문에 전방 공격수들을 전혀 활용하지 못했다. 상대 진영에서 의미없는 공 점유만 계속되다 전반전이 끝났다.
감독이 생각이 있다면 후반전엔 고명진을 대신할 다른 카드를 꺼낼거라 기대했다. 그런데 생각이 없다 그 사람은. 전반전 선발 명단은 후반전에도 똑같이 나왔고, 이 때부터 나도 다 내려놓고 경기를 보기 시작했다. 전반전 시리아의 기세는 후반전에도 이어졌고 한국은 여전히 답답한 경기력을 어김없이 선사했다. 53분 고명진을 한국영과 교체하면서 4-2-3-1형태로 포메이션을 전환했고, 기성용을 더 공격적인 위치로 올렸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여전히 느린 템포, 역습을 위한 움직임 부재, 계속해서 나오는 패스미스들은 말 그대로 '노답이었다'.
왼쪽은 수비 상황, 오른쪽은 공격 상황이다. 두 사진에서 누구든 연두색으로 표시된 넓은 벌판을 볼 수 있다. 수비에 성공하여 공 소유권을 되찾아온 왼쪽 사진에서 최철순은 어디에 있어야 할까. 공을 잡은 선수가 빨리 안전하게 공을 패스할 수 있는 공간으로 움직여주는 것이 옳지 않을까. 오른쪽 사진은 공을 잡고 있는 손흥민이 불쌍할 정도다. 이미 벌어질 대로 벌어진 라인간 간격으로 공격에 참여하는 인원도 화면에 보이는 4명이 전부다. 저 넓은 지역을 왜 손흥민 혼자 헤쳐나가야 하나. 풀백이 올라와 공격 가담을 하는 것이 욕심이라면 적어도 패스를 받을 수 있게 움직여주는 미드필더라도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최악의 경기력을 보여주던 슈틸리케호는 시리아의 묵직한 역습에 휘청댈 뿐이었다. 후반 24분 경에 상대에게 허용한 역습은 선수간 라인 유지가 얼마나 최악이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공을 걷어내려다 실패한 홍정호는 최종 수비라인에서 벗어나있었고 중앙지역에 의미없이 서성이는 한국 선수들의 숫자는 위 사진에서 보듯 5이다. 이에 대한 시리아의 대답은? 중원 생략. 선수들의 머리 위로 넘어가는 패스는 5명의 한국 미드필더(+홍정호)들을 순식간에 바보로 만들었다. 수비 3, 공격 3. 공격수들에게 매우 유리한 상황에서 시리아는 유기적인 움직임으로 1 대 1 찬스를 만들었다. 순태갓의 얼굴세이브가 없었으면 아주 멋진 골이 나올 뻔했다.
권순태의 슈퍼 세이브 이후에도 시리아의 거센 압박에 말그대로 '아무것도 못하는' 대표팀의 플레이를 볼 수 있었다. 전방으로 빠르게 전달해야하는 상황에도 불안한 볼 트래핑과 하염없는 백패스는 공격 템포를 아아주 느리게 만들었고 덕분에 시리아 수비는 여유롭게 제자리를 찾아갔다. 아까의 시리아의 역습 상황과는 다르게 한국이 공격할 때는 시리아의 수비 숫자가 한국의 공격 숫자보다 많음을 알 수 있다. 좌,우 측면으로 흔들어준다든지, 짧은 패스로 잘라들어가면서 공격 템포를 올린다든지... 그런 건 없었다. 풀백들의 위치는 수비라인 혹은 미드필더 라인과 전혀 유기적이지 못했고 비효율적이었다. 가까워야할 간격은 멀고, 멀어야할 간격은 가까운 아주 기가막힌 상황. 선수들은 그냥 공을 잡고 드리블을 하고, 패스를 할 뿐이었고 경기장 위에 있는 그 누구도 지금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모르는 눈치였다. (물론 감독님도 몰랐을 거다. 오죽 궁금하면 취재진한테 물어보겠나.) 이정협, 황의조를 투입하면서 '변화'를 꾀하셨을 감독님이시겠지만, 변화는 없었고 시리아의 압도적인 경기력에 쩔쩔매다 경기는 끝났다. 후반 막판 골대가 막아준 실점 덕분에 안도의 한숨이나 내쉬어야했다.
왜 이 정도밖에 못하는 것일까. 우즈벡, 중국, 시리아까지 최근 졸전만 거듭하고 있는 대표팀 경기력은 왜 이 모양이 됐을까. 고명진이 못해서?(뭐 나름 일리있다.) 단순히 선수 개인 차원의 문제가 아님을 축구팬 누구나 알 수 있다. 감독의 전술적인 역량 부족, 선수들의 정신력 부족 등등. 다 맞는 얘기일 것이다. 그런데 그 보다 더 큰 문제는 감독이 감독의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것. 선수들을 언론으로부터 보호하고, 끊임없는 동기부여를 통해 자신감을 불어넣어줘야할 감독이 선수단을 흔들고 있다. 각종 책임 회피성 발언, 그리고 '형님 리더쉽'을 빙자한 관심끌기 등 감독이 보여줄 수 있는 최악의 품격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이미 그가 말했던 선수 기용 원칙은 무너졌다. 얼마 전에 읽은 이천수 전 국가대표팀 선수의 칼럼을 읽으면서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이번 대표팀에는 그런 게 없다. 당연히 뽑히고, 당연히 뛰는 선수가 있다. 결코 선수들을 탓하는 게 아니다. 그런 분위기는 감독이 만드는 것이다. 내가 아는 몇몇의 선수들은 '열심히 해도 어차피 안 뽑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저런 생각이 퍼져있다는 것은 굉장히 심각한 일이다. 월드컵까지 최종 예선은 고작 3경기가 남아있다. 본선 직행이 굉장히 위태로운 상황에서 현역으로 뛰고 있는 선수들의 머리 속에 저런 생각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치명적이다. 감독의 전술적 역량을 떠나 선수들이 하고자 하는 의지가 바닥일 것이다. 국민들의 응원은 커녕 조롱과 야유를 받는 대표팀에서 누가 뛰고 싶어하겠는가. 어디서부터 풀어야할지 모르겠을 정도로 지저분하게 엉켜있는 실타래는 칼로 잘라버리는 것도 한 방법이다. 예전부터 슈틸리케 감독의 경질설이 돌기 시작할 때, 그래도 아직은 괜찮지 않나라는 입장에 서있었다. 충격적인 패배를 기록했던 중국 전에서도 전반전까지는 나름 좋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리아와의 경기를 보고 나서야 이건 아니다라는 확신이 든다.
월드컵으로 가는 막차가 오고 있다.
남은 시간은 촉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