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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비 Aug 16. 2020

다음 생은 달팽이로

말이 좋아 자유지

약 넉 달 전 코로나로 인한 락다운 때, 나와 J는 소파에 함께 구겨앉아 열심히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한국행 비행기표와 직방을 샅샅이 뒤졌다. 락다운 한 달째였을 거다. 이사를 하고 휴가를 다녀와서 이제 좀 돈을 모으나 싶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일을 할 수가 없어지니 모으긴커녕 통장 숫자가 바닥을 보였다. 한국에 잠깐 들어갔다 올까 하고 J와 진지한 논의를 하던 시점이었다. 적어도 한국에 가면 일은 할 수 있을 거라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호주 정부는 한국에서의 입국을 제한하고 있었고, 한 번 가면 당분간은 들어올 수 없을 것이라는 건 확실했다. 어쩌면 영주권의 길도 포기해야 할지도 몰랐다. 부모님은 걱정이 되셨는지 한국으로 들어오는 게 어떠냐 하셨다가도 영주권이 걸려 조금만 더 버텨보라고 말을 바꾸길 반복하셨다. 


J도 처음에는 들어가야 하지 않느냐고 했다. 아무래도 여기서 계속 버티긴 힘들 것 같다고. 부모님께 금전적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원래 주 5-6일 출근을 하던 J는 이제 일주일에 3일 이하로밖에 일을 하지 못했고, 나는 아예 하지 못했다. 집세를 내기도 빠듯한 상황이었다. 비행기 표값을 마련할 수 있을지조차 아슬아슬했다. 가고 싶으면서도 반면 걱정이 됐다. J도 나도 둘 다 한국에서 자취해 본 경험이 전무했다. 나는 거의 성인이 되자마자 호주로 왔고, J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단 한국의 생활을 파악해보기로 했다. 먼저 한국으로 간 친구 Y에게 연락해 한국은 어떠냐 물었다. 거긴 살만 해?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는 그때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니 아직 호주에 있는 것이겠지. 한국은 우리에게 너무 어려웠다. 어디서 살 지부터 문제였다. 나는 부모님이 귀농을 하셔서 본가가 시골이 되었고, J는 본가 근처에 살기 싫어했다. 둘 다 좋아하는 서울은 우리에게 너무 비쌌다. 연고 없는 곳으로 가기엔 아무것도 모르는 곳이라는 게 조금 무서웠다. 뭘 해서 먹고 살 지 또한 문제였다. 코로나 이전에는, 한국으로 혹시나 돌아가게 되면 전에 하던 여행사 일이나 다시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코로나가 터진 뒤 여행업은 거의 망하다시피 했으므로 그건 불가능했다. J는 딱히 하고 싶은 게 없다며, 돈 되는 일은 아무거나 해도 괜찮다고 말했지만 내가 그걸 바라지 않았다. 먹고사는 게 이렇게나 힘들다니. 그냥 몸 뉘일 자리에 작은 주방만 있으면 되는 건데. 나는 그 날 직방 어플을 바로 지웠다.


호주에 오고 한 집에 3개월 이상 살아본 기억이 별로 없다. 아마 한 두 번? K 언니의 집에 살았을 때와, J를 만난 쉐어하우스가 전부다. 둘 다 얼추 4-5개월 정도 살았던 것 같다. 이상하게 한 집에서 3개월 이상을 보내면 집에 애정이 사라졌다. 질린다고 해야 하나? 매일 같은 길을 걷고 같은 방을 보는 게 지겨워졌다. 같이 사는 사람들이 마음에 안 들었던 적도 있긴 했다. 그렇게 집에 정이 떨어지고 나면 곧바로 이사를 갔다. 


그렇게 이사를 다니며 내내 했던 생각은, '내 집이 갖고 싶다'였다. 한 쉐어하우스에서 계속 살고 싶지는 않았지만 계속 떠돌아다니는 것도 힘들었다. 게다가 나는 맥시멀리스트라, 온 지 고작 1-2년밖에 되지 않았을 때도 짐이 많았다. 이사를 한 번 하려면 품이 많이 들었다. 언젠가는 같은 쉐어하우스의 옆 방으로 옮긴 적이 있는데,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임에도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이사 좀 그만 가고 싶다. 매일 투덜거리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집을 찾는 내게 그거 역마살 아니냐고 한 사람도 있었다. 그건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그래서 마침내 J와 함께 쉐어하우스가 아닌 우리 둘이 살 곳을 계약했을 때, 뛸 듯이 기쁘고 행복했다. 마침내 생활이 안정권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가구며 생필품 따위를 한 번에 사고 디파짓을 내느라 돈이 많이 깨지긴 했지만, IKEA와 아울렛을 돌아다니며 침대와 식탁을 골랐던 그때가 가장 행복했다. 이사를 하고 나서도 한동안은 집 관리에 매진했다. 투잡을 뛰느라 밤 10시에 집에 들어와도 꼬박꼬박 청소는 했다. 프리저브드 플라워를 사다 집을 장식하고, 처음 마셔본 술이나 패키지가 예쁜 와인병은 버리지 않고 책장에 진열했다. 나도 J도 요리를 좋아하다 보니 해 먹고 싶은 걸 마음껏 할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 쉐어하우스에서 오븐을 사용하거나 하는 건 꿈도 못 꿨는데, 이제는 오븐으로 폭립부터 냉동 피자까지 마음대로 해 먹을 수 있다. 여름에 마음껏 에어컨을 틀 수 있다. 내게 내 집이란 그런 의미의 행복이었다. 내 자유로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다는 것.


호주에 온 대부분의 유학생이나 워홀러는 쉐어하우스 생활을 한다. 최소 2년부터 길게는 5년 정도까지 머무르거나 영주권이 목표인 유학생들은 더러 부동산과 직접 계약해 렌트를 하기도 하지만, 고작 1년 있다가 갈 워홀러들은 굳이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부동산 쪽에서도 1년 혹은 그전에 돌아갈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보유한 사람들을 계약 대상으로 선호하는 편이 아니기도 하다. 또 쉐어하우스는 4인실부터 독방까지 방의 유형이 다양해 내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서 고를 수 있다. 그에 비해 렌트는 원룸이 기본 주 $350 정도로 시작하고, 비싼 동네는 $500까지 올라가기도 한다. 한국에 비해 퍽 비싼 편이라 할 수 있다. 


렌트를 하게 되면 쉐어하우스보단 확실히 '내 집'이라는 느낌이 더 커지기 때문에 편한 면이 있다. 반면 날을 곤두세우게 되기도 한다. 호주에는 인스펙션이라는 게 있는데, 세입자가 살고 있는 집에 부동산 직원이 주기적으로 방문해 집 상태를 점검하는 것이다. 작게는 청소부터 집의 파손 유무까지 꼼꼼히 점검하는 곳도 있고, 그냥 쓱 둘러보고 괜찮다며 가는 곳도 있다. 순전히 운이다. 어떤 부동산은 사는 내내 인스펙션을 하지 않기도 한다. 렌트 명의자끼리만 산다면 상관 없지만 렌트를 해서 다른 사람들과 쉐어를 하는 집은 인스펙션 때문에 규칙이 까다롭기도 하다. 나도 그런 집에 들어갔던 적이 있다. 별로 좋지는 않았다.


나와 J는 곧 이사를 간다. 집 계약이 1년 짜리라는 이유도 있지만, 연장을 하는 편보단 이사를 가는 게 나을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렌트의 단점 중 하나다. 며칠이라도 살아보지 않으면 그 집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데, 고작 한 두 번 본 것만으로 이 집에 최소 6개월에서 1년 간 살 지 말 지를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집의 첫인상은 꽤 괜찮았지만 우리가 간과한 게 있었다. 바로 이웃들이었다.


처음엔 괜찮았다. 나는 옆 집의 아저씨와 가끔 베란다에서 눈이 마주쳤는데, 서로 간단히 눈인사를 하고 지냈다. 나쁜 사람은 아니겠거니 생각했다. 나와 J는 협소한 인간관계 속에서 종종 몇몇을 불러 저녁을 먹고는 했다. 코로나 때문에 나갈 수도 없으니 너무 지루해서 생각해낸 방책이었다. 다행히 지인들은 기꺼이 놀러 와 주었고, 대부분 저녁을 먹고 일찍 돌아갔다. 그때 처음 옆 집이 우리를 쿡 찔렀다. 다음 날 빌딩 매니저로부터 문자가 왔다. 옆 집에서 항의가 들어왔으니 조금만 조심해 달라고. 우린 당황했다. 사람이 모였다고 해봤자 많아야 우리를 포함한 네 명이었고, 음악도 무엇도 없이 그냥 이야기를 하며 저녁을 먹은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린 시끄러웠나 보다, 조심하자 하고 넘어갔다.


두 번째는 좀 더 공격적인 방식이었다. 역시나 그날도 지인들과 밤에 모여 이야기를 했다. 술을 마시긴 했지만 목소리가 큰 사람은 없었고, 음악도 없었다. 혹시나 해서 발코니 문까지 다 닫아놓았다. 자리 도중 흡연을 하는 지인 한 명이 발코니로 나갔다가, 어두운 표정으로 들어왔다. 왜냐고 물으니 옆집에서 소리를 질렀단다. 조용히 하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를 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자리는 어영부영 끝이 났고, 우린 다음 날 빌딩 매니저에게 문자를 받았다. 옆 집이 부동산에 신고를 해서 우리가 경고를 받았다고. 이제 화가 나기 시작했다. 아니, 대화 소리 정도의 생활 소음도 못 참으면 아파트에서 어떻게 사는 거야? 게다가 낮에는 옆 집이 훨씬 시끄러웠다. 옆 집 아저씨의 취미는 큰 소리로 노래하기이고, 옆 집 아줌마는 소리 지르듯 말을 하기 때문이다. 이쯤부터 나는 이사 생각이 간절해졌다.


쓰리 스트라이크. 이 집을 당장 나가지 않으면 내가 먼저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날은 K언니와 그 친구 분이 저녁에 잠시 들렀던 날이었다. 내가 평소 친구분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었다는 걸 기억해낸 언니가 마침 우리 동네에 있다며 이야기를 하러 우리 집에 왔다. 또 발코니 문을 죄다 닫아놓고 이야기했다. 이번엔 발코니에 나간 사람도 없었다. 30분쯤 지났을까, 옆 집에서 벽을 쳤다. 쾅, 쾅, 쾅. 우리는 순간 모두 입을 다물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K언니는 부동산과 함께 3자 대면을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이사 갈래...


나는 겁이 많은 편이라, 이미 부동산을 통해 경고를 받았을 때부터 잔뜩 쫄아든 상태였다. 호주의 소음 공해 벌금은 $1,100이다. 그렇게 많은 벌금을 낼 돈도 없고, 그 정도의 소음을 낸 것도 아닌데 벌금을 내기엔 억울하다. 벌금도 벌금이지만 두려움이 더욱 컸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 혼자 있는데 혹시나 복도 같은 곳에서 마주쳤을 때 해코지를 당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종종 들었다. 나는 그 스트레스를 견디기엔 너무도 나약한 사람이다. 곧바로 J와 함께 집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이사를 간 곳이 좋을지 어떨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도 모르고, J도 모른다. 어쩌면 여기보다 더 안 좋을 수도 있겠지. 또 얼마 안 가 이사를 결심하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겠나. 이게 집 없는 떠돌이의 서러움인 것을. 얼마 전 보러 갔던 새 집의 매니저는 우리에게 이사 이유를 묻다가, 이웃이 그렇게 하는 거면 그 집의 세입자가 아닌 진짜 주인일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언제나 세입자는 을이고 집주인은 갑인 것이다. 그게 설사 이웃의 관계라 하더라도.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에서, 주인공 지호는 말한다. 다음 생엔 달팽이로 태어나고 싶다고. 어딜 가더라도 제 집을 등에 지고 다닐 수 있는 달팽이. 나도 달팽이로 태어나면 좋을 것 같다. 아니면 소라게도 괜찮다. 뭐든 내 집이 있는 생물이고 싶다. 이번에도 운이 없었다며 또다시 이사를 준비하는 생은 그만 청산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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