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히비 Aug 24. 2020

사랑하긴 했었나요, 스쳐가는 인연이었나요

짧지 않은 우리 함께했던 시간들이 자꾸 내 마음을 가둬두네

예에!


내가 사랑하는 밴드, 잔나비의 노래 '사랑하긴 했었나요 스쳐가는 인연이었나요'는 이렇게 시작된다. 이사 날짜가 결정된 후, 집에 있는 물건들을 둘러보며 짐을 쌀 궁리를 시작하자마자 이 노래가 내 머릿속에 번뜩 떠올랐다. 가사 그대로, 사랑하긴 했었는지, 혹은 그저 스쳐가는 인연이었는지 긴가민가 한 물건들이 집에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설레지 않으면 버리세요. 신비한 '오리엔탈' 적 분위기로 서양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았다는 곤도 마리에 선생님은 말했다. 설레지 않으면 버리라니. 참 합리적인 말이다 싶다가도 실생활에 적용하기는 힘들다. 내게 설레지 않는 물건은 드물다. 장식장 선반에 먼지가 쌓인 채 움직이지 않는 강아지 인형을 보면 바리스타 시절 그 인형을 선물해 주었던 단골손님이 떠오른다. 장식장의 반 이상을 차지한 빈 술병들에도 각각의 추억이 존재한다. J와 함께 이 집으로 이사한 첫날 마셨던 와인도 있고, 투잡을 뛸 때 퇴근 후 지친 심신을 달래주었던 맥주들도 있다. 이렇게 모든 물건들에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하고 추억에 이름을 붙이다 보면 소중하지 않은 물건이 없다.


나는 지난 인생 동안 맥시멀리스트가 아니었던 적이 없다. 같은 종류의 물건이라도 색이 다르거나 기능이 다르면 모두 갖고 싶었다. 그 용도와 사용 빈도에 따라 같은 물건을 여러 개 구비해 두는 것을 좋아했다. 수집가의 기질이 어렸을 때부터 있었던 것도 같다. 용돈이 적었던 어린 시절을 지나 내 통장으로 꽂히는 월급을 받기 시작했을 때, 내 화장대에는 화장품들이 하나둘씩 늘어 나중에는 산을 이루었다. 여행을 갈 때도 간소 해지는 법이 없었다. 고작 이틀 간의 서울 나들이에도 캐리어가 함께 했고, 그 안에는 이틀간 입을 옷들과 화장품이 가득했다.


이런 탓에 처음으로 자취를 하게 되고, 게다가 그게 외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짐은 줄어들지 않았다. 처음 살았던 곳이 K언니의 손님방이라 더 그랬을 수도 있겠다. 가정집의 손님방이라고 하면 보통 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건이 구비가 되어있기 마련인데, 이후 이사를 간 다른 쉐어하우스들은 그런 게 없었다. 생활에 필요하기보다는 생존에 필요하다고 하는 게 더 알맞을 물건들 뿐이었다. 그 덕에 나는 욕심을 따라 물건을 하나씩 사 모으기 시작했고, 이사를 한 번 할 때마다 그들은 내게 고통을 안겨주었다.


세 번째인가의 쉐어하우스에서 나는 매트리스를 샀다. 방에 침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얇은 토퍼만 하나 깔려있는 방이었는데, 잠에 들기 위해 그 위에 누울 때마다 허리가 이리저리 뒤집히며 나를 괴롭혔다. 차마 남의 집에서 프레임까지 살 용기는 없어서, 대신 매트리스를 두 개 사서 이중으로 깔아놓았다. 그렇게 하고 나서야 나는 편히 잠에 들 수 있었다. 그 매트리스들은 세 번의 이사 동안 나를 따라다녔다. 짐은 SUV 하나로 충분히 옮길 수 있는데 매트리스가 두 개나 되니 더 큰 차를 불러야 했다. 돈이 훨씬 더 깨졌음은 물론이다. 그중 하나는 아직 우리 집에서 소파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고 함께 살아가고 있다. 아마 다음 이사쯤엔 버리게 되겠지만.


나는 최근 옷이며 화장품 따위를 꽤 많이 버렸다. 원래 리빙박스 여섯 개 정도의 양이었다면 지금은 아마 네 개 정도에 충분히 들어갈 것 같다. 두 박스나 버렸으니 많이 버린 게 맞긴 하지만 막상 남은 양은 우리 집에 하나밖에 없는 옷장을 가득 채우다시피 한다. J는 가끔 옷장을 열 때 내 옷이 너무 많다며 투덜댄다. 그럼 나는 서러움에 외친다. 그것도 많이 버린 거거든! 너 내가 뭘 버렸는지 알기나 해! 그럼 J는 묻는다. 뭘 버렸는데?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곰곰이 생각해보면, 막상 정확히 뭘 버렸는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버리고 아쉬웠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분명 그 옷들을 산 직후엔 즐겨 입었을 테지만, 시간이 지나며 애정은 그만 흐려지고 만다. 그렇게 옷장 구석에 있는 듯 없는 듯 처박혀 있다가 이내 버려지고 말았다. 아, 갑자기 좀 슬퍼지네.


J와 함께 살게 되기 전 친구 Y와 함께 살 때, 우리는 방에 기본으로 제공되는 책상을 바짝 붙여 커다란 화장대 하나로 썼다. 둘 다 화장품을 모으는 게 취미였는데 그 분야가 달라 종류가 지나치게 많았기 때문이다. 아이 메이크업용 화장품들만 화장대의 반 이상을 차지했다. 립스틱과 브러시는 따로 정리함을 두고, 베이스용 파운데이션 등은 최대한 공간을 적게 차지하는 방향으로 정리했는데도 가끔은 화장대가 모자랐다. 당연했다. 그 친구들은 늘어나기만 하고 줄어들지는 않았으니까. 


그 화장품들 중 지금 남은 것은 열 손가락 안에 든다. 몇 번 쓰지도 않은 색의 아이 메이크업 제품이나, 너무 오래됐다 싶은 것들은 얼마 전 모두 버렸다. 친구에게 간편한 팔레트를 몇 개 넘겨받은 것도 있지만 그냥 정리가 하고 싶었다. 싱글 컬러의 아이쉐도우를 모두 쓸어 담아 버리면서 딱히 미련 같은 것은 남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생각도 했다. 이걸 다 어디다 쓰려고 이렇게 고이고이 모셔서 데려왔지. 쓰지도 않는 걸. 분명 살 때는 갖고 싶어 죽을 것 같은 마음에 한국에 있는 가족에게 부탁까지 해서 택배로 받았는데, 애정이라는 게 이렇게 쉽게 식어버리는 거였나. 


어차피 얼마 안 쓰고 버릴 거 왜 사? 이렇게 생각하면 인생이 너무 슬플 것 같다. 때로는 쓸 데가 1도 없는데 너무 마음에 드는 나머지 안 사고는 배길 수 없는 친구들도 있지 않은가? 이런 걸 가리키는 말도 따로 있다. 예쁜 쓰레기. 따지면 우리 집은 예쁘게 생긴 쓰레기장인 셈이다. 그 예쁜 쓰레기 친구들의 의무는 오직 하나다.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내게 추억을 상기시키고, 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것. 없으면 허전함을 느낄 만큼 그 자리에 당연히 존재해 주는 것.


나 같은 맥시멀리스트들을 위해 짧은 변명을 하자면, 나는 맥시멀리스트가 가장 극대화된 삶의 질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화장을 할 때 그 날의 날씨와 약속의 종류에 따라 다른 화장품을 쓰고, 요리에 따라 다른 종류의 그릇에 담아내야 한다. 물을 마실 때는 머그컵을 쓰지만 주스나 드물게 우유를 마실 때는 유리컵을 써야 기분이 좋다. 그리고 그렇게 자잘한 기쁨들은 모여서 내 하루를 만들어낸다.


나는 앞으로도 물건을 버리기보단 사 모으는 것을 더 잘하는 사람일 것이고, 아마 크게 변하지는 않을 것 같다. 당장 내일모레 새 집으로 이사를 하는데도 벌써 무언가를 채울 생각만 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이사를 준비하며 버린 것도 많지만 나는 그것들을 버리면서 내내 그 자리를 새로 채우게 될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지나간 것들이 사랑이었는지, 혹은 스쳐가는 인연이었는지는 당장 판단할 수 없다. 미련이 줄줄 흘러 절대 버릴 수 없는 것들이 사랑이고 미련 없이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건 인연일까? 앞의 것은 사실 그냥 미련 덩어리고 뒤의 것은 깔끔하게 끝난 사랑일 수도 있지 않나? 알 수 없으니 일단 그냥 사 보는 것이다. 내 마음에 들고 왠지 필요하니까 사 보고, 나머지는 미래의 내가 알아서 하겠지. 

작가의 이전글 다음 생은 달팽이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