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인 - 인터뷰에서 친구가 바라본 자신
한국에 대한 관심과 춤에 대한 열정을 케이팝 댄스로 승화시켰던 지안무가. 그는 한국 교환학생을 마치고 미국에 돌아갔지만, 졸업 이후 곧장 다시 한국을 찾았다. 케이팝 업계에 진지하게 발을 디뎌보기 위한 과감한 도전이었다.
졸업하고 한국에 오기로 어떻게 결심했어?
그 결정이 내 인생에서 제일 자연스러웠어. 이미 네가 말한 것처럼 파일럿 프로젝트도 해봤고, 한국에 와야겠다는 마음이 굳혀졌거든.
한국에는 언제 왔었지?
2017년 6월 22일. 졸업하고 바로. (웃음) 622는 지금도 내가 쓰는 비밀번호 중 하나야.
헐, 소름 돋는다. 그날을 기억하네.
당연하지. 잊을 수가 없지. 처음엔 신촌 고시원에 있었어. 교환학생 때 썼던 고시원이라 연락해서 바로 들어갔거든. 거기서 다시 한국 친구들도 만나고, 교환 온 학생들이랑도 어울리고, 천천히 적응했어. 그때 엑소(EXO)의 ‘코코밥’이 막 나왔을 때라, 춤을 추면서 되게 신났어. 연세대 여름 프로그램으로 한국어 수업도 하나 더 들었고. 그러다 엄마가 한국에 와서 “이 고시원 너무 좁다, 나와라” 해서 영등포구청에 쉐어하우스로 옮겼지. 그때가 한참 네랑 전화를 자주 하던 시기야. 베란다에 나가서 전화를 받던 기억이 생생해.
아 맞아, 그렇게 전화를 자주 했었을 때가 있었네.
응. 근데 그때 취업은 정말 힘들었어. 위워크 같은 회사들 지원했는데, 다 전자 양식 맨 끝에 “비자 스폰서십 필요하면 체크하라”는 칸이 있었어. 난 당연히 체크했지. 근데 그거 체크하는 순간 서류가 그냥 탈락 스택으로 들어간 것 같아. 그때 비자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알았지. 그래서 결국 영어학원에서 일했어. 그게 한국에 합법적으로 남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고, 동시에 춤이랑도 가까이 있을 수 있는 길이었으니까.
춤은 어떻게 이어갔어?
그때부터 P 댄스 학원 시절이 시작됐지. 네가 억지로 나를 그 학원에 끌고 가서, 내가 부끄러워했던 기억이 나. 결국 앉아서 같이 등록 상담 받던 거 기억나? 네가 “얘기해야 돼”라고 해서. (웃음) 그래서 그 학원에서 1~2년 정도 활동했어.
그러다 거기서 강사반을 열었어. 젊은 학생들을 뽑아서 강사가 되는 법을 가르쳐주는 거였지. 나도 지원해서 오디션을 봤어. 직접 안무도 짜야 했는데, 그때 느낀 게 한국학생회 때랑은 완전히 다르더라고. 그땐 항상 팀을 위해 안무를 짰는데, 여기선 혼자 서서 보여줘야 했거든. 근데 난 춤을 늘 커뮤니티랑 같이 해왔으니까, 혼자 하는 건 별로 안 맞았어. 그래도 오디션에서 “네가 정말 많이 늘었다”라는 말을 듣고 되게 뿌듯했지. 근데 결국 합격자가 너무 적어서 강사반 자체가 취소돼 버렸어. 내가 붙은 건지 아닌지도 모르겠어. 어쨌든 그 반은 열리지 않았고, 거기까진 못 갔어.
아휴, 아쉬워라!
대신 학원에서 다른 프로그램이 있었어. 학생들이랑 선생님이 팀을 짜서 무대 공연을 만드는 거였는데, 이건 딱 내 스타일이었어. 무대에서 사람들과 같이 하는 게 내가 춤을 추는 원동력이거든. 엄청 재밌었고, 다음 해에도 더 잘해보고 싶었지.
근데 여기서도 한국적인 눈치 문화 때문에 힘든 점이 있었어. 뭔가 내가 먼저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나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는 거야. 뒤늦게 “플립 동작도 할 줄 알아? 그랬으면 그게 나오도록 안무를 짰을 텐데”라고 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먼저 “저 이거 할 수 있어요”라고 얘기하는 방법을 익혀야 했어.
그리고 바로 그다음 해에 코로나가 터졌어. 해당 프로그램이 통째로 취소됐고, 내가 쌓아온 모멘텀도 다 끊겼어. 영어학원 일은 더 힘들어졌어. 애들은 마스크를 안 쓰려고 하고, 교사들이 컴플레인을 받고… 그때 비자 문제까지 겹치니까 정말 버티기 힘들었어. 그래서 춤학원이랑도 자연스럽게 멀어졌지.
와, 진짜 모든 사건이 연결되어 있었네, 그다음은?
코로나 때문에 외국으로 못 나가던 댄서가 한국에 갇히면서 댄서 양성 프로그램을 시작했어. 원래라면 난 P학원에 남아 있었지. 그런데 코로나로 인해 그 댄스 프로그램에 합류하게 된 거야.
맞아, 그렇게 우리집 근처로 이사온 거였었지! 그때는 어떤 경험을 했어?
우선 첫 번째 시즌에 참여했어. 댄서는 20명 남짓으로 소규모였어. 완전히 프리스타일 댄스를 배우는 곳이었어. 내가 오디션에서 이 프로그램을 하고 싶다고 말한 이유기도 했어. 나는 늘 안무 쪽만 해왔으니까, 즉흥적인 스타일도 배우고 싶다고 했거든.
근데 이게 진짜 큰 도전이었어. 왜냐면 춤은 원래 내가 게이라는 이유로 받던 시선을 이겨내게 해준 도구였거든. 안무는 내가 미리 준비해서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보일지 컨트롤할 수 있었는데, 즉흥은 그 순간 즉석에서 결정해야 하잖아. 잘못하면 다시 공격받을 수도 있다는 불안이 컸지.
근데 프리스타일이라는 게 결국 “난 이제 눈치 안 본다”라는 선언 같은 거더라고. 그게 춤 발전에도 좋았고, 사람으로서도 성장할 수 있었어.
나아가서 두 번째 시즌 때는 확실히 내 몸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감이 생겼어. 선생님이 뭘 원하는지도 더 잘 알겠고. 그래서 점수도 많이 올랐고, 성적도 좋았어. 근데 그게 또 새로운 스트레스가 되더라. 왜냐하면, 한 번 잘하면 그 다음부턴 사람들이 “아, 저건 그냥 우연이었겠지?” 이런 식으로 볼까 봐. 계속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던 거야.
그래도 여러 번 월간평가에서도 좋은 점수를 받았어. 객관적으로 봐도 점수를 잘 받았지. 2:2 배틀에서 1등도 하고, 사이퍼 같은 데서도 경쟁력 있었고. 그래서 스스로도 “아, 잘하고 있구나”라고 느꼈지.
너가 그 프로그램 하면서 고생했던 것도 기억나.
한국인 친구들이랑 관계 맺는 건 여전히 힘들었어. 한국인들이 외국인과 어떻게 어울려야 하는지에 대한 감각이 없다 보니까, 늘 내가 먼저 분위기를 맞추고, 말을 실수하지 않으려고 조심해야 했어.
내게 한국어는 모국어가 아니었고, 또 외국인을 향한 편견도 있으니까, 결국 모든 상황을 통제해야 하는 거야. 누군가랑 얘기할 때마다 완전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이 생겼어. 선생님이랑 대화할 때도, 다른 댄서랑 대화할 때도, 절대 틀리면 안 된다는 압박감. 괜히 틀리면 “역시 흑인계 혼혈*이라 그렇다”, “역시 게이라 그렇다”, “역시 외국인이라 그렇다” 이런 식으로 연결될까 봐.
(*지안무가는 본인을 흑인계 혼혈이라 설명한다. 한국에서 통용되는 혼혈의 의미로는, 한국인이 조상 가운데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어서 오역을 방지하고자 적는다. 이는 그가 한국인 조상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의 뿌리에 흑인을 비롯한 다양한 인종이 섞여 있다는 것이다. 그가 외모만으로는 흑인으로 보이지 않는 부분이 있기에, 그는 늘 그 경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설명할 때에 조심스러움을 느낀다.)
하루는 한국어가 괜찮게 나가는 날이었어, 그러면 이번엔 퀴어에 대해 비하하는 발언이 나오고 내가 반박해야 하는 상황이 생겨. 그러면 “저 사람은 게이니까 저렇게 말하는 거야”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대화의 흐름이 이어지는 거야. 아니면 우리가 힙합 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 내가 흑인 문화와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면 또 “흑인이니까 저렇게 이야기한다”는 식의 인식을 받는 거지.
그런 게 누적되니까 당연히 지치더라. “적어도 끝까지 시도해보자”는 마음으로 두 시즌을 끝냈어. 그런데 어느 순간 “아, 이제는 내가 나 자신을 위해서 정리할 타이밍이구나” 싶더라. 춤이 나한테 준 게 분명히 크지만, 계속 거기에 매달리기보다 내 삶의 다음 챕터로 넘어가야겠다고 느낀 거지.
프로그램에 참여한 경험이 춤의 관점으로만 보면 분명히 도움이 많이 됐어. 프리스타일도 처음엔 힘들었지만 결국은 “남 눈치 보지 않고 나답게 표현하는 법”을 배운 거니까. 근데 동시에 한국 사회 안에서, 특히 댄스 씬 안에서 내가 감당해야 하는 시선이나 편견이 계속 쌓이더라고. 외국인이라서, 흑인계 혼혈이라서, 게이라서… 항상 내가 먼저 설명하고, 조심하고, 실수 안 하려고 애써야 했어. 그게 진짜 피곤했어.
그래도 후회는 없어. 춤 덕분에 내가 나를 지킬 수 있었고, 또 성장할 수 있었어. 무대 위에서 얻은 자신감 그리고 프리스타일에서 배운 해방감까지. 다 합쳐져서 지금의 내가 된 거니까. 그래서 결론적으로, 두 시즌까지 했던 건 딱 좋았던 선택이었던 것 같아.
결정적으로 춤을 그만두게 됐던 계기가 뭐야?
시즌 2 프로그램 막바지쯤 코로나가 좀 잠잠해지면서, 선생님이 한국의 어떤 도시에서 공연 초청을 받았어. 그걸 팀 공연으로 만들겠다고 하더라고. 그룹으로 하는 춤이니까 너무 기대됐어. 그런데 뒤늦게 공연진이 나를 제외하고 꾸려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 우린 11명이었는데, 7명이 공연에 갔고 4명은 못 갔어. 그 중 한 명은 사건 사고가 있었던 사람이었고, 또 다른 한 명은 미성년자라서, 마지막 사람은 열심히 하지만 춤을 어려워 했던 친구였어. 그리고 한 명은 나야. 솔직히 여덟 번째로라도 넣을 수 있었는데. 나는 빠질 이유가 명확하지 않았는데 아무말 없이 스리슬쩍 배제된 거야.
직접 따졌어?
이미 두 시즌 동안 여러 번 맞섰던 적이 있었거든. 그 전에도 선생님이 동성애 혐오적인 발언을 했을 때 내가 지적했어. 한국 문화에서는 나이 많은 사람한테 그렇게 말하는 게 흔치 않잖아. 근데 그냥 넘어갈 수 없었어. 또 중요한 사건이 있었어. 선생님이 어떤 댄서를 공개적으로 괴롭혀서 그 친구가 울면서 뛰쳐나간 적이 있어. 다들 조용히 있거나 밖에 나가서 피해자랑 산책을 하면서 달래주고 끝냈거든. 근데 난 스튜디오에 남아서 “이건 잘못됐다”고 세게 말했어. 내가 그때 또래 중에 가장 나이가 많기도 했거든. 내가 지적한 덕분에 결국 선생님이 그 댄서에게 가서 사과를 했어. 그런데 그때부터 난 이미 ‘성격 드센 외국인’으로 찍힌 상태였던 것 같아. 그런 해프닝 때문에 안 된 것 같아.
집단의 비합리적인 역학 관계가 능력주의(meritocracy)를 가로막은 거잖아. 사람들은 젠더나 인종에 대한 담론이 능력주의를 방해한다고 여겨. 하지만 오히려 성차별이나 인종차별이 능력주의를 실현하지 못하게 만드는 요소네.
맞아, 뭐를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나는 그달 월간 평가에서 그룹 1등을 했었거든. 그것도 상대적으로 높은 점수로. 기술 점수는 괜찮은 점수를 받았고 종합 점수는 10점 이상을 받게 됐어. 그달에 10점 이상 점수를 받은 사람은 나밖에 없었어. 그런데 일주일 뒤에 다른 사람에게서, 이미 공연을 위한 그룹을 만들어서 연습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거야.
많이 지쳤어, 그래서 이제는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P학원에서 안무를 할 때나, 이 프로그램에서 프리스타일을 할 때나 결국은 같은 벽에 부딪히더라. 나는 공동체에 속하기가 어려웠어. 그래서 깨달았어. ‘아, 이건 구조적인 문제다. 한국에서 어디서 춤을 추든 이 문제는 따라다니겠구나.’ 게다가 나도 이제 나이가 들고 있으니까, 앞으로 시간을 어떻게 쓸지는 정말 신중해야 했고. 2년 반 동안 이런 해로운(toxic) 환경을 겪으면서, 다시는 이런 걸 반복하지 않겠다고 마음먹게 됐어.
너가 정말 많이 지친 거지.
응. 그리고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그룹으로 춤을 출 때에 행복감을 느꼈거든. 그런데 P학원이든 프로그램이든 너무 혼자 춤을 추는 느낌이었어. 나는 명성이나 인정, 유명해지려고 춤을 추는 게 아니었거든. 관중들을 대상으로 하는 춤을 추고 싶은 것이 아니었어. 나는 선생님에게 개인 상담 시간에 항상 말했어, “나는 유명해지고 싶지 않다. 그냥 공동체에 속하고 싶을 뿐이라고.” 그런데 상담 내용을 듣고도 유일하게 그룹 공연을 할 수 있었던 기회에 나를 껴주지 않았던 거야.
P학원 시절에는 내 의견이 반영되지 못할 때가 있었지만, 쌤이 내 얘기를 듣고 “몰랐다, 미안하다”고 하면서 다음을 기약했거든. 그래서 이 프로그램 때는 그런 상황을 방지하려고 내가 원하는 바를 직접적으로 모두 얘기했거든. 그런데 이번엔 내가 말했는데도 의견이 반영되지 않았어.
너가 한국에 느꼈던 실망감이나 배신감 같은 거 있어?
하나의 주제로 묶어 정리해보자면, 결국 ‘낯설음(unfamiliarity)’이라고 생각해. 춤이든, 비자든, 일자리든, 다 같은 문제를 공유하고 있거든.
내가 낯설다는 이유로 춤 선생님들이 나에게 먼저 다가오지 않았어. 내가 계속해서 나 자신을 드러내야 했어. 그런데 그렇게 해도, 결국 또 다른 낯섦이 등장했어. 내가 다른 사람들이 평소 하지 않는 이야기를 하니까, 결국 그 낯섦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어.
춤 이외에도 나는 비자 문제를 겪었어. 영어 학원에서 일할 때는 원장이 나의 임금을 편법적으로 근로소득이 아니라 사업소득으로 신고했어. 그것 때문에 새로운 종류의 비자 신청이 가로막히는 상황이 생겼어. 전에 벌었던 소득이 정식으로 인정이 안 되어서 비자 신청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 거야. 원장이 탈세를 하는 방식이었지. 영어 강사를 하는 사람이 이렇게 오래 일하면서 상위비자를 신청하는 경우가 흔하지 않다 보니 법이나 규칙이 무력해진 거야. 그 틈에서 원장이 상황을 악용할 수 있었던 거야.
또 마지막에 학교 채용 문제를 겪게 되었지. 내가 어떤 국제 학교에서 성과를 낸 적이 있어. 정식 계약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갈 때였어. 그런데 결론은 “너가 실력과 경험이 있고 1년 동안 우리를 도와준 것은 고마워, 그렇지만 전례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익숙한 내국인을 뽑을 거다” 이런 식이었지. ‘익숙하지 않은 존재’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공감하는 바야, 한국에서 사람들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어떻게 포함시킬지에 대한 방법을 모르는 것 같아. 문화적인 접근법과 제도 측면에서 모두 그랬던 것 같아. 그런 프로토콜이 생겨야 하지 않을까?
사실 서류상으로는 프로토콜이 있어. 기존 비자를 연장할 때 제출해야 하는 서류 목록을 보면, 원장이 세금을 제대로 신고했는지 입증할 수 있는 서류가 있어. 사실, 나는 애초에 기존 비자를 연장할 수조차 없었어야 했어. 그 프로토콜이 제대로 적용됐다면 말이지. 그런데 기존 비자를 연장할 때는 아무 문제 없다고 넘어가더니, 정작 상위 비자로 바꾸려 하니까 갑자기 내 책임으로 돌리는 거야. 정부, 출입국이 직접 만든 매뉴얼이잖아. 세금 제대로 신고되는지 확인하라고. 그런데 자기들이 만든 규정을 자기들이 안 지킨 거야. 그 서류만 확인했어도, 원장이 세금을 제대로 신고하지 않았다는 게 드러났을 텐데. 그래서 원장은 세금을 내지 않으면서도 사업을 계속할 수 있었던 거야.
법은 존재해. 읽을 수도 있고, 이해할 수도 있어. 그런데 실제로는 지키지 않는 거야. 외국인이 관련되면 법은 무시돼. 우리가 노무사한테 연락했을 때도, 결국은 같은 대답이 돌아왔잖아. 프로토콜은 있지만 외국인 문제에 대해서는 굳이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지.
내가 느낀 분위기는 그래. 이건 한국에 정말 실망스러운 부분이야. 인터넷 시대에 살고 있는데, 이제는 “몰랐다”는 게 더 이상 변명이 될 수 없잖아. 그런데도 고치지 않는 건, 사실상 무지를 무기로 삼는 거라고 봐. 그리고 그 짐은 결국 소수자, 즉 이 경우엔 외국인들이 떠안게 되는 거지. 결국 시스템이 약속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모든 불합리를 우리가 감당해야 해. 그래서 나는 더 좋은 기회들을 얻지 못했어. 자격으로, 실력으로 돌파할 수 없는 벽이 너무 많았거든.
친구한테도 자주 말했어. “내가 흑인계 혼혈이거나 게이이거나 외국인 중 하나라도 아니었다면 훨씬 나았을 것”이라고. 내가 진짜 열심히 한국어를 배웠잖아. 근데 이제 깨달은 거지. 한국어 실력 같은 건 애초에 체크리스트에 없었다는 걸. 결국 중요한 건, 내가 한국인들이 기대하는 정상성의 체크리스트에 하나도 들지 못했다는 거야. 그래서 나는 여기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던 거야. 나는 정말 운이 나빴던 거지. 태어난 모습 그대로가 이 사회에서는 불리한 조건이었던 거야.
맞아, 한국 사회는 정상성을 판단하는 체크리스트가 있는 것 같아.
응, 학교 채용건과 관련해서 내 친구가 고용주의 이야기를 귀띔해줬거든. 나의 비자를 부담스러워했대. 그런데 그 비자는 사실 한국에서 기술력을 인정받아서 실력으로 얻은 자격이야. 나는 원래 회사에서 후원받아야 체류할 수 있는 비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비자로 업그레이드하면서 프리랜서 자격으로도 일할 수 있게 됐어. 그런데 학교 입장에서는 처음 다루는 거라 낯설었을 거야. 반대로 만약 내가 스트레이트여서 비교적 수월하게 연애를 하고 한국인 배우자와 결혼해서 비자를 받았다면, 학교는 나를 고용하는 것을 훨씬 익숙하게 여겼을 거야. 그래서 다시 말하자면 실력 기반 비자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내 실력을 증명해주지 못했어. 아무리 노력해도 상관이 없는 거야. 그래서 너무 답답했어. 사람들은 겉으론 능력주의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차별이 그걸 막고 있었어. 지금은 인터넷 시대고, 이제 2025년이야. 한국은 세계 경제 속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고, 외국인 노동자나 영어 교사 덕도 많이 보잖아. 그런데도 앞에서는 여전히 “한국은 한국인만”이라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어. 외국인의 기술과 노동이 필요하면서도, 정작 받아들이지 않는 거지.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라는 변명은 이제 통하지 않아. 더는 그런 변명으로 넘어갈 수 없어.
공감하는 부분이야. 한편으로는 너가 한국에서의 경험으로 너 자신을 부정하게 될까봐 걱정돼. 그래서 한국 생활 이후에 너에게 남겨진 것들이 무엇인지 묻고 싶어.
나는 여기 온 걸 후회하진 않아. 다만 지금은 떠나야 하는 시점이라 아쉬운 점이 더 많이 생각나는 거고. 그 감정 둘 다 중요하다고 생각해. 한국에 대한 감정이 어느 한쪽으로만 기울지 않도록. 괜히 체면 때문에 ‘아, 정말 좋았어’라고만 포장하진 않을 거야. 정말 끔찍했던 것도 아니고, 그냥 그랬던 거지. 분명 후회는 안 해. 그리고 네가 이 질문을 설명하는 걸 들으니, 혹시 네가 내가 한국에 대해 나쁜 것만 생각한다고 오해할까봐 걱정되기도 해. 사실 난 다 생각하고 있어. 근데 이 모든 걸 제대로 지나가야 한국을 원망하지 않게 되거든. 그래서 지금은 약간 실망을 충분히 느끼는 중이야. 그래야 나중에 원망으로 굳지 않으니까. 어쨌든, 후회하진 않아.
그리고 한국이라서 얻은 것, 미국이었다면 못 얻었을 수 있는 걸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우리 집에서 엄마와의 관계 방식이야. 한국에 오면서 나에게 여러 건강하지 않았던 연결 관계들을 끊게 해줬던 것 같아. 내 직업적 성공과 실패가 여기서 벌어졌잖아. 엄마가 익숙한 시스템 안에서 벌어지는 게 아니었고. 그래서 지난 8년간 내가 한 선택들은 ‘엄마에게 잘 보이려고’가 아니라 진짜 내가 원해서 했던 거야. 반면 미국에 있었다면, 연봉은 얼마인지, 어디서 일하는지, 집은 어떤지 같은 것들이 문화적으로 당연시되는 비교 항목이 되잖아. 그러면 엄마가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했을지도 몰라. 특히 누나랑 비교됐겠지. 그런데 가족 중 아무도 해보지 않은 일을 내가 해버렸으니까, 사실 뭐라 말할 수가 없었던 거야. 그 침묵이 주는 자유, 그게 내게는 값졌어.
엄마가 있는 호주로 넘어가잖아, 호주 생활에 기대하는 바는 뭐야?
어떤 특정한 인생 계획에 집착하지 않으려고 해. 엄마가 사는 곳으로 가서 한숨 돌리고, 보고, 느끼고, 판단하려고 해. 그럴 수 있는 처지인 것도 특권이라는 걸 알아서, 그 파도를 잘 타보려고. 어떻게 될지 보자고. 누군가— 직업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내가 한국에서 건져 올린 가치를 알아봐 주고, 그게 뭔가로 피어났으면 좋겠어.
다만 방금 말했듯, 완벽하지 않은 시간을 막 지나온 거잖아. 그래서 약간은 세상 시스템을 신뢰하지 않는 상태야—너가 계속 ‘능력주의’ 얘기를 했듯이. 지금 나는 여러 시스템들에 대해 불신이 커. 그 불신은 자연스러운 거라고 생각해. 사과할 생각도 없고, 오히려 그 불신이 내가 움직이는 방식을 규정해야 한다고 봐.
‘이번엔 다를 거야’라고 스스로에게 거짓말했다면, 난 아직도 나를 힘들게 했던 댄스 프로그램에 남아 있었겠지. 거기서 더 시간을 태웠을 거고, 아니면 ‘한국은 언젠가 나에게 친절해질 거야’라며 몇 해를 더 허비했겠지.
한국은 한국이었어. 내가 뭘 원하든 상관없이 그런 곳이었으니까. 호주도 그런 마음으로 대하려고 해. 호주가 다양성이 높다고 해서 다를 거라 생각하지 않으려고. 거짓 기대감을 가지지 않는 거야. 뭐가 기다릴지 모르니까, 갑자기 덮어놓고 ‘이번엔 괜찮겠지’ 같은 태도로 굴 순 없어. 말하자면, 약간 최악도 대비하면서.
그래서 나의 계획은 뭐냐고? 죽지 않기. 나 자신을 돌보기. 내 마음을 계속 점검하고 그에 맞춰 움직이기.
좋다. 일상을 살아내기.
응, 당분간은. 아직 젊을 때! 너무 나이든 사람처럼 말했나?
우리가 30대에 들면서 늙어간다는 느낌을 자꾸만 받지만, 사실 인생은 길어. 우린 아직 젊어. 진짜로.
응, 맞아.
지안무가에게 한국에서의 삶은 고단했다. 자신을 '낯섦'으로 규정하는 한국 사회에서 그의 마음엔 자꾸만 생채기가 났다. 그럼에도 그는 8년을 버텼다. 그 시간 속에는 분명 즐거움과 유쾌함, 행복감과 도전의식 같은 긍정적인 순간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공동체에 속하고 싶다는 갈망과, 그 갈망이 충족되지 못한 씁쓸함도 크게 자리잡았을 것이다.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낯선 이에게 ‘환영받고 있다’는 감각을 줄 수 있을지. 좀더 세게 말하자면 반추하고 반성해봤으면 좋겠다. 한국 사회가 놓쳐버린 인재들은 아마도 지안무가만 있지 않을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