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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승용 uxdragon Aug 20. 2023

디자이너와 번아웃

어쩌다 일상


'디자이너와 번아웃'


클럽하우스에서 다음과 같은 주제를 듣고 이건 내 얘기라는 생각이 들어 참여하게 되었다. 역시 주니어든 시니어든 각자의 위치에서 고민이 많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왜 번아웃이 오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면 나는 스트레스에 취약한 사람이다. 이전에도 스트레스와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에 대해서 고민이 많았고 관련해서 브런치에 글을 쓰기도 했다.


13년간 IT업계에서 회사생활을 했다. 급변하는 업계 환경 속에서 버텨왔고 또 버텨왔다. 일을 하면서도 항상 고민했다. '내가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내가 혹시 동료에게 민폐가 되지는 않을까?'와 같은 고민이었다. 불안하고 위태했다.


나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온전히 나 혼자만을 위한 시간 말이다. 돌이켜보면 회사에서 회의는 언제 하는지, 그 회의는 언제 끝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저녁에 약속을 잡을 수도, 시간 내서 운동을 할 수도 없었다. 어느 날 저녁은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원격 회의 요청이 왔다. 당황해서 헐레벌떡 밖으로 나가 회의에 참석했다. 그렇게 회의는 진행되었고 한 시간을 밖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회의가 끝나고 허탈한 감정이 들었다.


나 스스로 주체적인 관점에서 기획을 할 수 없었다. 의사결정은 누군가의 선호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기획자적인 내 생각과 관점보다는 누군가의 생각을 읽기 위해 바빴다. 매번 공유를 할 때마다 시안이 늘어나고 그 시안들은 대부분 다양한 이유로 버려졌다. 이를테면 어느 날은 복잡하다는 이유로. 어느 날은 단순하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리고 다음날 또 시안들은 새롭게 생산되기 바빴다. 어느 날 정신 차려보니 정리된 기획서를 보고 '이 기획을 내가 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하도 많은 수정이 가해진 탓이다.


여느 때와 같이 야근을 하고 있는 저녁이었다. 타 그룹 팀장님이 잠깐 보자고 했다. 대화의 요지는 '요즘 당신 왜 이러냐며, 집중을 잘 못하시는 것 같다'라고 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바로 그 앞에서 펑펑 울었다. 왜 그랬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살얼음판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누가 툭 건드리기만 해도 넘어질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콕 집어 이야기해주지 않아도 나 스스로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최선을 다하고 있지 못한다는 것을.


새벽이 되려고 하던 그때 상사가 내게 이런 업무를 주말동안 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때 다른 팀원들은 이미 퇴근한 상태였고 나는 회사에 있었기 때문에 역설적이지만 오히려 좋았다. 새벽이라도 집에서 일을 안 하고 회사에서 해서 다행이라고 말이다. 그렇게 정신승리하는 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매일이 우울하고 지옥 같았다. 회사는 좋은 인테리어로 가득 찼고 사람들은 항상 뭐가 즐거운지 깔깔댔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런 좋은 것들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단지 속절없이 즐거운 직원들이 신경에 거슬릴 뿐이었다. 비록 보기에 좋았지만 나에겐 철창 없는 감옥과도 같았다.


택시를 타고 출근하던 어느 날 라디오로 노래가 흘러나왔다. 눈물이 났다. 정말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깨달았다. 나에게 번아웃이 찾아왔다는 것을. 어서 빨리 정지 버튼을 눌러야 한다고 말이다. 그 이후부터 주변 동료와의 관계와 상사와의 관계 그리고 남들이 보는 시선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여러 명과 장시간 면담을 진행하고 결국 한 달 휴직 의사를 밝혔다. "살 사람은 살아야죠." 한 달 휴직을 앞두고 프로젝트 PM님이 나에게 했던 말이다. 그렇게 한 달을 쉬었다. 쉬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더 이상 출근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아 고민 끝에 결국 퇴사를 하겠다고 다짐했다. 생각보다 한 달의 시간은 짧았고 그 시간 동안 회복이 될 리 만무했다. 퇴사의 과정도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회사의 여러 분들이 고맙게도 여러 다양한 제안을 해 주셨지만 나는 이미 결정을 내린 터였다. 그리고 그 결정은 절대 변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거절의 연속의 긴 터널을 지나 결국 퇴사를 확정 짓게 되었다.


번아웃이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나는 소진해 버렸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나는 왜 나 스스로를 지켜내지 못했던 걸까.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다면 똑같은 결정을 할 수 있을까. 좀만 더 쉬어본다고 할까. 포트폴리오가 완성되고 나가도 늦지 않을 텐데 같은 온갖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현재는 느리지만 조금씩 회복 중이다. 사실은 나도 이렇게까지 길게 갭이어를 가질 줄은 몰랐다. 일에 진심이었고 일을 잘하고 싶었고 팀원들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그런 책임감이 너무나도 무거웠고 결국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무너져 내린 탑을 하나씩 쌓는 과정은 마냥 즐겁지많은 않았다. 퇴사의 이유를 누군가에게 설명해야 하고 나 스스로도 퇴사 기간이 헛되지 않음을 증명해야 했다. 돈은 떨어져 가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커져만 갔다.


하지만 앞으로 더 많은 기간 일을 해내야 하기 때문에 쉼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긴 터널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훝날 나의 결단이 잘한 선택이 될 수 있게끔 하루하루를 살아가려고 한다. 어쩌면 그동안 힘을 꽉 주고 살았으니까 조금은 힘을 빼도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인생은 생각보다 기니까.




Epilogue 


퇴사 후 첫 행보는 태국 한 달 여행이었다. 태국에는 대중교통수단이 여러 개가 있지만 어쩌다 보니 바이크가 기동성이 좋고 비교적 저렴해서 자주 이용하게 되었다. 바이크를 타는 순간 느껴지는 바람과 날씨 상태. 도로 주변의 소리. 시장에서 나는 맛있는 냄새 같은 것들이 합쳐지며 오감이 만족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 순간만큼은 자유로웠다. 그리고 현지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집 그리고 회사를 다람쥐 쳇바퀴처럼 반복한 나의 지난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생각보다 나는 좁게 살았구나 싶었다. 연고도 없는 낯선 땅에서 평소 일상에서는 누릴 수 없었던 자유를 비로소 만끽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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