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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비 Sep 07. 2020

결혼은 좋은 건데, 동거는 나쁜 거야?

서류 한 장 차이일 뿐인 것 같은데

자, 또 동거 이야기다.


J와 나는 사귄 지 약 한 달만에 같이 살기 시작했다. 우리가 사귀게 된 배경 같은 것들이 특수한 상황이기는 했지만, 그것들을 제치고서라도 퍽 빠른 편이기는 하다. 한국에서 동거란 단어의 이미지는 아직 낯설고, 마냥 좋아 보이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내 주변인들만 해도 내가 남자친구와 함께 산다고 했을 때 놀라는 반응들이 더 많았다. 물론 좋은 의미는 아니었겠지.


시드니에는 데이트를 할 만한 곳이 별로 없다. 카페는 커피 마시는 곳, 식당은 밥 먹는 곳. 대부분이 이렇게 정확히 목적을 따라가다 보니 주야장천 앉아 놀 만한 곳은 찾아보기 힘들다. 영화 표값도 비싸다. 성인 요금 약 27불, 한국의 거의 두 배 정도다. 거기다 팝콘이니 나쵸니 하는 간식들까지 먹으려면 거의 7-80불은 간단히 써야 한다. 당연히 부담되는 가격이다. 그렇다면 남은 건? 집 데이트. 집에서라면 영화부터 시작해 오순도순 함께 요리하며 알콩달콩한 분위기를 낼 수 있다. But...


호주의 쉐어 하우스는 외부인 출입금지인 경우가 많다. 친구들을 마구 데려와 시끄러운 파티를 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집 데이트가 최곤데, 서로의 집에도 못 간다니. 여긴 모텔도 드문데. 그렇게 호주의 한국인 커플들은 동거를 시작한다. 처음엔 쉐어 하우스의 2인실에 함께 사는 것으로 시작해서, 조금 오래 살아보고 나면 우리처럼 렌트를 하게 된다. 그러니까 결론은 호주에서 데이트를 하려면 동거가 불가피하다는 말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단 둘이 함께 살 계획은 아니었다. 친구 Y네 커플까지 함께 넷이서 집을 렌트할 계획이었는데, 향수병과 렌트의 복잡함에 지친 친구 Y가 돌연 귀국을 결정하는 바람에 이렇게 됐다. 넷이 산다는 것은 흔쾌히 허락해 주셨지만 단 둘이 산다고 하면 부모님이 뭐라고 하실지 두려웠다. 말해야지, 말해야지, 내일은 말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도 많이 하다 보니 어쩐지 이미 말한 것 같은 기분이 되었고, 나는 이사를 가서 가구까지 들이고 나서야 부모님께 말씀드려버렸다.


엄마, 세탁기 처음 사서 바로 써도 돼? 한 번 청소하고 싶은데.

베이킹 소다 같은 거 넣고 수건 한 장 넣어서 한 번 돌리고 써. 근데 너 이사했니? 누구랑 사니?

응. 아, 내가 말 안 했어? J랑 둘이 렌트했는데.


충격을 받으신 엄마는 전화를 잠시 끊으셨다. 나는 나대로 패닉이 와서 약 5분간 내가??? 말을???? 안 했다고??? 의 상태로 굳어져 있었다. 곧 다시 전화하신 엄마는 이미 이사한 걸 어쩌겠니, 하는 마음이셨는지 조심하라는 말만 반복하셨다. 이거 조심하고, 저거 조심하고,  무엇보다 피임 확실히 하고.



한국 어른들에게 동거란 저런 이미지인 걸까? 우리 동거해요, 하면 곧바로 피임 이야기가 나오는 그런 이미지 말이다. 결혼도 안 한 어린 남녀가 함께 산다고 하면 어쩐지 음란해 보이나 보다. 나는 엄마의 말에 이렇게 대꾸했다. 엄마, 어차피 같이 안 살아도 한국에 있는 애들은 모텔 가서 할 거 다 해. 엄마는 그래도 친척들에겐 비밀로 하자고 하셨다.


엄마의 생각과는 달리 우리가 동거를 결정한 가장 큰 이유는 함께 있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사귀게 된 것이 신기할 만큼, J와 나의 스케줄은 극도로 갈렸다. 나는 오전 6시에 출근해 오후 3시면 집에 오는 사람이었고, J는 정오에 출근해 밤 12시쯤 퇴근을 했다. 나는 새벽에 출근하는 사람이니 당연히 밤 10시에서 11시 사이엔 잠자리에 들었다. 가끔은 하루 종일 얼굴조차 못 보는 날도 있었다. 이렇다 보니 우린 같이 사는 것 이외엔 관계를 유지할 방법이 없었다. 남자친구 있어요? 네, 있는데 없어요. 아 그니까 없다? 아뇨, 있는데 지금 없어요. 이런 웃기는 상황이었던 거다.


함께 살아도 자주 얼굴을 보지 못하는 건 똑같았지만 한 침대에서 잠든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됐다. 집을 채울 가구를 사러 다니던 기억은 아직도 내 머릿속 핵심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만큼 행복했다. 특히나 안정과 살림을 중요시하는 내겐 오롯한 내 공간이 생긴다는 것 자체가 좋았다. 어른들이 생각하는 그런 목적은 확실히 아니었다. 우리에겐 그냥 둘 만의 공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비혼 주의자로서 나는 처음부터 동거를 그리 나쁘게 보지 않았다. 결혼은 하기 싫어도 사랑하는 사람은 생길 수 있으니 같이 살기만 하는 건 좋다고 생각했다. 서로의 편한 모습을 공유하는 것도 사랑이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바로 옆에 연인이 있다면 행복하리라 생각했다. 이제는 동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결혼을 생각하는 친구들에게 조언하기도 한다. 진짜 꼭 먼저 같이 살아 봐. 필수야. 집에서의 모습을 봐야 돼. 너 결혼하고 같이 살아보면 늦는다? 


간단한 예시를 들어보자. 나는 집의 청결 상태가 중요한 사람이다. 약간의 결벽과 강박도 있다. 비록 주로 생활하는 공간에 한정되긴 하지만, 방바닥에 먼지가 조금만 앉아도 더러운 상태로 여긴다. 하지만 J는 아니다. 애초에 일하느라 집에 잘 없기도 하고, 사는데 큰 불편함만 없다면 굳이 청소를 그렇게 자주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동거는 이런 점들을 맞춰가는 데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소해 보이지만 이런 문제들은 점점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결국 헤어질 결심을 했는데, 만약 이미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면? 그때는 일이 복잡해진다. 돌이킬 수 없을 때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생활을 공유하는 것은 확실히 좋은 경험이다. 위에도 말했듯 서로의 편한 모습을 보며 웃기도 하고,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을 때 코 앞의 얼굴을 보면 행복하다. (물론 뽀뽀는 안 됨. 입냄새 나니까.) 굳이 밖으로 나가 트레인을 타고 저 멀리 떠날 필요도 없이 그저 집에서 함께 맛있는 걸 해 먹고 영화 한 편을 보고 나면 그게 바로 데이트다. 더 깊게 들어가면, 밖에선 볼 수 없었던 그 사람의 생활 방식에서 내가 몰랐던 그 사람의 가치관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다 싸울 수도 있겠지만 같은 집에 살다 보면 싸움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어찌 됐든 밤이 되면 한 침대에서 자야 하니 필사적으로 그전에 풀기 위해 서로 노력하게 된다. 결국은 싸움 또한 혼전 동거의 이점 중 하나가 된다는 말이다.


프랑스에는 결혼을 하지 않아도 일정 기간 이상 서로의 파트너로 생활하면 사회적 가족으로 인정해주는 PACS 제도가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 아직 이 정도를 바라기엔 이른 것 같지만, 사회적 인식이 개선되면 그래도 좀 더 나아지지 않을까? 애초에 좀 웃기다. 값싼 모텔이 그렇게 많은 나라에서 혼전 동거만큼은 안 된다니. 생각하시는 일은 동거하지 않아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답니다... 다시, 나는 친구들, 특히 여자들에게 동거를 강력히 권하고 싶다. 함께 살아보는 것만큼 그 사람을 완벽히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애정이 더 깊어질 수도 있고, 와 내가 수렁에 발을 담그고 있었구나 하며 화들짝 놀라 발을 뺄 수도 있다. 어느 쪽이 됐든, 손해 볼 건 없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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